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치유 -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
김준수 지음 / 디모데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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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치유」는 분명 구원을 받은 후에도 늘 다른 사람의 평가와 판단 그리고 스스로에게 인정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상한가? 그렇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고 무슨 판단을 했으며 무슨 분석을 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일까? 저자 김준수에 대해 먼저 알아보면, 그는 각종 유수 대학에서 성경 상담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목회 상담학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남서울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상담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경력만 보면 그가 그럴 수 없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많은 상담학 혹은 심리학을 연구하는 다른 많은 저자들처럼, 독자들에게 “이것이 당신 안을 치유하는 핵심 방법이다.” “이것만 풀면 모든 문제의 근원이 해결된다.”에 관련한 어떤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왜 “마음의 치유”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 지, 이 서평을 읽는 독자는 의구심부터 품을 것이다. 미리 결론을 내자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 책을 통해, 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

 

저자 김준수는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언행을 고치거나, 스스로 어떤 종류의 마인드 컨트롤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의 궁극적인 의도는, 바로 하나님께서 독자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독자를 준비시키는 데 있다. 이것이 다른 심리학적 치유류의 서적과 이 책의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주님께 치유 받을 준비가 되려면 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되는 지에 대해 말한다. 때문에, 그는 서두부터 교회를 좀 다녀본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구원론을 설파한다. 얼핏 보기에 뻔한 내용이지만, 바로 이 뻔한 내용에 진리가 숨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마음의 쉼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정작 그런 약속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약속해주신 풍성한 삶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늘 감사와 찬양을 말하지만 마음은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눌리고 불안하며 평안이 없는 삶을 산다. 말하자면, 주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어쩌면 그저 생각 없이 양심을 마비시키는 이들보다도 더 피곤한 삶을 사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들을 주님께서 심판하신 결과일까? 그렇지 않다.

 

저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너 자신을 알라.”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그리스도인들의 “너 자신은”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신”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그 다음에 바로 밝히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너 자신”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타인의 규정-혹은 평가-과 자신의 업적으로 구성되는 양파 같은 존재다. 태어났을 때부터의 그는 철저한 백지며, 존재 그 자체로는 의미를 얻지 못하는 존재다. 때문에 우선 먼저 그에게 붙는 것은 그에 대한 타인들의 규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정 중 다른 어떤 것을 얻어내는 데 필요한 것은 그의 업적이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좋은 대학을 나오고, 한 해 연봉이 얼마나 되며, 얼굴은 어느 정도로 인물인가. 그는 어느 직장에서 무슨 소속에 있으며, 이름 외에 불리는 직함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또한 그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며 사람들은 평소 그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가......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너 자신”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네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어느 누구를 그의 사회적 지위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그런 사회적 지위나 사람의 편의 자체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시거나, 아무 관심도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는 왜 우리를 사랑하는가?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그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는 존재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아 존재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때문에 정말로 “자신”이 누군 지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태여 자신의 모습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바꿀 필요가 없다.

 

그가 누군 지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를 향해 말씀하시는 선언,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규정에 뭔가를 더하거나 붙이거나, 혹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뭔가 자기 업적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십자가 보혈의 업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규정과 그리스도의 업적으로 완성되는 존재다.

 

그러나 이 정도는 영적인 피로감, 마음의 갈급함을 해소하는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정도는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축복을 진정 기꺼이 누리지 못하는가? 일단 전제부터 확고한 세워놓은 저자는, 여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위해 우선 먼저 그것을 막는 문제점들부터 분석해 들어간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하나님의 규정과 그리스도의 업적으로 완성되는 존재인데,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뭔가가 결국 타인의 규정-혹은 평가-과 자신의 업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로 원점 회귀시킨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것을 되새기려고 해봐도 어딘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비로 왜곡된 정체성에서 온다. 정체성의 왜곡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가정이다.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훈육과 양육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거절과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며, 그것은 비현실적 기대, 비교, 편애, 언어적 비하 혹은 부모들 개인의 사회적 사정으로 인한 방치 혹은 실질적 유아기-청소년기의 상실 등을 통해 나타난다.

