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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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작가정신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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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는 흰 물결

붕대로 연결된 우리, 들의 이어달리기"

(붕대 감기)

 

작가정신의 <소설, 향>은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 선을 보인 '소설향'을 리뉴얼해 선보이는 중편 소설 시리즈이다. 이때 '향'은 '향香을 담다, 반향響을 일으키다, 향向하다' 라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윤이형작 가의 《붕대 감기》도 '향'의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다. 유년시절, 청소년시절에는 책이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해 거의 접해보질 못했다. 유교적인 가풍의 농촌문화에서 컸지만 남성과 여성의 큰 차별은 다행히(?) 없었던 것 같다. 교육을 똑같이 받을 수 있었고 노동에도 똑같이 참여해야 했으니 여자라고 특별히 더 누린 것도, 더 희생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무지해서 느끼지 못했던 여성 차별과 여성 혐오, 성폭력의 문제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 있었음을 성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단지 수면 아래에 있었을 뿐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요즘 뒤늦게서야 나도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책도 읽고 내 생각도 정리해볼 수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붕대 감기》는 페미니즘의 어디쯤이라기 보다는 '여성' 모두를 감싸 안는 소설이었다. 여성이 여성을 이해해 가는 짤막한 단편들이 결국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되는 그런 느낌? 내 얘기 같고, 나의 여고동창생 이야기 같고, 나의 직장동료, 선후배, 엄마와 딸의 이야기 같다. '진경'과 '세연'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지 치듯 뻗어져 나가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자유연상 방식으로 펼쳐지다보니 사건 중심이 아니어서 서평으로 쓰기가 정리는 잘 안된다. 다행히 책의 마지막에 심진경 문학평론가의 평을 읽어으면서 좀 시원스레 정리가 되었다.

 

《붕대 감기》속 여성 인물들이 누구의 딸도,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개별적인 각각의 점들이 조금씩 겹쳐지면서 전체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점묘화처럼, 누군가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와 겹쳐지고 이어지게 하면서 익숙하지만 낯선 여성들의 이야기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178쪽

 

흔히 워킹맘 문제는 대개 두 가지 경로를 거치면서 서사화된다. 하나는 전업주부와의 비교.대조를 통해, 다른 하나는 '직장과 육아'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적 상황의 연출을 통해. 이러한 흔한 이분법적 대립 구도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활동을 언제나 가사노동과 육아와의 관계 속에서만 고민하게 할 뿐이다. 그와 달리 이 소설은 워킹맘이 직업적 커리어와 양육 모두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정신적으로 황폐하고 정서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존재가 되는지에 특별히 주목한다.

179쪽

 

 

헤어디자이너 해미는 문득 궁금해진다. 아이와 함께 마지막으로 염색을 하고 간 그 손님이 다녀간지가 벌써 8개월인데, 무슨 일이 있는걸까 하고. 그 손님인 은정은 영화 홍보마케팅을 하는 워킹맘이다. 아들 서균을 임신했을 때 은정은, 절대로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식한 아이 엄마'로만 남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결심했고, 그 결심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다. 어린이집 겨울방학을 맞아 맞벌이 가정의 흔한 풍경대로 시부모님께 아들을 맡겼는데, 눈썰매장에서 원인을 알수없이 쓰러진 아이는 그후 깨어나질 못한다. 어쩔 수 없이 휴직까지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은정은 이런 말을 한다.

 

 

딱 한 명만 있었으면, 은정은 종종 생각했다. 친구가, 마음을 터놓을 곳이 딱 한 군데만 있었으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라도, 자기가 누군지조차 잊은 채 요양원에 계신 엄마에게라도 전화를 걸어 말을 하고 싶었다.

20쪽

 

 

이렇게 여성들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하나같이 삶이, 관계가 힘겹다. 미용실에서 마구 뛰어다니는 정신없는 아이를 통제시키지 않는 엄마인 은정에게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던 자신을 괴로워하는 미용실 직원 지현의 이야기.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은정의 아들 서균의 어린이집 친구 율아 엄마 진경, 그리고 진경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미혼인 세연... 진경과 세연이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수업했던 '붕대 감기'로 이 책의 제목이 연결된다.

 

피부 트러블 때문에 화장을 하고 다녔던 여고생 세연은 학교 전체에서 왕따였다. 그런 세연에게 유일한 친구로 남은 진경은 모범생에다 예쁘고 인기있는 여학생이었다. 진경은 그후 결혼해서 아이가 있고, 세연은 미혼이다. 그러는 사이 오랫 동안 만남을 가지지 않았고, 서로에겐 그럴 만한 각자의 삶의 이유가 있었다. 왜 친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못할까 답답함이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다. '우정' 이라는 허울만 있지 우리는(같은 여성끼리) 서로에게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싶었다. 등장인물 모두에게 비슷한 고민들이 소설 속에 잔뜩 드리워져 있다. 헤어디자이너라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지현은 여성폄하에 반대하고 그런 집회에도 동참하지만 탈코르셋 운동과 자신의 일 사이에서 혼란스러움을 겪는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는 그런 분열과 자괴감 때문에 지현은 다른 사람들, 말하자면 바람 같은 사람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39쪽

 

 

작가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는' 그 이야기들을 독자들은 꼭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을까? 여성이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싸주지 못하는 갈등과 대립은 분명 안타까운 또 하나의 페미니즘 이슈인 듯하다. 답도 결말도 없지만 붕대 감기를 하다가 잘못 꽉쪼여 한쪽은 아픈 비명을 지르고 한쪽은 주변의 따까운 눈총을 받으며 결국은 양쪽이 다 불안하고, 아프고, 좌절을 맛보지만 그 일로 둘은 끈이 이어졌다. 그렇게 예기치 않은 고통이 계속 따라올 것이지만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말고, 이해하며 나아가자는 여성들의 '연대'의 메시지가 담긴 소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하니까 또다시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연대가 아니야. 그건 그냥 미움이야.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 그리고 사람은 신이 아니야. 누구도 일주일에 7일, 24시간 내내 타인의 고통만 생각할 수 없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니? 너도 그럴 수 없는 걸 왜 남한테 요구해?

108-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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