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치유 -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
김준수 지음 / 디모데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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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치유」는 분명 구원을 받은 후에도 늘 다른 사람의 평가와 판단 그리고 스스로에게 인정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상한가? 그렇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고 무슨 판단을 했으며 무슨 분석을 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일까? 저자 김준수에 대해 먼저 알아보면, 그는 각종 유수 대학에서 성경 상담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목회 상담학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남서울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상담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경력만 보면 그가 그럴 수 없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많은 상담학 혹은 심리학을 연구하는 다른 많은 저자들처럼, 독자들에게 “이것이 당신 안을 치유하는 핵심 방법이다.” “이것만 풀면 모든 문제의 근원이 해결된다.”에 관련한 어떤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왜 “마음의 치유”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 지, 이 서평을 읽는 독자는 의구심부터 품을 것이다. 미리 결론을 내자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 책을 통해, 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

 

저자 김준수는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언행을 고치거나, 스스로 어떤 종류의 마인드 컨트롤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의 궁극적인 의도는, 바로 하나님께서 독자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독자를 준비시키는 데 있다. 이것이 다른 심리학적 치유류의 서적과 이 책의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주님께 치유 받을 준비가 되려면 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되는 지에 대해 말한다. 때문에, 그는 서두부터 교회를 좀 다녀본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구원론을 설파한다. 얼핏 보기에 뻔한 내용이지만, 바로 이 뻔한 내용에 진리가 숨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마음의 쉼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정작 그런 약속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약속해주신 풍성한 삶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늘 감사와 찬양을 말하지만 마음은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눌리고 불안하며 평안이 없는 삶을 산다. 말하자면, 주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어쩌면 그저 생각 없이 양심을 마비시키는 이들보다도 더 피곤한 삶을 사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들을 주님께서 심판하신 결과일까? 그렇지 않다.

 

저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너 자신을 알라.”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그리스도인들의 “너 자신은”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신”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그 다음에 바로 밝히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너 자신”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타인의 규정-혹은 평가-과 자신의 업적으로 구성되는 양파 같은 존재다. 태어났을 때부터의 그는 철저한 백지며, 존재 그 자체로는 의미를 얻지 못하는 존재다. 때문에 우선 먼저 그에게 붙는 것은 그에 대한 타인들의 규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정 중 다른 어떤 것을 얻어내는 데 필요한 것은 그의 업적이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좋은 대학을 나오고, 한 해 연봉이 얼마나 되며, 얼굴은 어느 정도로 인물인가. 그는 어느 직장에서 무슨 소속에 있으며, 이름 외에 불리는 직함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또한 그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며 사람들은 평소 그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가......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너 자신”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네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어느 누구를 그의 사회적 지위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그런 사회적 지위나 사람의 편의 자체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시거나, 아무 관심도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는 왜 우리를 사랑하는가?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그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는 존재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아 존재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때문에 정말로 “자신”이 누군 지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태여 자신의 모습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바꿀 필요가 없다.

 

그가 누군 지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를 향해 말씀하시는 선언,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규정에 뭔가를 더하거나 붙이거나, 혹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뭔가 자기 업적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십자가 보혈의 업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규정과 그리스도의 업적으로 완성되는 존재다.

 

그러나 이 정도는 영적인 피로감, 마음의 갈급함을 해소하는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정도는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축복을 진정 기꺼이 누리지 못하는가? 일단 전제부터 확고한 세워놓은 저자는, 여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위해 우선 먼저 그것을 막는 문제점들부터 분석해 들어간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하나님의 규정과 그리스도의 업적으로 완성되는 존재인데,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뭔가가 결국 타인의 규정-혹은 평가-과 자신의 업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로 원점 회귀시킨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것을 되새기려고 해봐도 어딘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비로 왜곡된 정체성에서 온다. 정체성의 왜곡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가정이다.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훈육과 양육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거절과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며, 그것은 비현실적 기대, 비교, 편애, 언어적 비하 혹은 부모들 개인의 사회적 사정으로 인한 방치 혹은 실질적 유아기-청소년기의 상실 등을 통해 나타난다.

