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끄기의 기술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마크 맨슨 지음, 한재호 옮김 / 갤리온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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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두고 상스럽고 무자비하다는 표현한 것을 보았다푸하하 웃었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이 책의 장점이다엄숙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저자의 관점과 문제 해결 방식이 얕지는 않다오히려 더 인간 본성과 생각감정의 본질로 향한다문제의 해결점 또는 마음의 실마리가 풀리는 부분이 불교철학이나 명상의 출발점과 닿아 있다그대로 놓아두기를 한다표현이 직접적이고 세속적이나 그가 말하는 것들의 핵심은 그대로 놓아두어라’ ‘그대로 보아라에서 시작한다
  
모두 특별하고 대단하다불교나 명상에서 각 개인이 볼품없다고 하지는 않는다그러나 딱히 특별하다고 하지도 않는다그조차도 의미가 없는 거다자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더는 특별함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무엇이든 마음 졸이고 상상만 하지 말고 해 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해 보면 되는 일도 있지만 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세상살이는 예전보다 수월해진다그냥 그런 거지 더는 특별한 의미를 심을 이유가 없어진다우리는 유망주도 아니고 실패자도 아닌 것이다(81). 모두 자라면서 익숙해진 감정의 시스템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규정할 뿐마크의 말 중에서 한 부분을조금 축약해서 인용한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건 나한테 불가능한 일이었다난 몇 년 동안 속으로 이런 질문을 되뇌며 멍하니 돌아다녔다. “어떻게 하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가가서 말을 걸 수 있을까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는 거지?”
속으로 별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다 했다이를테면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면 안 돼라거나 내가 인사만 해도 여성들은 날 소름 끼치는 변태로 여길 거야와 같은 생각 말이다
느낌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탓에나는 머릿속 세상 밖으로 나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이 아무 때고 서로 다가가 말을 건네는 단순한 현실을 볼 수 없었단 말이다. (178-179)
  
자꾸만 자신이 상황을 만들어낸다누가 뭐라고 면박을 주기도 전에그것이 예의 있는 정도에 그치면 좋지만 아마 우리는적어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자신이 그 이상에 신경 쓰고 전전긍긍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 책은 모두 9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각 장마다 마크의 에피소드다른 인물들의 에피소드붓다나 다른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재미있게그러면서 의미 있게 읽힌다각 장마다 주제는 다르지만웬만하면 처음부터 읽는 게 좋을 것 같다마크가 알려 주는 신경 끄기의 기술이 점진적으로 심도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이 말 좀 들어보라고 소리 높여 말하고 싶은 부분이 여럿 있었다그중 하나다
  
이처럼 문제가 되는 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때로는 스스로의 감정이 어떤지조차도 잘 모른다. (93)
이렇게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94
  
모두들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할 거다난 몇 해 전인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매체에서는 끊임없이 말과 정보가 흘러 나왔고 한 시도 쉬지 않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정신없었던 나는 결국내가 말하면서도 그게 내 의견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그 뒤로는 정말 자기 감정이 무엇인지 알까자기 의견인양 말하고 있지만 정말 그럴까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보고는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그들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것이 자기 생각인지자기 감정인지상황에 따라상대에 따라 그대로 흘러가지만 그게 진심 같지 않았다
  
마크의 에피소드만 읽다 보면 마크는 그저 미국의 중산층 백인 청년 캐릭터 아닐까 싶기도 하다한편은 맞을 거다경제적으로 별 부족함이 없고 강대국 사람이라는 주인 의식과 자신감이 있어서 아무리 자기는 나약한 존재라고 해도 제3세계 나라의 젊은이와는 다른 부유함이 있는 사람그러나 이래저래 방황하고 나약해 보이는 청춘을 겪으며 성장한 그의 생각과 통찰은얕지도피상적이지도 않다. 5장부터 9장까지 마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설명하는 부분은 설명이 자세하며특히 8좋은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은 마크가 관계에 대해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경험하고 성숙해 가는지를 느끼게 한다주의 깊게 읽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9. ‘죽음을 말한다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으며 결국 인생의 생만이 아니라 죽음을 인식하게 된 사람트러블메이커의 에피소드상스럽고 무자비한 촌철살인으로 가득한 이 책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이로서 그가 말하는 신경 끄기는 정점을 찍는다우리는 그렇게까지 많은 것에작은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처음에 등장했던 작가 부코스키가 마지막 장에 다시 등장한다. “우리는 다 죽는다우리 모두가저런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현실은 그렇지 않다우리는 인생의 사소한 문제에 벌벌 떨고 기죽는다아무것도 아닌 게 우리를 먹어 치운단 말이다.” 
  
