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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이제야 모든 게 환해졌다. 나는 정말이지 조금도 세계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퇴폐적인 문장에 전두엽의 일부가 건드려진 것이 분명하다. 문장을 소리 내 발음하면 다문 입 사이로 키득대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를 둘러싼 세계를 사랑하는 중인데 이런 비관적인 문장에서 끈적한 쾌감을 느끼다니. 사실 이 세계를 살아내는 일이 버거웠던 건 아닐까. 쾌감 뒤에는 죄책감이 살갗을 타고 올라온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좋아할 수 없다. 서평단으로 선정된 주제에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 출판사에 블랙리스트 같은 것이 있다면 앞으로 서평단은 힘들겠지만, 아 뭐 어쩌겠나.
한쪽 단면을 보고 그것이 실체의 전부라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 그 단면들이 모여 선입견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반드시 그 반대편을 상상하기 마련이고. ’오렌지와 빵칼‘은 우리가 단면이 아닌 양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이야기는 자기 통제와 사회적 통제의 극단을 상상한다. 사실, 이렇게 터프하고 단호한 이야기를 기대하진 못했다. 오렌지는 상큼하고 빵칼이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으니까. 아, 그래서 오히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건가? 걱정 말고 탑승하셔도 좋습니다. 다소 안전한 편입니다.
혼자서 차를 운전할 때, 가끔 심한 욕설을 한다. 특히 고속도로의 차 안은 더욱 밀실 같아서 거칠고 우악스러워진다. 가끔은 사람 몸에 기생하는 말벌 유충 영상을 본다. 유충은 생각보다 커서 그걸 뽑아낸 자리에는 싱크홀 같은 공동이 생긴다. 늘어나는 구멍들을 마치 내 몸인 양 기괴하게 감각한다. 아주 많은 경우에, 나는 내 안에서 기괴하거나 부정적이거나 비사회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통제 없이 튀어나오는 그런 면면이 겨우 ’빵칼‘에 불과하다면 다행이지 않나. 그러면 좀 더 맘껏 반대편을 상상할 수 있다. 빵칼이 파괴할 만한 것은 기껏해야 바게트 정도일 테니까.
무언가를 너무 싫어하는 상태는 사실 깊이 애착하는 상태가 아닐까-생각한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 같으니 그냥 한꺼번에 ’애증‘이라고, 한단어로 정의하면 어떨까. 서로 정반대 편에 있으니, 하나의 논리적 맥락에서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겠지만, 뭐 그러려니 하자. 우리는 다면체니까. 가끔 아주 싫어하는 대상을 도리어 ”사실 엄청 좋아하는 거 아냐? 이 정도면 사랑이지“라고 농담을 한다. 그렇게 농담하면 웃음이 나는데, 저 맨윗 문장도 이렇게 바꿔 말해보면 웃음이 난달까.
”이제야 모든 게 환해졌다. 나는 정말이지 미치도록 세계를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 이 책 좋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