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대의 쇼 - 진화가 펼쳐낸 경이롭고 찬란한 생명의 역사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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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밤하늘을 가득 메운 체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 볼 때면 이런 생각에 빠지곤 한다. ‘우주라는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공간에 자리한 지구라는 작은 별 안에서 살고 있는 나의 존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곧 유일무이한 신의 존재와 동일시하는 나의 존재에 대한 유일함 일깨워 스스로를 위로하게 만들곤 한다.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심각한 우울증이나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스스로 겪어보지 못한 일이나 느낌에 찬동한다는 것이 꽤 위험한 우매함속에 자신을 몰아넣을 수 있다는 생각한다. 그로 인한 나의 의견과 행위는 나만 혼자 볼 수 있는 일기장에 적어 내려가는 일상의 반성이 아닌 또 다른 영향력을 낳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필요이상의 영향력을 타인에게 공격적으로 강요함으로서 동시다발적이면서도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의 무지로 몰아가고 있는 모습을 지금도 우리는 보고 경험한다.

문자로 기록되면서 전해진 인류의 문화적인 역사는 지구와 인간의 기원역사에 비하면 어쩌면 사막의 모래알과 같은 지극히 짧은 역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위대함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신비를 꿰뚫을 만한 심미안적 재능과 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통해서 만물의 으뜸자리에 이르게 만들어 놓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이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주의 진리라기보다는 자신의 걸어온 길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욱이 최근 급증하는 지진과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들의 처참한 모습 속에서 만물위에 군림하는 인간이 아닌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순응하는 인간으로 제자리를 찾아갈 때 보다 평온을 찾을 수 있다는 자각의 시급함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말한 진화론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진화를 설명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는 지속된 무지함속에서 키워온 인간의 파괴적인 본능에 대한 자각과 반성의 장을 마련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지상 최대의 쇼>안에 펼쳐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화려한 흔적들, 지구의 역사와 더불어 진행된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분열로 증식하는 박테리아에서부터 꽃과 곤충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의 변화무쌍하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환경에 순응한 변화들은 그야말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쇼를 보는 것과 같다. 더욱이 이 쇼는 생물학적인 지식의 바탕의 유무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을 특징으로 삼을 수 있다. 이는 도킨스가 준비한 이 화려한 진화의 쇼는 단지 종교적인 창조론에 맞장을 놓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닌 서두에서 말한 창조론에 대한 필요이상의 영향력에 강요당한 이들을 일깨우기 위한 나름의 역작이기 때문이다. <지상 최대의 쇼>를 접하기 전 다윈의 진화론을 섭렵하고 즐긴다면 보다 흥미롭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학창시절에 배운 진화론의 개념만을 담고 새롭게 접근한다 해도 생명의 역사에 충분히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의 힘을 절대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살아가고 있는 우주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의 신비로운 탄생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탄생 이후에 마치 작은 모래알갱이로 시작된 지구와 인류가 지닌 생명의 역사는 분명 끊임없이 거듭된 자연선택적인 진화의 과정을 겪어 이 자리에 와있다고 생각을 <지상 최대의 쇼>는 선물하고 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비롯된 진화역사는 200여 년간 숫한 논쟁에 휩싸이며, 오늘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라는 간이역에서 보다 진화한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살아있는 한 그 진화의 역사 역시 꾸준히 새롭게 진화하리라 기대한다. 지금보다 더 멋진 쇼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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