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평점 :

시와 친하지는 않지만 가을이면 시집 한권 정도는 읽었었던 같다. 지난번 윤동주 시집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시인의 삶과 시가 태어난 배경을 알고 시를 대하면 좀더 와 닿는 부분이 많다. 그렇지 못하고 읽어내려갈 때면 사실 가장 짧지만 가장 어려운 문학의 장르가 <시>가 아닐까.
이 시집을 손에 잡아들었을 때도 시라는 문학도 어려운데 스페인어권 문학이라 하니 더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러나 “단테 이후 가장 위대한 우리 모두의 시인”이라는 타이틀과 "20세기 중남미 시단의 거장 세사르 바예호의 시선집, 20년 만의 재출간"이라는 소식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1988년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바예호 시선집의 개정증보판이다. 출판 당시 외환위기의 한국 실정에 어울리는 제목으로 그렇게 정했었다고 하는데 이번 개정증보판은 제목부터가 어둡다. 그런데 실상 시인의 어둡고 슬픈 시를 대표하기에는 이번 제목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이 더욱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같은 이야기>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고생한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나의 형이상학적 공기 속에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공기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불꽃으로 말했던
침묵이 갇힌 곳.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 중략 -
시가 지닌 함축적 의미를 다 알길 없지만 알수 없는 고통이 느껴진다. 자신이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는 표현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궁금해진다.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지금 나는 이유 없이 아픕니다. 나의 아픔은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원인도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그 원인이 아닙니다만 어느 것도 원인이 아닌 것 또한 없습니다. 왜 이 아픔은 저절로 생겨난 걸까요?...
자신의 아픔의 원인을 알수 없지만 또한 아픔의 원인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 역설. 그렇게라도 자신의 아픔을 시로 표현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턱이 내려와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잠시 머물게 된 이 바지 안에서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또 다른 세월이 기다린다니!'
- 중략 -
안타깝다. 시인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몰려온다.
<XII. 대중>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옵니다.
"죽지 마!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는 사람은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 두고 가지마! 힘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는 사람은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소용이 없구나!"
그러나 죽는 사람은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는 사람은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 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감동을 받은 슬픈 시신은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시인은 스페인 내전에 깊은 상처를 받으며 총 15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거어다오>에 실린 시 중의 한편인데 전쟁에 대한 안타까움이 전해져 온다.
시를 먼저 읽고, 옮긴이(고혜선 교수)의 해설을 읽었다. '생에 대한 비극적 사고, 그러나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희망'이라는 부제에서 보듯 앞서 시를 읽는 내내 왜 그렇게 어두웠나 짐직해 보게 했다. 가난한 시골 마을 태생으로 학업을 위해 어릴 때 고향을 떠나 궁핍한 생활을 했고,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하며, 유럽에서 겪은 외로운 생활 등으로 시인의 삶은 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또 형 미겔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누나 마리아의 죽음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도 그렇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라 했던 시인의 표현처럼 슬픔을 참 많이도 노래한 시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