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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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미래학자들이 내놓은 인류의 미래에 관한 책을 읽고 한층 부푼 마음도 잠시, 책<탐욕의 시대>으로 점칠 수 있는 미래는 지금보다 더욱 극명히 흑백논리로 분리된 처참한 장면을 목격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미래학자들의 꿈꾸며 지향하는 유토피아는 단지 60억 지구촌 가족 중 단지 10%을 위한 발전과 풍요일 뿐이다. 미래에는 현재보다 발전된 가상현실 속에서 교육을 받고 “사이버 나우”라는 옷을 입고 있으면 24시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해준다고 한다. 더욱이 나노기술의 발전은 산업혁명 이후의 진정한 미래혁명을 가져와 식량부족과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나 이외의 환경오염을 해결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왜 필자는 <탐욕의 시대>을 통해서 프랑스 혁명의 상황을 역설하며 그것에 버금가는 혁명의 필요성 또한 역설하는 걸까?

 <탐욕의 시대> 저자 장 지글러는 2000년부터 8년 동안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하면서 현재 인류가 직면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늘어나는 자연 재해 만큼이나,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는 또 다른 재앙에 대한 이야기를 <탐욕의 시대>에 담았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재해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들이 스스로 개발이라는 명목아래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의 결과인 인재인 셈이다. 지금 인류의 80%의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는 인재가 있으니 그것은 가난으로 비롯된 기아로 인한 사망이다. “가난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제사정이 아니냐?” 라며 반문할 수 도 있다. 인류의 가난과 기아의 악순환은 봉건시대 절대 권력에 버금가는 500개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탐욕으로 휘두르는 경제의 칼날 앞에서 그 골이 더욱 깊어지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거대 기업의 인류의 공동자산처럼 여겨져야 할 미래지향적인 생산의 발전과 학문적 발견들의 사유화와 독점화는 인류의 미래를 밝히기 보다는 크나큰 재앙을 낳아가고 있다. 책속에서 저자의 유엔기관에서 활동기간동안에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몽골, 브라질 등의 극심한 가난과 기아의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가난을 극복하여 옆에서 서서히 심장소리가 잦아드는 자식들에게는 더 큰 희망을 안겨 주려는 노력은 그야말로 처연하기만 하다. 방송을 통해서는 마치 거대 글로벌기업들이 인류애를 갖고 이들을 위한 자선기금을 선 듯 내놓는 듯 보인다. 그들은 결코 무료나 무상이란 생각을 잊은 지 오래다. 자선에도 역시 훗날의 그 보다 10배 100배의 대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챙기는 대가는 오늘 연명을 하게 된 가난한 사람들의 미래를 짓밟고, 마치 노예처럼 만든다. 암과 같은 질병도 아닌 기아가 인류의 가장 중요한 사망 원인이라는 사실도 충격인데, 각종 부채를 통해서 가난과 배고픔에 떨고 있는 지구촌 사람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떠밀며 경제적 논리만 생각하는 권력의 중심과 경제의 중심에 자리한 미국과 거대 기업들의 만행들을 드려다 보면서, “인간은 결국 악한 존재구나!” 라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칸트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논하며 이렇게 말을 맺었다.

“처음으로 자유를 추구했다는 사실이 지니는 가치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은, 다른 민족들이 다른 상황에서라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음을 망각하거나 다시금 이와 같은 일을 시작하고 싶은 끓어오르는 흥분감을 억누르기엔 너무도 엄청나고 인류의 복지와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세계 모든 분야에 너무도 큰 영향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p.327)

 과거 프랑스 혁명은 길고 긴 절대권력 앞의 인권유린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인간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찾아 주었다. 기아와 부채라는 악순환방정식으로 신흥 봉건제후로 일컬어지는 거대 기업들과 북반구의 선진국들에 의해 또 다시 인류의 인권은 심하게 유린되었다. 그렇다면, 또다시 프랑스 혁명과 같은 역사의 마침표를 찍어줄 전기는 분명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 마침표에 또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분명 탐욕의 권력 또한 순순히 칼을 내려놓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지금 우리가 <탐욕의 시대>에 눈을 돌려야하는 것은 서둘러 혁명의 주인공이 되어라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분명 5초에 1명씩 기아로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극한 상황이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 여론은 무지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무지는 독재를 부추긴다.” (p.331) 라는 마라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불길 속으로 뛰어들기보다는 적어도 불이 난 건물구조에 대해서 알고 들어가야 자신과 더불어 불길 속 위험에 처한 사람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탐욕의 시대>를 통한 지금의 신봉건사회를 먼저 이해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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