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 Suffering is Never for Nothing
엘리자베스 엘리엇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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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창끝]을 보지 못했다면 보고 읽어도 좋을 책이다. 나도 이번 기회에 다시 보았는데 여전히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영화 속 젊은 선교사들의 죽음은 분명 고귀한 순교였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다섯 명의 선교사 중에 저자의 남편인 짐 엘리엇이 있었다. 선교를 위해 에콰도르 와오라니 인디언 지역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복음을 전해보지도 못하고 인디언들에게 무참히 살해 당했다. 당시 그의 가족은 부인 엘리자베스 엘리엇과 10개월 된 딸이 있었다. 2년 후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딸과 함께 남편을 잃은 그 지역으로 다시 들어가 감동적인 선교 사역을 펼쳤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엘리자베스 선교사님이 당한 고통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사역을 마치고 16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애디슨 레이치라는 신학자와 재혼을 했지만 3년 반 만에 암으로 남편을 떠나보낸다. 또 자신도 노년에 치매를 비롯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런 삶을 살았던 그녀가 우리에게 '고통'에 관해 담담히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엘리엇 여사는 고통을 머리나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알고 있다. 그녀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고통의 온전한 의미와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추천의 글, 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최성은)

 

 

고통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 조차도 다른 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다보면 이제껏 자신이 겪은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큰 교훈을 가르쳐 주신 것은 바로 가장 큰 고난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식인종으로 오해를 받아 인디언들에게 죽임당하는 일을 겪은 어린아이에게 그 사건으로 과부가 된 엄마가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시 91:1-7)라는 말씀을 어떻게 가르쳐야할까? 경중은 달라도 고난 앞에 이런 물음이 생기지 않을 이가 누가 있을까! 그러나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가 "(예수님이) 날 사랑하심"이라는 찬송의 가사의 의미를 배운 것은 아버지가 살해당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아이가 그것을 배운 것은 "(예수님이) 날 사랑하심"이 "성경에 써" 있기 때문이라고! 이 얼마나 단단한, 흔들림 없는 믿음인가! 책을 읽으며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생에서는 이 오랜 질문에 지적으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나 또한 찾지 못했다. 하지만 대신 평안을 찾았다. 내가 당신에게 제시하는 답은 설명이 아니라 사람이다. 바로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42쪽)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면서까지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십자가 위에서만 우리는 고통과 사랑의 모순을 녹여낼 수 있다는 저자.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전까지 우리는 절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1956년 에콰도르 정글에서 남편이 실종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사 43:2-3)는 말씀을 주셨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 당신은 항상 저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원하는 건 제 남편 짐이 제 곁에 있는 거예요. 저희는 5년 반을 기다려서야 어렵게 결혼했는데 겨우 27개월 밖에 같이 지내지 못했어요." 라고.

 

나라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닷새 뒤 그녀는 남편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너무도 가혹한 현실, 남편의 부재라는 크나큰 고통이 그녀로 하여금 진정한 소망과 유일한 피난처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했다는 고백을 한다. 더불어 우리의 고통이 절대로 헛되지 않다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히 알려주고 있음을 계속 강조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로마서 8:18-19)

 

 

영문도 모른 채 휘몰아치는 고난의 한복판,

복음이 애타게 울려 퍼지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을 통해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는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고통을 통해서는 외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C.S.루이스 《고통의 문제》

 

 

우리는 인생에서 누구나 "왜"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은 "나를 믿어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든가 믿지 않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한다. 중간 지점은 없다고.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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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에서 그녀는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고 믿는 믿음에 관해 말한다. 고난이 헛되지 않다는 믿음, 그것이 수용의 열쇠다.

 

우리는 혼돈 속을 떠도는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 삶은 영원하신 분의 팔에 안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눈앞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다.

(89쪽)

 

 

남편을 죽인 인디언들의 마을로 다시 복음을 들고 들어갈 수 있었던 믿음이 과연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항상 궁금했는데 책을 읽으며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수용의 열쇠, 평강의 열쇠...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가장 유익한 길을 원하신다는 걸 알고 믿기에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게 갖추어야할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수용과 감사라고 말한다. 첫 번째 남편도 데려가셨는데 두 번째 남편의 암 진단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훨씬 더 좋은 반응을 원하셨고 그것은 '감사'였다고 한다.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심이 바로 감사거리라는 것이다.

 

 

'상한 마음'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전부라면

하나님은 그 드림을 멸시하시지 않는다

 

내가 과부가 된 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었을 뿐 아니라,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무언가 큰일을 위해 주신 선물이었다. 나는 이 점을 늦게나마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선물이 되었다. 내가 이 점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134쪽)

 

 

이해와 설명이 아닌 순종과 믿음으로, 더 나아가 수용과 감사와 드림으로 고난을 다룬다. 외로움과 가난... 고난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의사의 실수로 아기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패니 크로스비가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형의 진리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변형시켜주신다는 성경의 약속들-광야를 목초지로, 사막을 샘으로, 썩을 것을 썩지 않는 것으로, 약함을 강함으로, 굴욕을 영광으로, 가난을 부요함으로...-을 믿을 때 우리도 '고통은 헛되지 않다'라고 함께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지식과 머리가 아닌 삶과 가슴으로 고난을 이야기해준 엘리자베스 엘리엇 선교사님의 메시지는 영화 [창끝] 만큼이나 깊은 도전과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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