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 아래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에 관한 에세이
토머스 린치 외 지음, 김소정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살갗 아래

토머스 린치 외 14인 지음 / 아날로그(글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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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가들은 무언가를 써야 할 때 자기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작가들의 글처럼. 책을 읽다보면, 그들이 관찰하고 겪은 몸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란 걸 알 수 있다. '피부, 폐, 맹장, 귀, 피, 담낭, 간, 창자, 코, 눈, 콩팥, 갑상샘, 대장, 뇌, 자궁'으로 이어지는 책의 차례를 보고, 나는 읽기 전부터 전율했다. 과장이 아니다. 열다섯 명의 작가들이 몸을 이루는 기관 하나씩을 정해서 쓴, 내밀하고 시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살갗 아래, 추천사 시인 박연준)

 

나이 들어가면서 아픈 일이 잦아지고 있다. 큰 병이 아니라도 위장병, 피부습진, 대상포진, 관절염 등 예전에는 몰랐던 질병이 하나씩 더 늘어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내 '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몸'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삶에 굉장히 친밀한 이야기였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특히 문학에 있어서도 '몸'은 작가들의 큰 관심사임을 알았다. 추천사를 쓴 박연준 시인은 부친의 투병기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병상 위의 참담한 '몸' 조차도 글로 써내는 작가의 독한 면을 말한다. 이렇듯 글로 쓰지 않았을 뿐이지 '몸'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 이상 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영국 작가 열 다섯 명이 자신의 지나온 생을 돌아보며 그 중심에 있었던 신체의 어느 기관과 연결된 이야기를 썼다. '살갗 아래(Beneath the Skin)'라는 제목은 처음에 피지컬한 느낌으로만 다가왔는데 책을 다 읽고나니 시적인 느낌이 더 물씬 난다.

 

"몸을 들여다 본다는 것,

지나온 생을 들여다 보는일"

손 하나를 봐도 위의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알 듯하다. 굵어진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 살과 만성 습진, 꿰맨 흔적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면 지나온 내 삶이 손등위로 스쳐지나가는 듯 하다. 작가들의 몸에 관한 글을 한편 한편 읽다보면 '작가'의 이야기이지만 어느새 '내' 이야기처럼 읽혀졌다.

첫 에세이는 크리스티나 패터슨(Christina Patterson)이 쓴 '피부'에 관한 글이다. "정말이지, 복숭아 같구나." 라고 말하며 뺨을 토닥이던 아빠와의 추억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여드름으로 고생했던 일화와 현대 의학기술에 관한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매일 새로운 피부세포가 생겨나고 상처가 낫기도 하지만 더이상 나이 들어갈수록 '복숭아' 같은 뺨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 하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더 오래 살아갈수록 이 세상과 당신을 가르는 이 탄력적인 장벽은 당신이 싸우고, 결국 이겨낸 전투의 흔적을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상흔들 속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

(40쪽, 피부)

 

'천식으로 고생하는 5백만 영국인 중 한 사람으로서...'로 시작되는 달지트 나그라(Daljit Nagra)의 글은 '천식'에 관한 의학적 상식에 상당 도움을 준다. 대여섯 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에 의해 받았던 주술적 치료에 대한 기억들, 그래서 부모님의 전통과 신앙과는 점점 멀어졌다고 한다. 대신 '시'를 통해 아름다움을 들여마셨다는 고백. 아~ 고칠 수 없는 고질병과 시의 연결고리 라니... 문학이 곧 생(生)이 되었구나 싶었다. 작가에게 만큼은 시가 '육체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시를 읽으면서 시에 흠뻑 빠져드는 행위가 일상의 고됨을 버리고 다시 아름다움을 채울 수 있게 도와주는 교환 시스템이다. 시의 호흡은 리듬이라는 형태로 우리 폐에 자극을 준다. 나는 단숨에 감각의 단위를, 즉 시의 한 행을 암송하고 잠시 쉬면서 숨을 들이마신 뒤에 다음 행을 암송하는 독자를 상상한다.

(51쪽, 폐)

 

이 외에도 맹장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네드 보먼(Ned Beauman)의 흥미로운 에세이도 있다. 평소에는 마치 아무 쓸모없는 기관인 듯 하다가 '급성 충추염'으로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마는 '맹장'. 하지만 맹장도 우리의 일부라는 점. 마지막 글귀가 인상깊다.

 

그렇다. 맹장은 유물이자 골칫거리이다. 하지만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몸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르는, 굼뜨고 벗겨져 떨어지고 불거지고 끊임없이 욱신거리는 모든 부분과 정확히 같은 정도일 뿐인,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70쪽, 맹장)

 

이 외에도 에세이 한 편 한 편이 각각의 리뷰를 따로 쓰고싶은 짧지만 굵은 이야기였다. 패트릭 맥기네스의 '귀'에 관한 이야기는 '듣는' 귀에서 '결코 잠들지 않는' 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고, 칭고니이의 '내 몸에 흐르던 것은 붉디붉은 수치심이었다'를 읽을 때는 잠시 마음이 먹먹했다. HIV(인간면역력 결핍바이러스, 에이즈를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 보균자였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내는 작가의 삶이, 그 피가 더 찐하게 느껴져 오는 듯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담낭, 간, 창자, 코, 눈, 콩팥, 갑상샘, 대장, 뇌, 자궁을 주제로 작가 자신의 삶, 가족의 삶은 결국 생명과 고통, 죽음의 연장성을 이야기해준다.

책을 읽는 동안 '살갗 아래'에 있는 무심히 잊고 지낸 내 몸의 일부들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되었다. 어느날 내 뇌가, 위가, 맹장이, 피가... 이상 신호를 보낼 수도 있을텐데 그런 순간이 좀더 담담히 내 '삶'을 들려다볼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몸에 관한 깊은 관찰과 몸이 겪는 고통을 문학으로 이끌어낸 작가들의 '쓰기 본능'이 참 멋진 책이었다.

 

"우리는 신체 부위 각각의 조합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살 속에서

홀로 분투하는 독립 개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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