 

때문에 이에 대한 심리적 방어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 네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게 된다. 친밀감을 힘들어 하면서 주변인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 강박감을 가지기. 다시는 거부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비난과 빈정을 통해 주변인들을 밀어내기. 상대에게 너무 높은 기대를 하고, 상대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상대가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고 확대해석하기. 그 다음은 일종의 관계 중독에 빠져서 모든 이들에게서 인정과 용납을 받으려고 하기.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대해 주님과 함께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구원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각자 어렸을 때부터 형성한 육신의 패턴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깨기 위해, 거부당한 경험의 목록을 작성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자신이 어느 유형의 심리적 방어로 과거의 거부당한 경험을 버티고 있는 것인지 아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것은 거부당한 경험 외에 수치심도 중요한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수치심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인간 사회의 시초부터 들어온 것으로써,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가 아닌, 각자 자신의 판단으로 서로와 세상을 보게 되었다. 수치심이 물론 순기능을 할 때도 있지만, 그 역기능들이 정체성을 왜곡하여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정체성으로 사는 것을 방해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욕구 자체가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데서 일어나는 건강한 욕구의 차단,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를 증오하거나 혐오하여 생기는 자신과의 분리가 그것이다. 한국 문화 자체가 수치심과 가까워서, 체면과 타인의 시선에 높은 무게를 두는 것도 이에 한몫 한다. 이것이 다시 앞서의 거부당하는 경험과 상호 작용하면서 상승 작용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성경적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수치심이 순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며, 수치심을 느껴야 할 분야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업적과 타인의 평가” 즉 세상에서 누군가를 규정하는 지표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즉 공부를 못하거나, 돈이 없거나, 인물이 빠진 것 자체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이는 많은데, 공공질서를 어기고 누군가의 인격을 함부로 모독하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이는 적다.

 

이는 올바르게 주님이 주신 수치심을 활용하는 예가 아니다. 단, 저자가 말하는 것은 공공질서를 준수 자체가 아니다. 즉 사람의 평가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끼는데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방향의 잘못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오해의 여지가 발생할 여지는 있지만, 저자가 다른 부분에서 언급하는 예를 참조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소위 말하는 교회 활동과 봉사를 하면서도 심적인 갈등과 교회 내부적 갈등을 빚는 이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을 하는 목적이, 진실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기쁨을 느끼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으면 닥칠 하나님의 노여움(즉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동료 교인들의 평가와 인망이 목적이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주님이 이것을 어떻게 보시는 지에 대해, 216개로 모세의 율법을 세분화하여 지키면서 스스로 높은 자세를 취한 바리새인들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잊지 않고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거부당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나오는 근원에 대해서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절대 해결책 그 자체를 제시하지 않는다. 해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해결을 받아들이는 지 말 지는 책을 읽는 개개의 독자에게 달린 문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해결을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방법을 빠뜨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바로 “마음의 치유”기 때문이다.

 

이제 해결책으로 나아가는 방법들이 나온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이것 자체가 해결책이라고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이 책은 이 지점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앞서 말했듯,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의 아픔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정체성의 왜곡이 그 이유다. 그렇다면 정체성 왜곡은 어떻게 바로잡아가야 하는가? 내가 왜 그런 왜곡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까지는 세상에 있는 다른 심리학 서적들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다. 이 다음이 중요하다. 이 다음부터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나 의무기 때문이다.

 

이제 환부를 이루는 피부와 가죽을 도려낸 후 그 환부에 대한 근본적 조치가 필요한 순간.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신앙의 성숙, 영적의 성숙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신앙의 성숙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과정에서는 어떤 과정이 일어나는가?

 

저자는 항상 개념부터 먼저 정의하고 들어가듯, 여기에 대해서도 뻔한 듯 하지만, 기본적 개념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앞서의 서두와 같은 패턴으로써, 기대가 많은 독자들이라면 뻔한 얘기부터 먼저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끈기를 잃지 않고 계속 읽어나가는 것을 강하게 권장한다. 일단 다시 얘기를 돌려 저자가 명확하게 확인해주는 “신앙의 성숙”이란 개념으로 들어가자.