 

때문에 이에 대한 심리적 방어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 네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게 된다. 친밀감을 힘들어 하면서 주변인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 강박감을 가지기. 다시는 거부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비난과 빈정을 통해 주변인들을 밀어내기. 상대에게 너무 높은 기대를 하고, 상대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상대가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고 확대해석하기. 그 다음은 일종의 관계 중독에 빠져서 모든 이들에게서 인정과 용납을 받으려고 하기.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대해 주님과 함께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구원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각자 어렸을 때부터 형성한 육신의 패턴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깨기 위해, 거부당한 경험의 목록을 작성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자신이 어느 유형의 심리적 방어로 과거의 거부당한 경험을 버티고 있는 것인지 아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것은 거부당한 경험 외에 수치심도 중요한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수치심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인간 사회의 시초부터 들어온 것으로써,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가 아닌, 각자 자신의 판단으로 서로와 세상을 보게 되었다. 수치심이 물론 순기능을 할 때도 있지만, 그 역기능들이 정체성을 왜곡하여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정체성으로 사는 것을 방해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욕구 자체가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데서 일어나는 건강한 욕구의 차단,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를 증오하거나 혐오하여 생기는 자신과의 분리가 그것이다. 한국 문화 자체가 수치심과 가까워서, 체면과 타인의 시선에 높은 무게를 두는 것도 이에 한몫 한다. 이것이 다시 앞서의 거부당하는 경험과 상호 작용하면서 상승 작용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성경적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수치심이 순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며, 수치심을 느껴야 할 분야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업적과 타인의 평가” 즉 세상에서 누군가를 규정하는 지표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즉 공부를 못하거나, 돈이 없거나, 인물이 빠진 것 자체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이는 많은데, 공공질서를 어기고 누군가의 인격을 함부로 모독하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이는 적다.

 

이는 올바르게 주님이 주신 수치심을 활용하는 예가 아니다. 단, 저자가 말하는 것은 공공질서를 준수 자체가 아니다. 즉 사람의 평가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끼는데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방향의 잘못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오해의 여지가 발생할 여지는 있지만, 저자가 다른 부분에서 언급하는 예를 참조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소위 말하는 교회 활동과 봉사를 하면서도 심적인 갈등과 교회 내부적 갈등을 빚는 이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을 하는 목적이, 진실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기쁨을 느끼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으면 닥칠 하나님의 노여움(즉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동료 교인들의 평가와 인망이 목적이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주님이 이것을 어떻게 보시는 지에 대해, 216개로 모세의 율법을 세분화하여 지키면서 스스로 높은 자세를 취한 바리새인들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잊지 않고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거부당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나오는 근원에 대해서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절대 해결책 그 자체를 제시하지 않는다. 해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해결을 받아들이는 지 말 지는 책을 읽는 개개의 독자에게 달린 문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해결을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방법을 빠뜨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바로 “마음의 치유”기 때문이다.

 

이제 해결책으로 나아가는 방법들이 나온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이것 자체가 해결책이라고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이 책은 이 지점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앞서 말했듯,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의 아픔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정체성의 왜곡이 그 이유다. 그렇다면 정체성 왜곡은 어떻게 바로잡아가야 하는가? 내가 왜 그런 왜곡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까지는 세상에 있는 다른 심리학 서적들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이다. 이 다음이 중요하다. 이 다음부터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나 의무기 때문이다.

 

이제 환부를 이루는 피부와 가죽을 도려낸 후 그 환부에 대한 근본적 조치가 필요한 순간.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신앙의 성숙, 영적의 성숙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신앙의 성숙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과정에서는 어떤 과정이 일어나는가?

 

저자는 항상 개념부터 먼저 정의하고 들어가듯, 여기에 대해서도 뻔한 듯 하지만, 기본적 개념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앞서의 서두와 같은 패턴으로써, 기대가 많은 독자들이라면 뻔한 얘기부터 먼저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끈기를 잃지 않고 계속 읽어나가는 것을 강하게 권장한다. 일단 다시 얘기를 돌려 저자가 명확하게 확인해주는 “신앙의 성숙”이란 개념으로 들어가자.

 

신앙의 성숙은 영적 성숙의 단계적 상승을 말하며, 이것은 꼭 시간과 성숙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육의 성숙과 다르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어린아이, 청년, 아비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죄사함 받는 초신자의 상태요, 청년은 세상의 사악함을 이기고 성숙해가는 단계, 그리고 아비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성숙한 정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신앙의 성숙과 마음의 치유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깊은 신앙 체험을 한 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의 풀지못한 숙제가 있음을 우리는 여러 간증을 통해 자주 보아왔지 않은가?

