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믿음 - 인문학으로 푸는 믿음의 공식
이성조 지음 / 두란노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문학으로 푸는 믿음의 공식      

 


 

1543546299227.jpg

 

       

 

진짜 믿음은 우리의 편안함을 깬다. 지성이라는 그 안정적인 틀도 무너뜨린다. 그래서 세상이 불편해하는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프롤로그 중)

 

 

고민이 참 많은 시점에서 이 책을 읽었다. 교회 내적인 고민, 교회 외적인 고민, 아이들을 키우는 고민 중에 책말미 즈음엔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도 했다. 뭇별을 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랐던 아브라함과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의 믿음, 십자가 형벌 위에서 붙잡았던 강도의 믿음,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수치스러워 하지 않고 예수님께 가지고 갈 수 있었던 안드레의 믿음, 그 믿음을 나는 가지고 있는가... 개척 4년, 나에게도 주님이 "너 창피하냐? 부끄럽냐? 두렵냐?" 묻고 계시는 듯하여 공감되는 글귀들을 밑줄 그으며 읽었던 책이다.

인문학을 좋아해서 더 친근하게 읽었던 것 같다. 성경을 믿지 않거나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이들은 가장 먼저 이런 반문을 건낸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해?" 이처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불편함을 갖게 만드는 의문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 불편한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할 수 있기를 바램하며 세상을 향해, 특별히 젊은이들을 향해 전하는 '믿음'의 이야기였다.

간간이 지하철이나 길에서 볼 수 있었던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던 사람들을 나도 기억한다. 그뿐 아니라 언제부턴가 국가적인 일들에 태극기를 들고 모여드는 기독교인들의 뉴스는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고 있다. 지성 없는 믿음이 아니라 지성을 끌어안으며 풀어낼수 없을까 목마르던 이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에 다시 마음을 열게 해주는 책이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평생 착하게 살았는데 예수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고, 한평생 나쁜 일 만 하다가도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니, 참 불편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거나 비지성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이라는 '안정적인 틀'을 깨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또, 저자는 천국을 가지 말고 살라고 말해준다.

 

'천국을 사는 것' 이것이 진짜 회개다. 물론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가겠지만, 그 죽어서 가는 천국과 내가 살아서 이 땅에서 살아 내는 천국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란, 땅이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통치와 '다스림'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지배되고 다스려지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예수님을 정말 믿는 사람들은 죽어서 빨리 천국 가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과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할까, 오직 이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p.33)

천국에 관한 좋은 예로 포도원에 늦게 일하러 들어간 일군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알려준다. 또,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독생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고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이 '취약함(vulnerability)'에서 기인함을 보게 한다. 니고데모에게도 어려웠던 '거듭남'에 대한 놋뱀의 비유는 세상이 '믿음'을 불편해 하는 대표적인 예가 되기도 했다. 놋뱀을 바라보는 순간 내 죄와 마주해야 하는 불편함, 기독교의 믿음은 '나의 죄'를 먼저 대면하고 인정해야하는 불편한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니체, 데카르트 등 철학자들의 철학과 믿음을 풀어주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던 시대적 배경을 알고나니 철학과 신학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 같았다. 당시 신은 교황이나 교회 권력자들이 자신의 절대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기독교 신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를 향한 일침이 아니었을까. 또,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제2의 로마서로 지칭하며 믿음의 공식을 인문학으로 풀어내주는 장도 참 좋았다. 주인공 장발장처럼 내일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세상의 법은 공평하지 못하지만 기독교는 '믿음을 통해 소통된 사랑의 취약성'으로 희망이 되어준다. 우리는 그 사랑의 취약성(vulnerability)으로 타자 앞에 설 수 있어야한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이런 정체성을 잃어버린 지금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대해 '우리는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었다. 믿음을 불편해하는 세상을 불편해하고 담을 쌓는 게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 교회, 환난을 통해 진짜 믿음을 가지는 교회, 완전한 끝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교회되길 소망해본다.

마지막으로,
- 천국을 내가 죽어서 갈 나라로 더 크게 소망했지,
내가 살아서 오늘 이 땅에서 살아 내는 나라로 꿈꾸는데는 소홀했음이 부끄러웠고
-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이 가장 연약한 아기가 되시고, 가장 거룩한 자가 더러운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죽음을 알지 못하는 초월자가 죽음을 경험하신... 독생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취약성'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사랑의 취약성이 희석되어진 나와 교회의 모습이 부끄러웠고
- 세상과 교회 사이에 울타리를 쌓으며 소통하지 못함으로 점점 더 '불편한 믿음'을 만든 건 아닌지 돌아보았다.

 

 


 

2018-11-30-11-13-10.jpg


 

 

2018-11-30-11-47-13.jpg


 

 

믿음의 능력은 시간이 아닌 거리가 결정한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자기 믿음이다. 그 믿음의 시간에 비례해서 능력이 경험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믿은 자가 나중 되기도 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한다. p.2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