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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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늘 지나던 길을 반복적으로 오가며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며 우리는 살아간다. 비록 그 지나온 발자취가 모두 어떠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흔적들은 각자의 뇌리에 기억으로 자리함으로써 개인의 역사적인 단편으로 남게 된다. 우리가 가끔은 지나온 자신의 삶의 궤적을 갖은 원망과 후회의 기억만을 떠올려 스스로 자책할 때도 많지만, 그건 단지 자신이 가꿔 온 삶의 단편에 연연하기 때문인 것 같다. 고향에 들러 어린 시절 뛰어 놀던 골목길을 지날 때면 다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는 그렇게 높아보였던 담벼락이 이렇게 낮았었나! 하고 말이다. 분명 몸의 성장으로 인한 눈높이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차이로만 생각할 수 있지만, 아마도 그동안 달라진 건물의 구조와 환경 속에서 살아온 탓에 작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눈에 보이는 모습에 대한 자신의 느낌은 변했지만, 그 낮아 보이는 담벼락 아래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의 정안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맘속에 기억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지나고 있는 길들과 그 길의 배경이 되는 모든 것들 또한 시간이 흘러 세월의 변화라는 옷을 갈아입기는 하겠지만, 그 길을 지나며 가졌던 나의 생각과 행동들이 남긴 자취는 그대로 오랜 세월의 옷으로 갈아입지 않는 역사로 남겠구나! 라며 일상의 의미를 더해보게 된다.

<나무야 나무야>는 세월의 변화라는 옷으로 두껍게 갈아입어 이제는 갖고 있던 속내가 감춰지거나, 소멸되어 가는 역사의 자취들을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느끼고 싶었던 필자의 옥중에서의 오랜 바람들에 대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진 세월동안 역사의 아픔을 검은 활자를 통해서만 누려야 했던 서러움에 대한 해방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동의보감>으로 알고 있던 허준이 스승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했다던 가마볼 얼음골에서 시작해 역사의 이모저모를 살피듯 국토를 가로지르며 전하는 가는 곳마다의 뿌리 깊은 사연들은 어제를 살아왔고, 오늘을 살고 있으며, 내일을 살아갈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되돌아오는 듯 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커다란 울림 속에는 어쩌면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으로 찌든 현대인들이 소홀히 생각하는 역사의식에 대한 채찍질도 들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동안 감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들 또한 아낌없이 담고 있다.

“자유와 낭만은 ‘관계의 건설공간’이란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우리들이 맺는 인간관계의 넓이가 곧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낭만의 크기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日常)에 내장되어 있는 ‘안이한 연루(連累)’를 결별하고 사회와 역사와 미래를 보듬는 너른 품을 키우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p. 93)

특히 이 구절은 필자와 더불어 어깨동무를 하듯 나무들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의 다정스러움이 주는 의미와 더불어 결국 ‘우리의 삶이란 결국 건강한 관계를 통해서 자유와 낭만까지도 만끽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깊게 깨닫게 해 준다.

꼭 기록된 역사의 흔적들을 돌아보는 것을 통해서 어떠한 역사의 의미와 그 구성원으로서 갖게 되는 소명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가장 가깝고도 쉬운 자신의 지난 발자취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얻을 수 있었던 교훈들을 다시금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나무야 나무야>를 통해 전하는 이 커다란 울림을 제대로 받아들인 셈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한 시간들은 자신을 ‘관계의 건설공간’ 안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게 만들고, 타인과 더 큰 세상의 역사에 대한 혜안을 갖게 만들며, 결국은 풍요로운 자유와 낭만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벅찬 기대감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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