저자는 말한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논해졌던 “신앙의 성숙”의 척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 봉사, 예배 참석 그리고 개인적 경건 훈련이 그 지표인데, 그러나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자칫하면 “세상적 기준” 및 “율법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을 뿐더러, 결코 전 인격적인 부분을 잴 수 있는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일단 이 부분을 분명히 해둔 후, 각 신앙의 성숙 단계에서 미숙한 심리적 성숙이나 상처로 인해 신앙 성숙이 좌절될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서 새롭게 피조되어 “신앙의 어린아이”가 된 단계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죄의식, 수치심,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이 장애물로 등장한다. 율법주의도 물론 그중 하나다. 이 단계는 성령 거듭남, 즉 성령 세례를 통해야 근본적으로 넘을 수 있으며, 저자는 성령 거듭남이란 부분에서는 각 사람이 이르는 과정이 다르다고 언급하며 일단 생략한다. 이 책의 주제가 “성령 거듭남”자체가 아닌 “거듭난 그리스도인로써의 제 권리 누리기”도 하기에, 이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단계. 거듭난 이후 “청년의 단계”가 되면, 또 다른 장애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영적인 곤비가 따른다. 자신이 일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며, 주변인들은 자신의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않고, 때문에 실망한 나머지 주변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빈도가 잦아지는 것이다. 이후에는 점점 공동체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게 되고, 그 과대평가에 알맞은 대우를 기대하다보면 다시금 주변의 평가와 자신의 업적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 단계 또한 앞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기지만, 근본적인 치유가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상태에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내면을 열어보이고 자아를 새롭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동기와 목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

 

그 다음으로 나오는 내용들은 이런 것들을 행하는 방법, 다름아닌 기도다. 그리고 주목해 볼 점은, 저자는 어떻게 보면 불친절해보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해결책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도를 하는 여러 방식과 자세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방식에까지, 해설과 그 효과에 대한 말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저자는 여기까지 설명하면서, 정체성을 회복하면 이뤄질 여러 놀라운 일들을 열거한 후 거기서 그냥 끝내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다음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 이제 2계명에 들어갈 차례가 된 것이다.

 

그는 인간이 외부의 자극에 대해 대응하는 방법에 세 유형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돌린다.

 

일종의 맞춤형 진료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자기중심형, 의존형, 회피형으로 나뉜다고 한다. 자기중심형은 외부의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공격하고 외부를 지배해서 이를 극복하는 유형이고, 의존형은 외부의 공격에 순응해서 친밀감과 소속감을 극대, 외부와 일체가 되어 이를 극복하는 유형이다. 한편 회피형은 자신이 공격하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고립되어 버리는 유형이다. 이들은 자기중심형과는 달리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도 없으며 그러고 싶어하지도 않지만, 친밀감과 소속감 따위도 바라지 않는다.

세 유형 모두 단점이 있다.

 

자기중심형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거나, 그게 여의치 않더라도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자신이 이룬 업적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기가 쉽지 않다.

 

반면 의존형은 남들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기에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자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며, 자신의 기대치를 만족하지 못하는-대체로 너무 높은 기대치라 주변인들은 만족이 불가능한 경우가 잦다-이들에 대한 증오, 원망, 노여움으로 스스로와 주변인들을 학대할 위험이 있다.

한편 회피형은 격리, 고립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며, 여기서는 하나님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때문에 회피형은 자신의 문제마저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누구도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기 싫어한다.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물론이요, 하나님과의 소통에도 크나큰 장애를 안게 된다.

 

저자는 이 세 유형이 주님 안의 신앙적 성숙과 결부되어 승화되면, 자기중심형은 강력하고 진취적인 지도자, 의존형은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보조자, 회피형은 사색과 문제 분석 및 해결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세 유형에 대한 얘기 바로 앞에서 다 끝나며, 세 유형은 일종의 부록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사람이 모두 똑같지는 않으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요인도 결과는 비슷할 지언정 어쨌든 다양하고 다르기 때문에, 이 부분도 독자의 상당한 흥미를 유발할 것이다.

 

처음부터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대강 책을 훑어본 독자들이 이 책의 진가를 더욱 깊숙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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