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으로 물든 예쁜 책 표지 속에 귀엽고 당찬 꼬마 소녀를 만났다.
바로 일곱 살 주인공 엘사이다.
소설 속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특이한(^^) 단발머리 소녀. 할머니도
같이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질문이 많고 말하기 좋아하던 빨강머리앤도 생각나고,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애환을 위트와 재치로
이겨내어 아들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주었던 아빠의 사랑이야기인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떠오르기도 했던 소설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열두살이 된 딸아이와 나, 그리고 친정어머니 생각이나기도 했다.
이 책은 2015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오베라는 남자>의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다.
<오베라는 남자>는 5월 중순에 영화로도 개봉된다고 하는데
원작의 인기만큼이나 기대가 많이 된다.
<오베라는 남자>에서는 '오베'라는 까칠한 할배 캐릭터로
전세계 독자들을 웃겼다고 하는데, 이번 소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나에게 웃음 넘어로 뭉클함이 더 컸던
이야기였다.
담배, 맥주, 자신의 자동차 르노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초능력이 있으신 일흔 일곱의 할머니. 그러나 그 무엇보다 손녀 사랑이 극진하다. 할머니의 일관된 주장은 "모든 일곱살 짜리에게는 슈퍼 히어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는 엘사의 편이다.
그리고 독자의 마음을 한번씩 뻥 뚤어주는 느낌의 솔직하고 거친 말투가
할머니의 매력포인트이다. 마치 엘사 공주가 살고 있는 성을 지키는 불을 뿜는 용 같다. 엘사에게 할머니는 그렇게 초능력자요 슈퍼
히어로였다.
7살짜리 손녀 엘사도 할머니와 똑닮은 캐릭터다. 죽이 척척 맞는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어른들을 다 합쳐도 엘사보다 영리하지 못하다. 그리고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해리포터
시리즈 중 제일 안좋아해서 스무번 밖에 안 읽은 아이라면??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 아이인지도 상상이 될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잠깐씩
놀라기도 했다. 정말 일곱살 맞아? 하지만 할머니가 인정할 만한 영리함으로 똘똘뭉친 아이이기에 엘사가 일곱살이라는 점이 오히려 점점 더 큰
매력이 된다.
반면 뒤죽박죽인 할머니와는 정반대인 엄마. 엘사의 아빠와 이혼하고
예오리와의 사이에서 동생을 임신한 엄마는 기본적으로 질서정연하하다. 하지만 소설 후반부에서 나타나는 엄마의 캐릭터는 그 할머니의 그 엄마라는
말이 제격인 행동들을 시원스레 보여주고 결국 3대의 가족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이렇게 소설은 할머니와 엄마, 엘사의 이야기를 주 뼈대로 하고, 한
아파트에 사는 여러 이웃들의 얽히고 섥힌 이야기로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베일 속에 있던 궁금증들을 하나씩 풀어준다. 손녀 사랑에 눈이
멀어(^^) 거친 말을 잘도 내뱉는 강한 할머니인줄만 알았었는데 할머니의 인생에 가득했던 사람, 삶, 죽음, 사랑 이야기들은 가슴 찡한 사연으로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엘사와는 다소 냉냉한듯했던 엄마의 어릴적 이야기, 아빠와의
결혼.이혼 이야기, 새로운 파트너 예오리와 그 사이에서 태어날 동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엘사와 엄마와의 <사랑>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과정도 감동이었다.
그리고 아래 아파트 그림과 등장인물의 소개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
작은 임대아파트는 할머니가 엘사에게 늘 들려주셨던 비밀왕국 즉 미아마스이야기의 성이었음을 알게 되고, 깰락말락 나라 이야기, 괴물(늑대소년),
워스, 까만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자...등을 통해 때론 미스터리 같이 때론 환타지 같이 때론 휴먼드라마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소설이었다.

작은 임대아파트의 이야기, 한달에 한번 열리는 회의, 아파트입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는
브릿마리 ,그리고 엘사가 학교에서 받는 괴롭힘.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엘사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미아마스 이야기가
종종 떠올린다.
"그러니까 가끔은 가장 위험해 보이는 곳으로
피신하는게 가장 안전한 방법일 수도 있어."(p.134)
"우리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하면서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p.125)
"우리는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얼마든지 오랫동안 할머니를 사랑할 수 있다."
(p.127)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고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 조차도 문득문득 그리워졌다. 엘사에게 다시 나타나 슈퍼 히어로가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온전히 200% 엘사편인 엘사의 아군이셨던 할머니!
소설 초반부에 시원스럽던 할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시게 되고, 일곱살
엘사에게 할머니는 보물찾기 미션을 남기신다. 할머니가 부탁하신 편지를 전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풀려가는 실마리들... 그 과정 속에서 할머니와
엄마, 아파트 입주민들의 겉모습만이 아닌 그들의 삶에 담긴 아픈 사연들을 하나씩 알게 되고, 결국 소설의 마지막은 아픈 내면과 관계들이 회복되는
<해피앤드>의 느낌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편지마다 담겨진 내용은 하나같이 미안하다는, 성을 지켜달라는,
엘사를 지켜달라는 부탁이 담겨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나면 자길 미워할 거랬어요. 할머니가
한 얘기가 그런 뜻이었네요. 할머니가 자기 아이를 버리고 간 형편없는 엄마였다는걸 내가 알고 나면...."엄마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돌아보자 눈물에 비친 엘사의 얼굴이
보인다.(p.208)


소설의 묘미라고 한다면 이런 사건들이 해결되어져 나가는 과정에서
주인공 <엘사>의 단도직입적이며 톡톡 튀는 질문과 생각들이 등장 인물들의 내면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일곱 살
엘사를 보면서 마치 '문제해결사', '어른 전문 심리치료사'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고 싶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어린 엘사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가 늘 들려주셨던 <사랑한다>라는 뜻을 가진 미아마스의 꿈과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많은 아픈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느라 정작 자신의 딸에게는 쏟지
못했던 사랑이 손녀에게 이르러서는 초능력적인 사랑으로 나타났던 그 사랑의 결과물이었을것 같다.
어찌보면 아파트는 고스란히 할머니의 인생이기도 하다.
깰락말락 나라 이야기와 현실속 이야기를 오가며 읽느라 조금 정신없긴
했지만, <해리포터>같은 책에 익숙한 어른이라면 그 재미가 곱절이 될만한 소설이었다.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주는, 유쾌하지만 눈물짓게 하는 엘사와 할머니,
엄마의 3대 이야기를 나중에는 딸아이와 함께 다시 한번 읽어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