너무 애쓰지 말고심하게 노력하지 말고쓸데없이 많이 신경 쓰지 말자
지금까지 너무 애쓰고심하게 노력하고 쓸데없이 많은 데 신경을 썼으니인생의 강박을 조금 내려놓는 연습을 하기 좋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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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과 로지 뚝딱뚝딱 누리책 10
거스 고든 글.그림, 김서정 옮김 / 그림책공작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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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와인이랑 같이 꼭꼭 싸서 보내준 책. 읽고 나서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게 만든 책. 넘나 맘에 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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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콜스 - 영화 [몬스터콜] 원작소설
패트릭 네스 지음, 홍한별 옮김, 짐 케이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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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깊은 공포를 경험한 순간은, 어느 밤의 꿈이었을 것이다. 옛 동네를 걷고 있었다. 한 무리의 명랑한 소녀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 나는 그중 한 소녀의 운명을 알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예측은 일어나기 전에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말을 함으로써, 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경계하고 별스럽게 행동하다가 운명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위태로운 운명을 알면서 모른 채 하기도 어려웠다. 이도저도 못한 채, 그러나 운명이란 것의 힘에 짓눌려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었다.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두려움에 굴복하고 거의 체념하며 고개를 뒤를 돌리려는 찰나, 검은 손의 존재를 보았다. 두려움이 극에 달해서 깼다. 꿈 밖에서도 똑같이 밭게 숨을 쉬면서 떨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 검은 손이 운명 또는 그에 맞먹는 거대한 힘의 형상화라고 생각했다. 그 손이 나를 해치려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존재를 드러냈을 뿐.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도 나는 압도당했다. 두려움의 압도였다. 

 

그 후에도 몇 년 동안이나 그 꿈을 생각할 때면 생생하게 그때의 두려움이 살아나 순간 모든 게 멎는 것 같았다.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공포였다. 


『몬스터 콜스』를 읽고 영화 「몬스터 콜」을 보았다. 영화 속 몬스터가 거칠게 등장하는 화면을 보다 한동안 잊었던 그 꿈이 떠올랐다. 나는 코너 같았다. 두려워했고 억눌려 있었다. 그리고 꿈은, 마음의 발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꿈이 내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괜찮다고, 견딜 수 있다고,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한편 내가 솔직한 마음을 숨기고 있음을 나는 꿈을 꾸고 나서야 인정했다. 그리움, 걱정, 갈망을 꿈에서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책『몬스터 콜스』와 영화「몬스터 콜」 패키지. 패스릭 네스 글, 시본 도우드 구상, 짐 케이 그림, 홍한별 옮김, 웅진주니어, 2012


악몽을 꾸는 아이 

『몬스터 콜스』. 코너가 주인공이다. 13살 남자아이. 코너도 꿈을 꾼다. 땅이 무너져 내리고 그 경계에 코너의 엄마가 서 있다. 코너는 땅 속으로 떨어지는 엄마의 손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놓친다. 자꾸 반복하는 악몽이지만 코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지만 솔직히 말하면 말할 수 없었다. 감히 엄마를 잃는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프니까. 아주 아파서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상상은, 하는 것만으로도 금기다. 실제 잘못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 무렵, 몬스터가 나타났다. 밤 12시 7분. 언덕 위에 있던 거대한 주목나무가 코너네 집 마당에 서서 코너에게 말한다. “내가 세 가지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네가 네 번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코너 오말리, 너는 네 진실이, 네가 감추는 것이,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걸 안다.” “너는 이야기할 거다. 그러려고 네가 나를 불렀으니.”


몬스터, 그러니까 주목나무 괴물이 이 말을 할 때, 코너는 자신의 악몽을 생각했다. 또 다짐한다.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몬스터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날이 지나 다시 밤 12시 7분이 되었을 때, 몬스터가 찾아와 약속대로 이야기를 한다. 

