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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ㅣ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주로 대학가의 민속주점과 분식점 벽에서 그 집의 맛깔 나는 음식만큼이나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벽에 자유분방하게 적어놓은 낙서들이다. 짧지만 달콤한 프로포즈에서 번쩍이는 위트 가미된 유머나 비방글, 심지어는 솔로의 간절한 구애가 담긴 전화번호까지 적혀있다. 이러한 낙서들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의 느낌은 이렇다. 음식의 기다림에 대한 지루함을 달래듯, 방문에 의미를 담아 추억 흔적으로 기억하듯 그때의 짙은 사실적인 느낌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혀진 낙서들을 읽는 이로 하여금 금세 동질감에 사로잡히게도 만든다.
글을 통한 사실감이 감성을 자극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심하게 요동치기 마련이다. 심장의 박동이 함께 빨라지고, 숨소리를 나지막하게 죽이게 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고, 손바닥의 손금사이에도 습기가 묻어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감은 강한 흡인력에 이어진 효과이다. 마치 책속의 주인공과 나는 한 몸이 되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함께 서로 호흡하듯 따라서 이동을 하게 된다.
‘트루먼 카포티’라는 작가의 이름이 낯설지 않음에 이유가 있었다. 2006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등을 휩쓸며 화제를 일으킨 영화<카포티>의 영화속 주인공 역시 이 단편소설집<차가운 벽>의 저자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짧게 소개하자면 영화<카포티>는 카포티의 성공작인 희대의 살인마를 인터뷰하면서 써내려간 걸작<인 콜드 블러드>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 드라마로 일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살인마와의 기묘한 공감대와 자신의 역작을 완성하기 위한 작가적 야심, 그리고 인간관계 사이에서 고민하는 카포티의 충격적인 실화이다. 그리고, <차가운 벽>안에 수록된 1943년부터 1982년까지 쓰여진 단편집들은 카포티의 꾸준한 상상과 뛰어난 관찰력 등이 낳은 산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카포티의 단편을 통해서 전해지는 감성은 그야말로 눈앞에서 짧게 펼쳐지는 상황아래에서자신을 주인공내지는 상대방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사실감 섞인 상상력의 표출이었다. 단편소설은 장편소설과는 달리 마치 갑작스레 밀려왔다가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해일처럼 순발력 있는 감정묘사로 읽는 이의 가슴속에 여전히 해일의 물거품을 일게 만드는 것이다. <차가운 벽>의 느낌은 바로 이러한 해일의 물거품처럼 순간 휘몰아쳐 강하게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치 빙의에 빠지듯 화자 또는 상대방과 호흡을 나란히 하게 되면 그들의 감정을 그대로 전해 받게 된다. 위협적인 순간에 가슴이 조여오고, 아빠의 존재감에 불신을 갖고 있던 어린 아들의“사랑해요 아빠”라며 다가서는 한마디에 손을 내밀 듯 미소 짓게 만든다. 1984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카포티, 사망당시 그는 알콜중독과 정맥염과 각종 약물중독의 합병증으로 인한 간질환이 사망원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왠지 그의 작품들까지 그러한 도덕적인 측면에 투과시켜 본다면 다소 퇴색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차가운 벽>속의 단편들이 시대를 불문한 인간 현실의 범주을 지나지게 벗어나지 않는 사실감 넘치는 상상력의 표현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