 

신앙의 성숙은 영적 성숙의 단계적 상승을 말하며, 이것은 꼭 시간과 성숙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육의 성숙과 다르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어린아이, 청년, 아비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죄사함 받는 초신자의 상태요, 청년은 세상의 사악함을 이기고 성숙해가는 단계, 그리고 아비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성숙한 정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신앙의 성숙과 마음의 치유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깊은 신앙 체험을 한 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의 풀지못한 숙제가 있음을 우리는 여러 간증을 통해 자주 보아왔지 않은가?

저자는 말한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논해졌던 “신앙의 성숙”의 척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 봉사, 예배 참석 그리고 개인적 경건 훈련이 그 지표인데, 그러나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자칫하면 “세상적 기준” 및 “율법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을 뿐더러, 결코 전 인격적인 부분을 잴 수 있는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일단 이 부분을 분명히 해둔 후, 각 신앙의 성숙 단계에서 미숙한 심리적 성숙이나 상처로 인해 신앙 성숙이 좌절될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서 새롭게 피조되어 “신앙의 어린아이”가 된 단계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죄의식, 수치심,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이 장애물로 등장한다. 율법주의도 물론 그중 하나다. 이 단계는 성령 거듭남, 즉 성령 세례를 통해야 근본적으로 넘을 수 있으며, 저자는 성령 거듭남이란 부분에서는 각 사람이 이르는 과정이 다르다고 언급하며 일단 생략한다. 이 책의 주제가 “성령 거듭남”자체가 아닌 “거듭난 그리스도인로써의 제 권리 누리기”도 하기에, 이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단계. 거듭난 이후 “청년의 단계”가 되면, 또 다른 장애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영적인 곤비가 따른다. 자신이 일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며, 주변인들은 자신의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않고, 때문에 실망한 나머지 주변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빈도가 잦아지는 것이다. 이후에는 점점 공동체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게 되고, 그 과대평가에 알맞은 대우를 기대하다보면 다시금 주변의 평가와 자신의 업적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 단계 또한 앞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기지만, 근본적인 치유가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상태에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내면을 열어보이고 자아를 새롭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동기와 목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

 

그 다음으로 나오는 내용들은 이런 것들을 행하는 방법, 다름아닌 기도다. 그리고 주목해 볼 점은, 저자는 어떻게 보면 불친절해보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해결책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도를 하는 여러 방식과 자세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방식에까지, 해설과 그 효과에 대한 말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저자는 여기까지 설명하면서, 정체성을 회복하면 이뤄질 여러 놀라운 일들을 열거한 후 거기서 그냥 끝내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다음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 이제 2계명에 들어갈 차례가 된 것이다.

 

그는 인간이 외부의 자극에 대해 대응하는 방법에 세 유형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돌린다.

 

일종의 맞춤형 진료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자기중심형, 의존형, 회피형으로 나뉜다고 한다. 자기중심형은 외부의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공격하고 외부를 지배해서 이를 극복하는 유형이고, 의존형은 외부의 공격에 순응해서 친밀감과 소속감을 극대, 외부와 일체가 되어 이를 극복하는 유형이다. 한편 회피형은 자신이 공격하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고립되어 버리는 유형이다. 이들은 자기중심형과는 달리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도 없으며 그러고 싶어하지도 않지만, 친밀감과 소속감 따위도 바라지 않는다.

세 유형 모두 단점이 있다.

 

자기중심형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거나, 그게 여의치 않더라도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자신이 이룬 업적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기가 쉽지 않다.

 

반면 의존형은 남들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기에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며, 자신의 기대치를 만족하지 못하는-대체로 너무 높은 기대치라 주변인들은 만족이 불가능한 경우가 잦다-이들에 대한 증오, 원망, 노여움으로 스스로와 주변인들을 학대할 위험이 있다.

한편 회피형은 격리, 고립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며, 여기서는 하나님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때문에 회피형은 자신의 문제마저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누구도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기 싫어한다.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물론이요, 하나님과의 소통에도 크나큰 장애를 안게 된다.