첫 이야기는 마녀와 왕자가, 두 번째는 약제사와 목사가 나온다. 몬스터는 두 이야기에 모두 등장한다. 두 이야기 모두 ‘옛날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여 흔히 아는 구조로 진행될 법하지만 중반부 이후로 넘어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며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맺는다. 그것은 코너 역시 느끼는 바여서 코너는 자신이 예상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게 결말을 짓는 이야기에 당황한다.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아무리 인간의 이중성을 생각한다고 해도. 억울한 희생이 있다. 그렇게 만든 실제 인물은 왕자와 약제사이지만, 더 들여다보면 문제를 야기한 근원적 인물은 마녀와 목사임을 알게 된다. 반대로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신부를 죽인 왕자와 목사의 딸들이 죽도록 방관한 약제사를 쉽게 이해하거나 이들에게 동조하기는 어렵다. 


판단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또 있다. 왕자는 신부를 죽인 죄를 마녀에게 뒤집어 씌워 마녀를 내쫓게끔 했다. 그 뒤, 왕자는 나라를 아주 잘 다스렸다. 이렇게 되면 왕자가 한 잔인한 짓이 마치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래야만 했던 정치적 과정이 되고 만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복잡하고 모순되고 서글프다. 다만 우리 대부분은 내면의 갈등, 욕망, 금기를 갖고 살고 그 감정들이 말도 안 될 것 같은 이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의 심리가 오밀조밀 엉킨 역사를 이해하고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여러 관점에서 볼 줄을 안다. 물론 쉽지 않다. 이런 속을 갖고 사는 것은. 스스로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은.  


해리 & 코너 - 그나마 코너를 아는 척하던 1인이 등을 돌린다

학교에서 코너는 말이 없다. 입을 꾹 다물고 누군가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답한다. 모두들 코너의 처지를 안다. 그 나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사는 아이는 많지 않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코너에게 거리를 두고 볼 뿐 어찌하지 못한다. 믿음직한 소꿉친구 릴리가 있다. 하지만 코너는 릴리에게 냉담하다. 릴리가 코너의 아빠가 엄마를 떠났다는 것과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코너는 말할 친구가 없다. 그리고 코너는 아무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학교는 가지만 그 시간 동안 머물 뿐이다. 점점 아무도 코너에게 다가오지 못한다. 코너는 투명인간이 되어간다. 괴롭히는 해리를 빼고는. 


해리는 코너의 상황을 알고도 괴롭힌다. 코너는 말없이 맞는다. 


코너는 그냥 슬픈 게 아니었다. 슬픔은 분노를 수반한다. 엄마 때문에 잠을 못 자느라 고단한 게 다가 아니었다. 고단한 일상은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 감정들이 다 엉켜들고 이 감정 덩어리에 코너는 짓눌려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아이. 고통을 말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쩌면 속죄의식이었을 것이다. 고통을 그대로 견디며 벌을 받는 것. 일말의 위안이었을 수도 있다. 마땅히 받을 벌을 받고 있다는 것. 맞을 용기는 있으나 엄마가 세상을 떠나는 꿈을 말할 용기는 없었다.  


말도 안 되지만 그나마 코너를 외롭지 않게 만들었던 것은 해리일지 모른다. 영화 장면을 덧붙여 이해하자면(=감독의 해석에 빌려 얘기하자면), 코너는 식당에 앉아 있었다. 해리가 다가왔고 코너는 해리가 자신을 괴롭히러 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코너는 몬스터를 그린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두 손으로 꼭 들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내가 코너에게 느낀 것은, 폭력에 대한 진절머리나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였다. 상대가 오면 스케치북을 내밀어 몬스터를 보여 줄 듯이. 순간, 아이러니하게 코너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극점에 있는 해리로 보였다. 아무도 코너에게 다가오지 못할 때 해리만은 다가왔다. 심지어 괴롭혔다. 코너가 스스로 진 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겁내거나 함께 감상에 젖지 않고 자극할 존재는 해리뿐이었다. 


그런 해리가 말한다.

“이제 네가 안 보여.” 


코너는 해리를 때린다. 어린아이 힘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그때 코너는 몬스터와 함께였다. 외할머니의 거실 가구를 부술 때처럼. 그러나 아무도 코너를 벌주지 않는다. 모두 코너를 의식하지만 다가오지 않았다. 코너는 모두의 눈에 보이지만 더 동떨어지게 되었다.  


