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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 ㅣ 열린어린이 그림책 21
기 빌루 지음, 이상희 옮김 / 열린어린이 / 2008년 8월
평점 :
참 담담한 그림책을 보면 생각이 들어요. '능청스러워!'
순식간에 고조되었다가 한없이 바닥으로 침체되는 감정을 꼭꼭 숨겨 겉보기에 크게 굴곡 없는 그림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 어쩜 그럴 수가 있어? 작가는 내숭 9단 혹은 구질구질한 장식과 높낮이는 최대한 제거해 버리는 미니멀리스트.
라고 생각했던 책이었어요. 너무 세련되어서 내가 맘 붙일 곳이 없을 줄 알았어요. 도도한 우아함 같은 거. 바람도 없어서 거울 표면처럼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수면. 그게 가능하다면. 찬찬히 읽고 난 후에 생각나는 건 몇몇 그림쟁이들의 이름. 그것도 흥미로워요. 하지만 알고 싶지요. 이 이야기와 나는 어디에서 만나게 되는지.
#1
다시 책장을 넘기는데 그때 비로소 앨리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였어요. 여.행. 혹은 방.황. 또는 호기심과 도전과 방황과 결단이죠.
순간 여행길에 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선배 여행자들 얘기 들으며 눈 반짝거리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러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눈물 찔끔거리기도 하고, "용감하네" 혹은 "너 미쳤구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로 삼고 친구 삼아 걷고 헤매이던 여행길. 여행자로서의 감각이 점점 생기는지 사람들의 친절에 도망가지 않을 줄 알게 되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은 더 가지 말자는 절제력도 발휘할 줄 알게 되었죠. 여행자로서의 여유. 그런데 그 와중에도 정말 든든한 여행동지를 만났을 때 내가 조심스럽게 꺼냈던 말은, "사실, 나 외로워요, 나 지쳤어요, 나 두려워요." 그리고 "나 인제 집에 가고 싶어요."였던 거, 기억합니다.
당연히 돌아왔지요. 그런데 알고 있나요? 한번 발을 떼는 것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니란 걸요. 발을 뗌으로써 문이 열리는 것이지 한 번이 추억이 끝났다고 과거의 문이 닫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시작. 사람들이 도대체 여행을 한 후에 뭐가 달라졌냐고 물어 봤어요.
글쎄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요.. 바깥에도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싱겁죠? 파장은 의외로 컸습니다. 연못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여기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나도 여기에서 살 수 있구나. 내가 살 수 있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내가 살던 우물만이 아니구나, 내가 볼 수 있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물에 놀러 온 누군가들에게 들은 뉴스만이 아니구나.' 감상용 사진이기만 했던 세상이 내가 뛰어놀 수 있는 터로 바뀌었어요.
첫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마루에 넓직하게 이부자리 깔아 놓고 식구들하고 다 같이 잤어요. 따뜻하고, 늦잠 자도 되고, 내일 어디 가야 할지 계획하지 않아도 되고, 돈을 얼마를 써야 할 지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젖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았어요.
정말 좋았어요. 그렇지만 봄날의 낮이 점점 길어지면서, 나는 또다시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어요. 이따금 좋은 인연과 정말 멋진 일들을 맡게 되었지만, 그것들은 내 마음 속의 강렬한 욕망보다 앞서지 못하곤 했어요. 어느 날 밤 나는 잠을 못 이룬 채, 둥근 보름달처럼 반짝거리는 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봄이 흘러가고 여름이 왔어요. 다시 한 해가 지나 새로운 봄이 올 무렵, 나는 연못에서 사라졌어요.
쏴아~ 그 후 얼마동안은 연못에서 나를 볼 수 없었답니다.
작은 몸으로 바다에 가는 데에 두 번이나 성공한, 전설이 된 개구리, 앨.리.스.
보통 여행을 떠난 철부지들이 깨달음을 얻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결말로 삼는 반면에 이 그림책은 한번 바다를 경험한 앨리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다시 바다로 떠난다는 것을 결말로 보여 줍니다. 여행이 원으로 끝나지 않고 직선으로 끝난다면 그건 무얼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헤맨다는 말일까?
앨리스가 바다에서 여유롭게 서핑을 즐기며 나를 쳐다봅니다. 그 눈을 보니 알겠더군요. 앨리스가 연못에서 계속 살았다면 오히려 평생 바다와 연못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헤맸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연못으로 돌아왔어요. 가끔 잠결에 나를 두고 식구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요.
"얘 발 봐라. 세계 여행하고 와서 곰 발바닥이 됐다."
그 말이 마음에 들어요. 세계 일주까지는 아니었지만, 여러 나라를 열심히 걷고 보고 만나고 먹고 느꼈어요. 사실 나한테는 연못 안에서의 발길질만으로도 충분하고 그것도 버거울 때가 많아요. 곰 발바닥을 만들면서까지 연못 밖의 세계를 가고, 앞으로도 또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참 단순합니다. 왜 여기에만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저기 저렇게 큰 세계가 있는데 왜 그곳을 놔두고 여기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연못 안 모든 개구리에게 바다를 보라고, 바다로 가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건 싫지요. 연못도 완벽해요.
하지만 바다가 궁금하고, 바다를 한 번 보았더니 바다만 생각나는 개구리라면, 네가 꼭 연못 안에 살아야 하고, 연못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지요.
그래서 이 책은 멋져요.
절대 강요하지도 않고, 극적인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지만요, 보통 떠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원형으로 마무리하는 떠남에 대한 이야기 형식의 한 부분을 열어제껴 아예 새로운 세계로의 물꼬를 트이게 해 주잖아요. 기존의 따뜻함과는 다른 결말이지만, 이 시원함도 마음에 듭니다. 옛이야기 형식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선사하는 시원함과 통쾌함이란! 작가님의 이야기 변주 방식과 새로운 인생 방법 제시도 좋고요.
'이야기가 꼭 그렇게 맞아들어갈 필요는 없어. 여행이 꼭 그렇게 원형일 필요는 없어. 인생이 꼭 그 패턴일 필요는 없어. 무언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혹은 무언가 꼭 그렇게 맞아들어가는 것은 아니야.'
인생 얘기는 너무 나아간 걸 수도 있지만요, 문득 느껴졌답니다. 인류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패턴이 네 방식이 아닐 수도 있어, 그러니 네 삶을 살아라, 네 자신의 패턴으로 살라고 하는 할아버지의 무심한 듯 다정한 목소리가요.
그림이 너무 예쁩니다. 그림에 대해서도 주욱~ 쓰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은 말들을 주욱~ 썼고 밤도 깊었네요.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