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사는 법 - 여성을 위한 생활 법률 가이드
정관성.김지혜 지음, 이환춘 감수 / 리더스가이드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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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서평을 쓰는 지금 TV엔 온통 평양회담으로 들썩이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닌데 여전히 내겐 금기가 깨지는 묘한 느낌이 든다. 내가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였지만)에 다닐 때 북한은 승냥이들이 득실대는 지옥으로 그려졌다.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배웠다. 해마다 6월 25일에는 김일성 인형을 불태웠다. 김일성은 똘이 장군에 거대괴물돼지로 등장했다. 절대악의 상징이었다. 그건 당연하고 지당했다. 결코 만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곳이 북한이었다. 그런데 이제 통일을 이야기한다. 당연하고 지당한 통일이다. 그렇게 세상은 변한다. 변하는 게 세상이다.

 

말이 나온 김에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덧붙여보겠다. 나는 가난한 산골에서 자랐다. 지금은 사라진 광산이 있어 다른 산골보다 사람은 많았지만 시골은 시골이었다. 가난한 동네에 애들은 많았다. 그 가난한 동네의 딸들은 중학생이 되지 못하고 서울로 돈벌러갔다. 설이나 추석에 선물을 가득 안고 시골로 내려오는 동네 누나들을 보며 우리 누나가 야속했다. 하지만 야속함은 잠시였다. 내 누이도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로 돈 벌러 갔으니 말이다. 동네 형들은 어땠을까?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몇은 대학에 갔다. 한 동네에 살던 누나들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건 당연하고 지당했다. 남녀는 그렇게 달랐다. 아니 차별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성별에 차별을 둬선 안 된다. 당연하고 지당하다. 세상이 변했다.

 

당연하고 지당한 책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곳은 온갖 차별과 혐오로 얼룩져있다. 오랜 세월동안 눌려 있던 것들이 터지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래야 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우리사회는 준비가 덜 됐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일상은 여성들에게 법은 아직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고 남성중심의 사회는 냉랭하기만 하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페미니즘이고 여성해방이지만 여성에게 도움을 줘야하고 여성이 도움을 청할 실체가 모호하다. 그 모호함을 걷어내는 책이라 감히 말하겠다.

 

법률에 관한 책이다. 딱딱한 법률용어보다 친밀한 수다로 구성된 책이다.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는 성희롱이나 언어폭력, 데이트폭력과 같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법률개념이 제시되고 덧붙여 관련 사건의 과정과 결론도 추가된 구성이다. 물론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다. 수다 한마당이 흥미를 부르고 상황의 심각성을 법률로 확인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대책을 안내한다. 단순히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다. 책의 절반은 일상법률 즉 부동산, 금융, 자영업에 관한 법률정보로 채워져 있다.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구분자체의 사라짐이 변화의 종착일지 모른다. 여자에 방점이 찍혀있는 이 책의 다음은 사람이 사는 법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글쓴이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기에. 그게 당연한 일이겠다.

 

철옹성 같았던 북한이 변하고, 내 어릴 적 세상도 변했다. 잊고 살지만 변화는 언제나 고통과 혼란이라는 친구를 함께 데리고 다닌다. 고통이 사회와 개인이 짊어질 고행이라면 혼란은 좋은 길잡이로 조금씩 덜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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