 

저자는 이 세 유형이 주님 안의 신앙적 성숙과 결부되어 승화되면, 자기중심형은 강력하고 진취적인 지도자, 의존형은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보조자, 회피형은 사색과 문제 분석 및 해결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세 유형에 대한 얘기 바로 앞에서 다 끝나며, 세 유형은 일종의 부록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사람이 모두 똑같지는 않으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요인도 결과는 비슷할 지언정 어쨌든 다양하고 다르기 때문에, 이 부분도 독자의 상당한 흥미를 유발할 것이다.

 

처음부터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대강 책을 훑어본 독자들이 이 책의 진가를 더욱 깊숙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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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15권)

 

  가장 읽기 쉽고, 작가 자체가 전쟁사나 건축사 그리고 이야기식 서술에 관심을 들인 누구나 다 알만한 베스트셀러입니

다.

 

  하지만 작가가 극심한 일신교까에 원수정 로마빠인 까닭에 정체불명의 "로마혼" "로마다움"을 강조하는 데 이것이 퀄리티에 계속 상당한 악영향을 주면서 잘못된 시각들을 전파합니다.

 

  그나마 예전부터 연구가 활발했던 로마 전기에서는 이 문제점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기독교화되고  원수정 아래에서의 문제점이 폭발하는 전제정 시기 에서는,

아예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이것이 14권 이하로 내려가면,  관점이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틀린 사실을 써버리거나, 전체 역사상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버릴 정도로 자기가 곤란한 FACT는 멋대로 쳐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쉽게 말해서, 서로마 제국의 흥망성쇠와 각 권의 질이 정확히 일치하는 신기(神技)를 보입니다.  

   

   때문에 1권은 솔직히 영 그렇고, 2권...3권...4권 가면서

  9~10권에 이르면 드디어 최고조를 보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0권은 극심한 시오노 나나미 안티 학자들도 인정하는 최고의

역작입니다만....로마가 슬슬 쇠퇴기가 되어가는 11권부터는 점차 그림자가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12권에서는 3세기의 혼란과 함께 글에도 혼란이 옵니다만, 13권부터는 급전직하로 퀄리티가 강하하기 시작하더니, 14권에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쇠락합니다.  해서 드디어 15권부터는 로마의 멸망과 함께 그녀의 퀄리티도 함께 멸망하죠.

 

   사람들이 로마 제국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가 로마 제국 이천 년 사에서 이십분의 일이 될까말까하는 원수정 로마 병사에 대한 이미지가 전체 로마인 줄 알고, 공화정 로마와 원수정 로마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른다는 건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이런 편견을 완화하기는 커녕 더욱 부채질합니다.

 

   로마인 이야기 7~12권까진 돈 주고 소장할 가치가 있으나,

1~6, 13~15권은 그냥 빌려다 읽는 걸 추천합니다.

 

   다만....다시 반복하자면 어느 분이 인터넷에서 한 얘기를 거진 그대로 옮깁니다만 그래도 로마인 이야기는 역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일신교와 비잔틴에 대해 하는 얘기들만 스킵해버리면 되므로 비판적인 읽기가 생각 외로 쉽습니다.  의외로 가장 강력한 강점입니다.

 

 

  안소니 에버릿의 키케로, 아우구스투스

 

   

흥미롭고 재미있게 잘 써졌으며, 시오노 나나미 선생께서 다소 치우치게 쓴 부분들이

 

어느 면에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 딱딱할 줄 앍고 처음에는 지레 겁먹었지만,

 

번역자 분이 번역을 잘 해주셔서 물 흐르듯 별 어려움 없이 잘 읽혔습니다.

   

 

 

 

  비잔티움 연대기 1~3권

 

 

    로마인 이야기가 유스티니아누스에서 끝나는 걸 아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들 보시는 책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에서 시작해서 그 도시의 함락에서 끝나는 시기까지

다루는 책인데요.

 

  대체로 쉽게 읽을 수 있게 비전문가가 여러 책과 자료를 참조해서 이야기처럼 쓴, 말하자면

로마인 이야기류의 동로마판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는데요.

