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생각과는(?) 달리 뜻밖에도
대규모 회개의 물결이 일어난 니느웨.
비단 요나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니느웨와 비슷한 경우로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의 역사가 실린
페이지에서는 반갑기도하고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이 땅의 부흥을 다시금 꿈꾸며...)
그런데 문제는 요나서의 결말이다.
니느웨가 완전한 회개로 돌아왔다는 정황은 없지만
요나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만
보고도 격분했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까지
인용해가면서 자신이 더 의로움을 어필한다.
처음 물고기 뱃속에서
'우상을 붙드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기게 된다고'
기도했던 대로 이교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자신이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요나서를 통해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아버지'를 만난다.
그 점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와 그 형의 '아버지'의 모습과 동일해보인다.
또한 자신을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요나서에 대해
새롭게 고민해 본 부분은 팀 켈러 목사님이 말하는
'열린' 결말에 관한 것이었다.
요나서는 어떤 대답도 없이 끝난다는 것이다.
결국 아래와 같은 하나님의 물음과 요청에
요나 대신 우리가 요나서의 결말을 내야함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