코너가 식당에서 해리에게 도발하는 장면을 일러스트레이터 짐 케이는 손가락을 그림 도구 삼아 표현했다. 양 페이지 가장자리에 손금, 지문이 드러나도록 찍어 놓았다. 이것은 묘하게, 코너를 내려다보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누가 누구인지 개개인의 얼굴을 인식할 수도 없이 그저 군중, 코너를 투명인간으로 몰아간, 코너가 자신의 관심 밖으로 내보낸 학교의 수많은 인물들. 손가락 도장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내려다보는 군중만 같다.  


이제 코너가 이야기한다 

코너는 외할머니가 온 이유를 안다. 외할머니네서 지내야 하는 이유도 안다. 엄마를 떠나 다른 사람과 가족을 만든 아빠가 찾아온 이유도 안다. 엄마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결코 정확한 단어로 말하지 않고 그건 외할머니나 아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함께 이야기 좀 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코너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말하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던 때가 정말 오고 만다. 엄마는 새로 쓴 약이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코너가 주목나무로 만든 약이 효과가 없을 수 있냐고 따져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알았다. 엄마 말대로. “내 생각에, 네 마음 깊은 곳에서, 너도 알았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니?”


코너는 엄마의 병실을 나와 주목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간다. 어떻게 주목나무로 만든 약이 엄마를 고칠 수 없는지 화를 냈지만 몬스터는 엉뚱한 말을 한다. “나는 네 엄마를 낫게 하려고 온 게 아니다. 너를 낫게 하려고 왔다.” 그러면서 코너에게 네 번째 이야기를 종용한다. 


코너는 다시 악몽의 가운데 놓인다. 주목나무 괴물이 아닌 진짜 몬스터, 파멸의 몬스터가 엄마를 끌어당기는 꿈. 앞부분에서는 일부만 보았던 꿈이 이제 완전히 드러난다. 코너의 엄마는 낭떠러지에 떨어질 위험에 처했다. 코너는 엄마의 손을 잡았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러다 손을 놓친다. 

코너는 자기가 엄마의 손을 놓았다고 한다. 코너가 손을 놓아서, 엄마를 보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격렬히 고통스러운 진실, 손을 놓은 것까지는 인정해도 코너가 하지 못한 말 한 마디까지, 코너는 내뱉는다. “그저 끝나길 바랐어! 다 끝나길 바랐다고!” 


“그게 나를 이렇게 외롭게 만드는 걸 더 견딜 수가 없었어.” 


아픈 엄마를 앞에 두고 감히 할 수는 없는 생각이었다. 코너는 이런 생각을 한 데 대한 벌을 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목나무 괴물은 코너를 벌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코너를 벌하거나 어두운 낭떠러지로 당기지 않았다. 불덩이 같은 말을 내뱉은 뒤, 평온함이 코너를 감쌌다. 



말에는 주술성이 있고 이야기에는 치유 능력이 있다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고 말의 내용이 좋지 않다면 더욱 그렇다. 무심코 말했는데 말처럼 불행이 일어난다면, 실제로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말을 한 사람은 오랫동안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자기가 한 말에 주술적 힘이 있어서 그렇게 되기라도 한 양. 이런 예는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직업에 따라 입에 올리지 않으려는 말이 있다. 시험을 앞두고서 특정 표현을 조심하기도 한다. ‘부정 탄다’나 ‘말이 씨가 된다’는 표현에는 말이 한낱 소리와 의미의 조합이 아니라 그 의미를 실현할 힘을 가졌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코너는 속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속내를 솔직히 털어 놓는 게 왜 문제겠는가. 단지 밤에 꾼 꿈을 말하는데 몬스터까지 나와 이 소동을 부려야 할까. 그건 꿈을 소리 내어 말로 할 때 말에 담긴 의미가 살아날까 봐서이다. 코너는 말이 실제가 될까 봐 두려워한다. 꿈을 꾼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꿈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거부한다. 상황이 위태로워질수록 코너는 말의 굴레에 점점 더 옥죈다. 


