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리데와의 투닥거림.
옷을 주는 행위의 의미.
전쟁 중을 상기시키는 모든 것들.

엘프리데가 내 뒤에 와서 섰다. "여기는 여학교가 아니야, 베를린 토박이. 병영이라고."
"네 일에나 신경 쓰시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되레 내가 당황해서 뒷목이 따가웠다. "네가 가르쳐줬잖아, 안 그래?" 나는 도발이라기보다는 변명에 가까운 말투로 덧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왠지 엘프리데의 마음을 사고 싶었다. 그녀와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어찌됐든 애송이 말이 맞아. 특별히 독의 종류별 중독 증상에 관심 있는것이 아니라면 이런 책이 재미있을 리가 없지. 너는 죽을 준비를 하는 게 재미있나 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그날 저녁 나는 울라에게 줄 와인색 원피스를 빨았다. 내가 특별히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울라의 호감을 얻고 싶어서 그 옷을 주려는 게 아니었다. 그 옷을 입은 울라를 보면 내 삶이 베를린에서 그로스-파르치로 완전히 옮겨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베를린에서의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옷을 울라에게 주는 것은 일종의 포기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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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1차 세계대전 속에서의 유년시절의 언뜻 평화로우면서도 어린 아이 특유의 잔인함이 엿보이는 평범한 일상, 그리고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을 암시하는 듯.

내 유년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내 유년시절은 부덴가세 거리가 내다보이는 김 서린 창문이었다. 남들보다 빨리 외운 구구단 표였다. 처음에는 커서 헐렁거리다가 나중에는 작아서 꽉 끼게 된 신발을 신고 걷던 등굣길이었다. 손톱으로 참수시킨 개미들이었다. 아버지와어머니가 설교대에 올라 성경 구절을 읽던 일요일이었다. 그때 어머니는<시편>을, 아버지는 고린도전서>를 읽었고 나는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루해하며 부모님의 낭독에 귀를 기울였다. 내 유년시절은 입속에 감추어놓은 1페니히 동전이었다. 동전의 짭짜름하고 톡 쏘는 맛에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눈을 감고 혀로 동전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밀면 밀수록 동전은 당장이라도 목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갈 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나는 동전을 목 안으로 최대한 밀다가 갑자기 뱉어버렸다. 내 유년시절은 베개 아래 쌓아둔 책들이자 아버지와 함께 부르던 전래동요이자 광장에서 하던 술래잡기 놀이이자 크리스마스에 먹는 슈톨렌 케이크이자 동물원 소풍이었다. 남동생 프란츠의 요람에 얼굴을 들이밀고 그 애의 조그만 손을 이빨로 꽉 물었던 날도 내 유년시절의 일부였다. 그때 동생은 빽빽대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원래 갓난아이들은 잠에서 깨면 그렇게 울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한 짓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 유년시절은 비밀과 잘못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 비밀을 지키는 데만열중해서 다른 사람들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유 가격이 수백 마르크에서 나중에는 수백만 마르크까지 폭등하는 동안에도 나는 우리 부모님이대체 어디서 우유를 구해오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경찰 몰래 식료품 가게를 습격해서 먹을 것을 구해오는 건 아닌지 걱정해본 적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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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코니 윌리스 소설집
코니 윌리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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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좋아하는 책이라 연말에 선물용으로 구입. 절대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움과 더불어 현재의 사회에 적합한 메세지도 함께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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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 사르트르와 하이데거, 그리고 그들 옆 실존주의자들의 이야기
사라 베이크웰 지음, 조영 옮김 / 이론과실천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처음엔 두께에 압도될 수 있지만 읽다보면 금방 빠져듭니다. 처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아롱이 대화하는 장면부터 아주 흥미롭게 시작하고 각 인물들의 삶에 집중하기 때문에 재미있어요. 사라 베이크웰의 책이 더 나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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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랑 너무 비슷함

인종 간 혐오와 집단 망상은 이 시대 삶의 방식 일부나 다름없다. 사람들이 조금만 덜 무식했다면 이런 혐오와 망상의 영향이 지금보다 덜 했을지도 모른다. 독일 치하의 유태인들이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 전쟁 시작 전에더 잘 알았더라면, 최소한 우리가 유태인 난민을 대하는 방식은 지금보다더 인도적이었을 것이다. 유태인에 대한 대중의 반감 그 자체는 별 차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대규모의 유태인 난민을 거부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적어도 부끄러운 짓이라는 인식은 있지 않았을까.
각 개인이야 여전히 난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나마 더 많은 난민의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폴란드 난민 문제도 마찬가지다. 앞의 대화에서 내가 가장 가망 없다고느낀 부분은 두 사람이 자꾸 입에 올리던 ‘폴란드인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자‘는 말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돌아갈 나라 자체가 없어진 사람들‘이라고 내가 말했더라면 두 사람의 입이 딱 벌어지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현 상황과 관련한 팩트 따위는 하나도 들어 있지않다. 1939년 이후 폴란드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두 사람은 전혀들은 바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두 사람은 워낙 무지한 나머지 영국의 인구가 포화 상태라는 거짓 사실을 믿고 있다. 전체 노동인구는 부족하지만 지엽적으로 실업률이 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난민들에게 돌아가라‘며 쫓아낼 때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건지 정확히이해하도록 설명해 줄 수는 있다. 조금이라도 지식을 얻고 나면 사람들이조금은 덜 악랄하게 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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