 

   누가봐도 대단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재미나게 써졌고, 저자 자신이 시오노 나나미같은 역사 아마추어기에 로마인 이야기에서 느꼈던 재미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장점이자 단점으로, 어느 한 편에 치우친 관점은 없지만 바로 그게 원인이어서인지

퀄리티가 1권이나 2권이나 3권이나 똑같습니다. 한결 같다고도 볼 수 있지만, 간혹 2%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

 

  첫째. 주로 동로마사가 포커스라 그런건진 몰라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건설된지 거의 한 세기 반 넘게 존속한 서로마 지역 역사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실한 편입니다. 누구처럼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한 건 아니지만 좀 생략하는 부분이 많아집니다.

 

  둘째. 번역자가 일껏 번역 잘해놓고 이상한 후기들을 남겼는데, 원작자가 하지도 않았고

    또 의도도 아니었던 얘기들을 멋대로 합니다.

 

     내용들이 거진 건질 게 없으므로 번역자 후기는 걍 넘어가시길 강추합니다.

 

  셋째. 사실 비잔티움사 자체가 국내에 제대로 나온 교양 서적이 드물긴 합니다만....그래도 굳이 지적한다면, 비잔티움 제국이 6~7세기의 아랍 제국의 맹진에서 군사적, 경제적인 위기를 경험했으나

그 경험들을 토대로, 아랍 제국에서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면서 문화적, 군사적, 정치적인 꾸준한 성장을 하면서 이것이 8~10세기의 융성으로 이어진 것이 최근(그래봐야 학계에선 90년대쯤 결론이 난 것 같지만 -_-;;) 연구 성과인데 이 부분이 제대로 다뤄져 있지 않습니다.

 

       대강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왜" "어째서"   가 궁금하신 분들은 

     다른 책들을 참조하는 게 필요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그 유명한 기번의 역작입니다. 다만, 축약본으로 나온 것들은 보지 말고 어지간하면 완역된 판본들을 읽기를 추천합니다. 축약본들에서는 기번 선생의 근성이나 분석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읽기가 쉬운가 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일단 시오노 나나미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빠뜨린 부분에 대한 많은 부분 참고가 가능하며, 당대 야만족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로마 제국이 상대했던 적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모를 때는 시오노 나나미 선생의 후기 로마 제국에 대한 편견이 기번 탓에 나온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막상 제대로 정독을 두 번 가까이 해본 결과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기번의 무서운 강점. 기번은 자기가 맘에 안드는 내용도 모두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이건 이러이러해서 믿을 건 못되지만 참고 사항이 되니까 어쩌구 저쩌구..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죄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맞게 생각할 여지도 좀 있고 이래서 저래서 있기는 있다......니들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해라.."

 

 대강 이런 식인 것 같습니다. 누구처럼 아예 딱 단정지어서 요건 요래서 아니다하는 식으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18세기에 나온 저작이고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에서도 후반 들어와서야 제대로 된 조명이 이뤄지는 탓에, 기번이 로마 제국 쇠퇴 원인을 주로 정신 면에서 탓을 하는 부분은 깎아서 봐야 하며, 그가 말하는 후기 로마 제국의 추태는 상당 부분 과장된 면이 많습니다.

 

  때문에 대강 기독교화되는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로 접어드는 3, 4권은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으며, 비잔티움 제국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5권부터는 더욱 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근데.....솔직히 로마인 이야기보다는 잘 읽히지가 않습니다. ;;

 

    제가   이거 완역본 출간한 민음사에서  뭐 하나 받은 건 없지만, 왠만하면 이건 구매해서

 집에 놓고 두고두고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인지 한 번 훑어볼 땐 솔직히

뭐가뭔지 잘 몰랐고,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서 기본 지식이 없었다면 아예 읽지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돈이 아까운 분들은, 이거 전질이 있다면 앞서의 비잔티움 연대기 1, 2, 3권 중  1권 즉 샤를 마뉴가

 대관하는 시기에서 끝나는 분량의 책은 안 사도 될 것 같습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3~5권에 거기 있는 왠만한 내용은 다 있습니다.

 물론 비잔티움 연대기가 더 쉽게 읽히긴 합니다만.....