코너만이 아니다. 어른들도 엄마가 낫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을 떠날 거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끝과 죽음을 말하면 안 된다는 금기와 그에 따른 억압이 서로에게 진솔하게 다가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단 한 사람도 자연스럽게 끝과 죽음을 말할 사람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 그 말 한 마디라도 더 나쁜 결말에 보탤 수 없으니. 그리고 그렇게 된 뒤의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으니. 모두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다. 아빠도, 엄마도, 외할머니도, 다 그렇다. 진짜 해야 할 말을 가장 쉽고 정확한 단어로 말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심리적 기제가 언어의 금기가 아닐까 싶도록 안 좋은 미래를 암시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벽을 쌓는 이들을 전면에 배치해 놓았다. 


이 금기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고 서로의 불통을 풀어내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금기의 말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이야기에는 치유 능력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는 건 연습이 필요하다. 자기 마음을 인정하는 용기, 그게 진짜가 맞는지 확인하고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는 명민함, 자기에게 묻고 답하며 진실로 향하는 과정을 견디는 인내 같은 것들. 자기의 진실에 다가가고 자기 마음을 인정하고 나면, 이제는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위로한다.


결국은 이야기가 남는다. 삶의 콘텐츠로서의 이야기, 성장과 성숙함의 자양분으로서의 이야기, 내면의 격렬한 움직임이 정리되며 건져낸 하나의 사리 같은 것. 


코너도 언젠가는 말을 할 것이다. 13살의 나이에 아픈 엄마를 보는 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고. 특히 아빠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포근하지 않은 할머니와 살아야 했고 학교 폭력에도 시달렸다고. 엄마를 사랑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 힘든 상황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그리고 고통과 외로움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고. 


러시아 무용가 니진스키가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보다도 더 고통을 당했다”(박명욱,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그린비, 264쪽) 말의 객관적 진실 여부를 떠나 니진스키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한 지점에 몰렸고 그런 시간을 꽤 지속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할 사람도, 날개를 펼칠 무대도 더는 없었다. 코너 오말리가 니진스키의 일기를 봤다면 이 문장을 자기의 말처럼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삶에 닥친 가장 큰 고통을 견디는 아이. 해리의 말대로 “자기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한편 고고한 척, 한편 외롭게 그 짐을 짊어진 소년.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몰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견디는 소년. 몬스터는 그런 코너 오말리를 치료하러 온 존재였다. 몬스터가 코너를 압박하여 코너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치유하는 구성 아래에는 말의 주술성과 이야기의 기능을 묵직하게 깔아놓았다.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몬스터가 나타난 이유를 엄마와의 접점에서 찾는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엄마. 엄마의 옛 스케치북에는 주목나무 괴물과 몬스터가 들려준 두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다. 엄마는 코너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코너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무의식에 숨어 있던 이 이야기가 꿈의 이미지로 나타났을 것이다. 또는 엄마의 바람과 텔레파시가 주목나무 괴물로 형상화되어 코너에게 전해졌는지도 모른다. 진심 간절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코너는 엄마와 자기의 공통점이 그림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림은 코너에게 단순한 낙서 이상이며 위안의 수단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응어리진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코너가 얻은 것들이다. 한 커다란 세계는 막을 내렸지만, 엄마와 코너는 주목나무 이야기로 이제 막 이어졌다. 


책에 비해 너무 앙증맞은 이미지이지만 이 또한 맞다. 주목나무 괴물은 코너의 엄마부터 코너까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 그들을 지켜주는 따스한 존재였으니.  


“이야기는 들짐승 같지.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영화 「몬스터 콜스」 중에서)

“이야기는 세상 무엇보다도 사나운 것이다. 이야기는 쫓아오고 물고 붙잡는다.”(54쪽)

“이야기는 중요하다. 진실을 담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일 수 있다.”(189쪽)

“코너, 언젠가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날이 올 거다. 틀림없이 그럴 거다. 날 믿어라.”(210쪽)

엄마와 코너는 결국 그 이야기를 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할 말이 없었다.(224쪽)


그래서 코너는 그렇게 했다.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이자 완전한 진실을 말했다.

“엄마를 보내기 싫어요.”(270-271쪽)


 

이렇게 읽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급해서 줄거리 파악만 하고 소감을 쓰면서 찬찬히 더 보았다. 그 사이 영화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이자 완전한 진실을 말했다.”를 옮겨 쓰는 순간, 

눈가에 슬픔이 몰려왔다. 

