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 높아진 자아, 하나님을 거부하다
팀 켈러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팀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

팀 켈러 지음/두란노 펴냄



20190203_195726.jpg



유아 성경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4장 짜리 짧은 분량의 성경 이야기,

바로 요나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던 뱃길에서 만난 풍랑과

물고기 뱃속에서 밤 낮 삼일을 보낸 시간,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내고

요나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니느웨로 돌이키는데...

 

이런 드라마틱한(?) 일연의 과정들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한 우화 정도로 생각하며 요나서를

가겹게 여길지 모지만

팀 켈러는 요나서가 얼마나 절묘하고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인지에 집중한다.

 

특별히 '방탕한 선지자'(prodigal prophet)로

책의 제목을 정한 이유는

전반부에 보여진 요나에게서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눅 15:11-24)의

역할을 보았고,

후반부에서는 '형'(눅 15:25-32)의 모습이 나타나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피해 달아난 요나가 만난 폭풍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그가 갖는 의문은 우리의 의문이고

그가 갖는 불평은 우리의 불평임을 본다.

 

특별 은총을 받은 요나보다

일반 은총 안에 있는 뱃사람들을 통해

오히려 배울 바가 많은 요나서 초반부.

세상의 꾸짖음 앞에 설 수 있 교회가 되어야함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진정성 있는 관계보다

자신이 속한 민족성(출신)을 더 중시하는

얄팍한 영적 정체성의 민낯을 보며

나는 어떤 신앙 정체성으로 서 있는가

자문해 보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얄팍한 정체성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인종차별주의자와 탐욕스러운 물질만능주의자가 되고, 미와 쾌락에 중독되거나 불안에 시달리고, 걸핏하면 과로하는 상황을 설명해 준다. 자기 정체성의 진정한 뿌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세상의 힘, 인정, 위안, 지배일 때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 (방탕한 선지자 73쪽)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 상황은

대부분 회개하는 순간으로 설교를 들었었던 건 같은데,

책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지은 죄로 죽어 마땅합니다'와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라는 두가지 의미의 중간쯤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왜냐하면, 풍랑의 원인이 불순종한

자신 탓임을 알리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온 변화가 아니라

뱃사람들의 요구에 따른 변화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신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했던 요나,

결국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기만 하던 요나는

가장 밑바닥, 그 한계지점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린다.

팀 켈러는 요나가 초자연적인 구원에 힘입어

물고기 배 속에서 탈출할 거라는 보장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 찬양하고 자신을 그분께 드린 대목에 집중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바로 그때 "큰 결단이 이루어진다." "위대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은..." 어떤 초자연적 사건에 의해 역사의 방향이 바뀔 때가 아니다. 위대한 기적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고백할 때, 그 결과로 하나님이 창조주-피조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실 때 일어난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물고기 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그 부산물일 뿐이다. (방탕한 선지자 108쪽)



요나의 생각과는(?) 달리 뜻밖에도

대규모 회개의 물결이 일어난 니느웨.

비단 요나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니느웨와 비슷한 경우로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의 역사가 실린

페이지에서는 반갑기도하고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이 땅의 부흥을 다시금 꿈꾸며...)

 

그런데 문제는 요나서의 결말이다.

니느웨가 완전한 회개로 돌아왔다는 정황은 없지만

요나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만

보고도 격분했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까지

인용해가면서 자신이 더 의로움을 어필한다.

처음 물고기 뱃속에서

'우상을 붙드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기게 된다고'

기도했던 대로 이교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자신이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요나서를 통해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아버지'를 만난다.

그 점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와 그 형의 '아버지'의 모습과 동일해보인다.

또한 자신을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요나서에 대해

새롭게 고민해 본 부분은 팀 켈러 목사님이 말하는

'열린' 결말에 관한 것이었다.

요나서는 어떤 대답도 없이 끝난다는 것이다.

결국 아래와 같은 하나님의 물음과 요청에

요나 대신 우리가 요나서의 결말을 내야함을 말해준다.



"너는 내가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지 않지만, 나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너에게 보여 준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요나야,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나와 함께해야 하지 않겠느냐?"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발견하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가져야할

정체성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때론 모른 척하며 상관하지 않고 지내고싶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해야할 사명이 있음과

결국 하나님의 은혜 앞에 항복하는 길만이

진정 살 길임도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들었다.



 

20190217_193156.jp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