 

 

  다음부터는 로마인 이야기보다는 약간 읽기 어려운 책들입니다. 

 

 

사생활의 역사 1권 - 조르주 뒤비 저  

 

 

  시오노 나나미가 그토록 찬양하는 공화정 로마, 왕정 로마의 구린 뒷모습이 드러납니다.

물론 조르주 뒤비가 그녀같이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나열한 것은 아니지만....

 

 시오노 씨가 보여준 왕정-공화정사는 사실이되 거의 빛에 해당하는 모습만이었다면, 이 책은

서로마 제국 붕괴기까지 거기서 다루지 않은 그림자 부분을 잘 뒤벼주는 것 같습니다.

 

 또한 놀랍게도 동로마 제국 초기부터 바실리우스 때까지의 생활사 부분에 대해서도 잘 다뤄주고 있고요.  이야기식 서술에만 치중하는  유명한 존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나 오스트로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가 빠뜨리고 있는 부분을 잘 보충해 주는 것 같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사 - 게오르그 오스트로고르스키 -디오클레티아누스때부터 동로마 멸망까지

 

 

 유고슬라비아의 노학자인 게오로그 오스트로고르스키의 역작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동로마 제국 멸망때까지를 다룹니다.


 정치 - 경제 - 사회적 변화에 대한 상세한 해석과 흐름을 짚어줍니다.

 

 상당한 격조와 정통 역사 서술의 맛을  느끼게 해줍니다만....문제는 바로 이거.

 쉽게 말해, 정말이지 지루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_-

 

  그리고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로는 인명을 다 코이네, 즉 고대 그리스어로 통일했는데

사실 중세 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의 인물들이 쓰던 인명이나 언어는 코이네가 아니라

중세 그리스어였습니다.

 

   비잔티움사 연구에서 그 표기를 코이네로 하던 경향이 강했습니다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데

그 책이 좀 예전에 번역되어서 그런지 이 경향대로 따라가고 있는 건 약간의 옥의 티입니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   -  워랜 트레드골드 저

 

 

   국내 번역된 책들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고, 오스트로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보다는 읽기가 쉽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사나 비잔티움 연대기와는 달리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분 통치때부터를 비잔티움 제국의 시초로 보고 있으며,  주로 제도나 경제, 정치 같은 면에 주력하면서 유물론 적으로 분석하면서도

그럭저럭 매끄럽게 잘 읽힙니다.

 

  왜 로마 제국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거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슬람 제국의 맹공에서 살아남으면서 제2 융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신 분들께는 강추입니다.

 

  그리고, 워랜 교수가 서문에서 대놓고 비잔티움 연대기는 기번의 통속적 내용들을 반복했으며

오스트로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는 옛날 연구라 요즘 연구 성과가 안 들어갔다고 까는 건 약간의 재미이자 충공깽. ;;;;  앞서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빠져 있던 부분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번역 퀄리티가 낮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까이고 있는데, 적어도 제가 보기엔 오역 탓에 내용 파악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좀 눈에 띄는 오류로는, 워랜 선생이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된 인명이나 지명을 다 영역해서 써버리셨는데 그리스어->영어로 된 부분은 번역자가 잘 몰라서인지 고유 명사인 걸 모르고 막 한역해버린 부분이 있습니다만 역시 이것도 그렇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를 방어하는 타그마 부대들 중 테이씨스타이와 비글라라는 부대가 있었고, 기병 부대들 중에는 아다나토이란 부대가 있었는데 이거 영역하면 Walls, Watch, Immortal 등이 됩니다만  이것들 사실 엄연히 고유 명사인 부대 명칭입니다.

 

 근데 이걸 번역자 분은 월스, 경비 부대, 이모탈로 번역을 하셨더군요. 그건 아닌데...;;

 

  바랑기안 가드로 나오는 부대는 원 명칭이 타그마 톤 바랑곤 혹은 바랑고이가 맞는데 이 부분도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설프게 코이네를 고집한 번역의 관철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역자 분들이 간혹, 기껏 번역 잘해놓고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괴이한 후기를 남겨놓는 관행이 있는데 이 분은 적어도 그렇진 않았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가람기획에서 나온 이 책은, 아쉽게도 요즘 절판.....;;

도서관에서나마 빌려보도록 추천합니다.

