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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기담 수집가 ㅣ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1년 12월
평점 :
1
헌책방 주인장의 책을 읽은 게 한 4년 전부터인가. <작은 책방 꾸리는 법>을 읽으며 나는 주인장이 말하는 책방 이야기에서 내가 운영하고 꾸려갈 공간에 대한 팁을 얻고 상상을 키웠다. 내가 꿈꾸는 공간이 책방은 아니지만 그의 말들은 내가 꾸밀 공간에서 내가 상상할 것이 무엇인지, 즉, 내가 구상하고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 권하고 제안했다. 일이 밥벌이이자 지속가능한 놀이이기를 바라는 나에게는 좋은 자극을 주는 책이었다.
다음 책인 <서점의 말들>을 읽었을 때는 좀 많이 놀랐다. 작가는 그저 책 속 말들을 인용하는 게 아니라 각 책의 구성을 이용하고 유희를 펼치고 있었다. 인용이나 겨우 하는 나로서는 그의 독서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과 그로써 책을 갖고 노는 경지라는 것만 짐작했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는 앞의 두 권과는 또 다르다. 주인장은 책을 찾아 주고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헌책방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수한 이벤트이자 가장 잘 어울리는 미션이 아닐까 싶다.
2
주인장은 이 책의 처음-프롤로그에 자신의 역할이 이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이야기 수집가임을 밝힌다. 더 나아가, 자신은 헌책방 주인이지만 사실 책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고 하니 마치 그의 비밀스런 임무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현실에는 기묘한 일이 많다며 앞으로 읽은 이야기들은 소설이 아니라고 한다. 프롤로그부터 환상문학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시작해서 4개 챕터, 29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재미있다. 그리고 다채롭다. 책 탐정, 사연 수집가가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단편소설이자 연작 드라마 같다. 한편 한편의 사연이 놀랍지 않은 것이 없고, 반대로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아니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에서 가능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삶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책과 함께 숙성되고 숙성되며 드라마가 되었다. 헌책방 주인장을 거쳐서 우리는 그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그는 반복해서 책과 사람의 운명 또는 이끌림을 이야기하는데, 이 많은 이끌림의 이야기 속에 어느새 주인장도 등장인물이 되었고 그 역시 이 이끌림으로 새로운 책을 만났으리라.
다시 말하지만, 작가는 헌책방의 주인장이고 이 글들은 그가 책을 찾아 주며 들은 사연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읽다 보면 이 글들이 실제 사연인지 '어메이징 스토리'에 나올 법한 기묘한 이야기인지 경계가 흐릿해진다. 내 부족한 표현력 대신 추천사를 쓴 장강명 작가의 표현에서 빌려 온다면, '마법'으로 빨려 드는 느낌이다. 작가는 이런 느낌까지도 의도했을 것 같다.
3
한 번에 다 읽었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는데, 이 책의 모든 면에서 그랬다. 이야기를 관망하는 게 아니라 환상문학처럼 내레이터가 이야기에 빨려들어가는 과정, 다락방처럼 아늑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 놀라운 능력의 조력자들(H와 N은 실존 인물일까, 가상 인물일까?), 이 책의 무대인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과 주인장임이 분명한 표지 그림, 본문의 옛날 책 표지까지 '헌책방 기담 수집가'라는 제목이자 컨셉이 전체적으로 꼼꼼히 스며들어 있고 잘 어우러졌다. 심지어 책장을 넘기며 종이 두께와 폰트 크기까지 잘 맞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4
그리고 내가 근래 읽은 책 중에 사람에 대한 예의가 가장 돋보인다. 모든 책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만, 타인의 삶에 대한 경청과 사려 깊은 전달로는 이 책만한 것이 없었다. 팬데믹 이후 사람에 대한 경계로 이제는 지칠 지경이다. 책을 덮는데 문득, 이제는 마음을 열 때라는 생각이 스르르 떠올랐다. 각자의 사연을 들을 여유조차 없는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살이와 그들의 사연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온기 배인 품격이 있는 글들이다. 물론 미스터리와 쓸쓸함도 있다. 그래도 드라마로 만든다면 각 에피소드는 따스함과 선함으로 마칠 것 같다. 각자의 삶에서 자신이 획득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거기에 나름의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책 속 청탁자뿐이겠는가. 모두의 삶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작가가 그러라고 하는 문장은 없지만 나는 새삼 따뜻한 미소와 사람에 대한 존중을 다짐한다.
읽으면서 계속 영상으로 그려진다. 드라마로 봐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은근한 유머를 연출할 수 있는 누군가들이 만들어 준다면 말이다.
*리뷰 제목은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따라했다. 타이틀 못 정해서 등록 못하던 차에 옆에 있는 책 제목을 베꼈다. 그런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사연자는 마음에 오래 묻어 두었던 사연을 풀어 놓고 절판이든 독자의 외면이든 죽어 있던 책을 꼭 필요한 자리에 돌려 놓았을 때, 사연자와 책은 여러 의미에서 생명 또는 생명력을 얻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