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 맞다와 무답이 담쟁이 문고
최성각 지음, 이상훈 그림 / 실천문학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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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라며 보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눈으로 보고, 나무들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를 맘껏 가슴으로 호흡하고, 또 직접 손으로 만져보며 느끼는 자연은 마치 언제든 지친 심신을 포근히 감싸 안아 줄 어머니 품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머니가 둘인 셈이다. 늘 나를 무한한 사랑으로 가슴으로 감싸주시는 낳아주신 어머니, 어머니와 같은 개별적인 관계가 아닌 공통적 관계로 나의 생로병사와 더불어 삶의 장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역할로서의 어머니인 대자연, 공통점은 역시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학창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어 늘 마음으로 몇 번씩 보답해야지 생각을 반복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어머니의 아낌없는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물론 그 사랑은 어쩌면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받은 사랑을 배품으로서 그 숭고함의 연속성을 이어가는 것으로서도 나름의 보답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에는 보답해야한다는 전제를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자연은 어떠한가? 자연도 부모님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비롯한 자연을 이루는 모든 생명체가 공생하며 유지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간들은 대자연의 공생관계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들이 독보적인 존재인 냥 다른 생명체를 군림하려 하고, 파괴를 일삼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 결과 자연은 더 이상 인간에게 순수한 자연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욱이 파괴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 한다. 아마도 그 좋은 예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극지방의 빙하들의 해빙과 그로인한 기후와 생태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거위, 맞다와 무답이>를 통해서 우리는 순수한 자연을 대변하는 한 쌍의 거위와 그리고 인간들이 함께 보내는 사계절을 볼 수 있다. 다행히도 ‘맞다’‘무답이’ 라 이름 붙여진 거위 한 쌍은 자연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서 조금은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분들의 손아래 키워졌기 때문에 나날이 인간들과 또 다른 동물들과의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그렇다고 여전히 그동안 몸에 익은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날 수 없어, 거위와 더불어 주변의 동식물들에게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씩 제자리를 찾기 가기 위한 노력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참 남녀의 만남도 사람들과의 만남도 지속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예전 같지 않게 개인적인 생각과 삶을 중요시하는 세태풍토가 만연되어 있는 것을 원인으로 찾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내심이 많이 약해진 탓 같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만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남녀의 만남과 이별의 기간이 보통은 3개월에서 6개월을 넘기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지금의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제안을 하고 싶다. 연예를 목적으로 만나는 이성이든. 모든 대하는 사람들을 적어도 사계절 동안만은 지켜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바쁜 세상에 뭘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낭비를 하며 지켜봐야하냐며 반문할 것을 안다. 하지만, 술이나 장도 본연의 제대로 된 맛은 보기위해서 1년 이상 묵혀야 하는 법, 한 길 물속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1년은 결코 긴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속에서 거위 ‘맞다’‘무답이’ 는 쇠뜨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마치 “한번 좋아하게 된 것은 끝까지 좋아하자!” (p.56)라는 철칙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러한 순수함이 비효율적이라며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경제논리 앞에서 멍청함으로 보이지만, 자연과 삶이라는 무한한 가치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이 순수함 이야말로 가장 큰 가치를 갖지 않나 생각해본다.

짧은 2년 동안 거위 한 쌍을 키우며 인간을 제외한 자연을 이루는 다른 생명체들을 몸소 접하며 터득하는 자연의 순리와, 또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키워가는 희망들을 바라보며 자연이라는 어머니에게 지금까지 얼마나 커다란 불효를 하고 있는지는 크게 깨닫게 됐다. 거창하게 현수막 들고 1년에 몇 번 하천청소에 참가하는 것만이 환경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음식물을 줄이고, 자연을 숨 쉬지 못하게 하는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하는 생활습관에서 환경운동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거위, 맞다와 무답이>에서는 분명 인간과 대자연의 순수성을 대변한 한 쌍의 거위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서 보여준다. 그 모습을 아름답게 느끼며 동경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속에 그러한 순수함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들이 자연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존재가 아닌 함께 공생관계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며 이용하고 파괴한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때 아마도 ‘맞다’ 라고 답하며, 자연재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의 순리와 어긋난 인간들의 행보에 자연은 ‘무답’ 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손을 들어주는 듯하지만, 그 잘못된 판단의 대가는 또 소리 없는 재앙을 통해서 깨닫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들이 접하게 될 생태소설에 스스로 지나치게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나의 느낌처럼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이 이렇게 순수함의 가치를 지닌 자연을 다룬 이야기들을 통해서 자연의 소중함을 마음으로 깨닫고, 자연이 주는 풍요로운 안식을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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