 

  하지만 이 책도 중세 로마 제국이 겪은 11세기의 혼란에 대해서는 다소 약간 예전 학설의 경향을 따 라가고 있으며,  문화사 부분이 약간 약한 건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이켈하임의 로마사

 

  

 추천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저는 이 책을 대강 한 서너 번 제가 궁금한 부분만 훑어본 게 전부라서 감히 이러쿵저러쿵 평을 하긴 사실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강 본 느낌으로 봐선 아주 좋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가장 무난한 책"이란 게 될 것 같다....그 정도 생각.

  

 

 

위 책들을 읽으면서 절대로 피해야 할 순서

 

 로마인 이야기   -> 로마 제국 쇠망사

 

  ......

 

 어떻게 읽어도 좋지만, 어지간하면 이 테크는 피하길 추천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기초 지식이 없는 분들 입장에선 비판적으로 읽는 게 도저히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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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1-26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부터 동로마제국 관련하여 이런저런 책들을 보고 있는데요
이 페이퍼를 보니 잘 정리해 놓으셔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진작 볼 것을...ㅎㅎ

마법의활 2015-01-27 14:25   좋아요 0 | URL
로마 제국 쇠망사가 있다면, 비잔티움 연대기 1권은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겹치는 내용이 많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6 로마제국 쇠망사 6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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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에 대한 왜곡을 걱정했지만 6권이 오히려 그런 문제가 적습니다. 이유인즉슨 동로마 제국에 대한 비중은 5권이 더 커서지만...다만 리뷰들은 여전히 엉터리.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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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5 로마제국 쇠망사 5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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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국 쇠망사는 로마사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분명 무난한 기본서지만,

동로마 제국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평적인 이해는 20세기 중반을 넘어선 시기에서야 시작되었음을

생각해볼 때, 18세기를 살았던 기번에게는 동로마 제국사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게

무리였음을 반드시 더 생각해봐야만 한다.

  부족한 자료를 토대로도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하는 기번의 능력은 5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구시대인들의 한계는 여전함 또한 매우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최근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대한 리뷰들은 이 점을 간과한 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경향들이 강하여,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그런 리뷰들의 대표적인

오류와 오독 그리고 아예 틀린 사실들을 나름대로 정리하도록 한다.

1. 걸핏하면 말하는 게 옛 로마 제국이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건데, 그들이 말하는 껍데기란 그저 로마 제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1~2세기의 원수정 로마에 불과하다.

 모든 기준을 원수정 로마에 맞추고 거기서 달라지면 그것 자체가 악이라는 괴이한 견해는 기번조차도 주장하지 않던 건데 도데체 책을 제대로 읽기는 했는지 궁금해진다.

 겨우 백 년도 안되는 시기의 모습을 가지고 반천 년의 역사를 함부로 재단하는 이런 용감한 행태는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비뚤어지게 적용되는데,  <사방을 둘러싼 이민족의 침략과 내부의 정치적 분열로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역이나 겨우 유지하는 찌질한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아무래도 로마 제국 쇠망사에 텍스트만 있고 지도가 없어서였는지 이런 용감한 견해가 등장하는 것 같다.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으로 영토가 축소된 건 1300년대 후반에서 망하기 직전까지 백 년 동안인데, 그 세월이면 소위 동로마 제국 역사로 분류되는 330년부터 보면 십분의 일도 안 되고, 이슬람 제국 맹진기인 7세기 이후로 봐도 반의 반의 세월에도 못 미친다.

 로마 제국 쇠망사 5권만 제대로 읽었어도, 동로마 제국이 상당 부분 동안 오늘날의 터키와 그리스, 불가리아 등의 판도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영토를 유지했음은 알텐데. 책을 제대로 읽고 리뷰를 남겨야지 이렇게 대강 잘 알지도 못하고 마구 리뷰를 쓰는 건 기번한테 큰 실례다.

