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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센스 노벨
스티븐 리콕 지음, 허선영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스티븐 리콕 작가의 단편 모음집이다. 처음 접해보는 작가이지만, 다수의 풍자문학으로 호평 받았고 사후 캐나다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스티븐 리콕 유머상’이라는 수상제도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풍자와 유머 쪽에서는 이미 공증을 받은 셈이다. 표지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서커스 그림과 더불어 이야기에 북미식 유머코드가 섞여있다는 점에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책은 총 여덟 가지의 짤막한 이야기들로 구성 됐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평범한 이야기인 듯 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전개가 진행되어 흥미롭고, 시쳇말로 ‘아무말 대잔치’인 듯한 내용 때문에 우리 정서에 코드가 맞나 싶다가도 엉뚱한 표현력과 풍자로 인해 어느새 묘하게 빠져들게 되는 신기한 매력을 가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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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느 순진한 여인의 슬픔>에서는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지 등의 원초적이고 엉뚱한 의문을 품고 있는 순진한 여인 마리 머시너프의 일상과 생각을 시간의 순서대로 그려 나가는데 그 서술방식과 특이한 내용이 그동안에는 접해보지 못한 스타일이라 참으로 이색적이다. 산책길에 발견한 양배추와 달걀이 죽어 있어서 울었다는 묘사와 사람이 목에 이젤을 두르고 강물에 빠진다는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p.52
오늘은 산책길에 양배추 하나를 발견했다.
… 양배추를 들어 올려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 그 옆에는 달걀이 하나 있었다. 달걀도 죽어 있었다.
아, 얼마나 울었던지….
p.68
지금은 목에 이젤을 두른 채 강물에 떠내려가던 오토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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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누가 범인일까?>는 제목이 말해주듯 미궁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흥미를 유발한다. 불행한 죽음을 맞은 한 사교클럽 회원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특징과 행위 묘사가 인상적이면서도 짜임새를 갖춘 스토리 구성이다.
p.142
메저디넘은 볼록했고, 바이노미엄에는 상당히 많은 군살이 있었으며, 프로시니엄은 활짝 열려 있었다며 비전문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늘어놓았다
6화에 서술되는 위의 대목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의학 용어들을 저자가 해학적으로 사용하였다고 옮긴이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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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에서 7화 <캐롤라인과 불사조 아기의 크리스마스>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남편이 교도소에 있기 때문에 결혼반지를 거리에 내던져버린 아내 캐롤라인은 자신의 아기까지도 버리려는 생각에 공원 벤치, 역 대기실의 선반, 호텔 데스크, 지하철 매표소 등 별별 곳에 아기를 두고 오지만 매번 누군가가 아기를 찾아주어 그녀의 품으로 돌아온다. 심지어 강에 던졌을 때는 가슴이 동요해 그녀 스스로 아기를 건져내 온다. 이런 상황을 불사조 아기라고 표현한 센스 자체가 작가식 유머의 진수를 보여준다. 교묘하게 얽혀있는 등장인물들의 관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p.194
“자, 아들들아. 이제부터 우리는 가늘고 길게 살자꾸나. 좋은 책에 이르기를 ‘직선은 양 극점 사이에 반듯하게 놓인 선이다’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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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중한 내용의, 조금은 독특한 스타일의 소설을 원할 때 이 책을 선택하여 읽어 본다면 북미식(?) 유머가 선사하는 엉뚱하고 독특한 재미를 십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