2.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이래로도 끈덕지게 부단한 체제 개혁과 군제 개편, 쇄신을 통해 강대국의 위치를 12세기까지 유지했다. 대제가 사망한 후 거의 육백 년에 육박하는 시기인데, 육백 년 동안 강대국을 유지한 정체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

  그리고 동로마제국에서는 <이렇게 황가(皇家)를 이룬 사례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대놓고 틀린 소리를 뻔뻔히 하는데  오히려 안정된 황위 계승은 로마 제국 전성기 때에도 드문 일이었다. 동로마 제국 역사 천 년기에서 안정적인 왕조들인 헤라클리우스, 이사브리아, 마케도니아 등의 왕조들은 백오십 년 혹 이백 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이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딱 맞는 형국? 외혀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는 가장 약체일 동안에도 최장수를 자랑했다. 왕조의 안정성에 대한 몰이해도 문제지만 그 자체가 국가 체제를 담보한다는 이상한 견해를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3. 크리스트교가 허약해진 제국 곳곳에서 망조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는 건 기번도 하지 않은 거짓말이다.  삼위일체 논쟁과 성육신 논쟁에 이어서 또 다른 신학논쟁과 파벌싸움? 그건 제국이 여전히 초강대국이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부터 반복되던 것이고, 다 꺼져버린 학문의 불꽃이 살 수 있었던 건 크리스트교의 비호 덕분이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학술와 논리학이 발달에 불을 당긴 건 교리 논쟁이었다.

4. 각자의 주장에 외곬으로 빠진 광신(狂信)은 국가의 안위에마저 큰 해악을 끼쳤다? 그런데 그렇게 광신으로 빠진 국가가 어떻게 강대국 지위를 육백 년 넘게 유지할 수 있을까? 참으로 미스테리다.  바울파와 야고보파라는 근본주의적 종파가 사라센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도시의 안위를 팔아넘긴 걸 예로 드는데, 제국이 그로 인해 입은 타격은 불과 십 년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슬람교 쪽에서도 쿠람마이트들과 마론다이트파들은 "기독교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도시의 안위를 팔아넘겼는데, 왜 이건 쏙 빼놓고 말하는 걸까? 기번은 양쪽 사례 모두 공평하게 다루었는데 왜 이렇게 엉터리로만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위기에 처할 때 서방 기독교 세계는 그렇게 수수방관하지 않고 꽤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베네치아인들이 손해를 감수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사수하려 한 것, 교황이 적극적으로 제국을 도우려 했던 것, 분명히 로마 제국 쇠망사 5, 6권에 나온다.  

 기번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도 문제지만, 편향적인 내용 해석에 자기 편견만 적극적으로 끼워넣는 이런 건 정말이지 폐혜가 크다.  

5.  [로마제국 쇠망사 5]권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내용은 이렇듯 아주 위험성이 크다. 그나마 기번이 쓴 내용만 제대로 읽어도 위험이 큰데, 이 지경으로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서 잘못 이해하거나 편향적인 부분만 기억하는 건 아주 큰 문제가 있다.

  황족을 비롯한 신하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 무능함은 있지도 않았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앙겔루스조와 두카스조의 몇몇 황제들을 제외하면 정말 성실하게 제국을 통치하려 노력하였다. 신하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 무능함?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 무능함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으며 그건 로마 제국 최전성기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런 타락과 부패, 무능이 고쳐지는지 혹은 자정되는지 여부인데 이건 역으로 크리스트교 성직자들의 감시와 감찰에 의해 가능했다.  "점차 변질되기 시작하는 크리스트교의 세속적 권력 추구와 무관용성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  오히려 여기서 읽히는 건, 현대 한국의 어떤 독자가 가지고 있는 지독히 불건전한, 특정 종교에 대한 편견이다.

 광신도가 싫다고 광신적으로 배격하면 같은 광신도가 될 수 밖에는 없다. 제발 역사책은 맨 정신으로, 특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읽도록 하자.

 로마 제국 쇠망사 5권은 때문에 반드시 필독서임을 여기서 재확인한다. 제대로 읽지도 않고 함부로 기번이 한 얘기인양 도처에서 떠들어대는 불량 리뷰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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