마지막에는 작가의 말이 적당할 것 같았다. 

이 책은 시본 도우드의 구상에 패트릭 네스가 새로운 생각을 덧붙이고 글을 써서 완성한 책이다. 아울러 그림은 짐 케이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어진 작업이다. 죽음은 어쨌든 끝이 맞다. 하지만 삶과 생명의 기운은 이마저도 이야기로 만든다. 바통이 넘어온다.   


“이제는 바통을 여러분에게 넘길 차례이다. 아무리 여러 작가가 이어달리기를 했더라도, 이야기가 작가에게서 끝날 수는 없다. 시본과 나의 일은 여기까지다. 이제 가라. 달려라.문제를 일으켜라.”


이야기를 풀어놓고 문제를 일으켜라. 묵혔던 것을 하나씩 풀어놓으면 그 다음에는 상대가 바통을 받든, 내 마음이 어찌 풀어내든 그 다음 이야기가 또 생길 터이니.

제대로 된 이야기라면 고단한 순간에 우리를 위로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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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곰 - 스웨덴식 행복의 비밀
롤라 오케르스트룀 지음, 하수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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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곰. 처음 이 단어를 보았을 때 생각했다. '아, 그 단어, 참 곰살맞기도 하다.' 어감은 보드랍지만 라곰은 제법 단단한 단어였다. 부제는 ‘스웨덴식 행복의 비밀’인데 부제가 이 책의 정체를 정확히 알려 준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를 이미지 위주로, 감상을 말하는 책은 아니다. 스웨덴의 라이프스타일, 국민정서를 라곰의 차원에서 보고 식생활, 의생활, 주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분석한 책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라곰의 장점과 더불어 단점, 평균 지향이나 자칫 질투심 섞인 상태와 혼동될 수 있음도 지적해 준다. 


예쁜 책이다. 인터넷에서 볼 때는 이 정도로 예쁜 책인지 몰랐다. 


‘라곰’은 세계적 트렌드이기도 하다. 2017년 미국 보그 매거진이 뽑은 라이프 스타일 키워드이다. 휘게에 이어, 북유럽식 라이프스타일 키워드이기도 하고, 삶의 균형,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휘게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라곰은 워라밸이나 욜로처럼 줄임말은 아니어서 그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저자 말대로 워낙 광범위하게 쓰이다 보니 오히려 한 문장으로 정확하게 정의내리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패션, 디자인, 휴식, 식생활, 업무 방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라곰다운 게 뭔지를 설명하면서 라곰에 익숙해지도록 한다. 마치 라곰을 하나의 존재로 두고, 인격체로 두고 설명하듯 한다. 


라곰은 신조어도 아니다. 1600년대에 스웨덴의 문서에 등장했다고 하나 그 기원은 훨씬 전인 바이킹 시대부터 전해온 말이라는 설이 있다. '라게트 옴'의 줄임말로 '팀을 둘러싼'이라는 뜻인데, 이 이야기가 라곰의 이해를 돕는다.


"바이킹들에게는 각자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평한 몫을 갖는다는 인식이 있다. 바이킹은 약탈을 마친 후 모닥불을 피워놓고 빙 둘러앉아 뿔로 만든 잔에 벌꿀술 미드를 채워 이를 돌려가며 마셨다고 한다. 모두가 공평하게 한 모금씩 마시려면 한 사람이 다 마시지 않고 다음 사람을 위해 남기는 배려가 필요하다. - 

라곰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함, 즉 중용을 뜻하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갖게 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지은이는 '라곰'이란 단어에 대해 끈질기게 설명하고 예시를 든다.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면 라곰은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은 적당한'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적당함'이란 것이 얼마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것이다. 친구들이 엄마와 음식을 만들 때 흔히 들었다는 말이 있다. “엄마, 소금 얼마나 넣어?” “적당히.” 친구들이 말한다. 그게 도대체 어느 정도냐고. 숙련된 주부가 적당한 소금양을 알 듯, 또 자기 입맛에 따라 적당한 정도가 미묘하게 달라지듯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삶의 내공이 쌓인 정도에 따라 적당함은 변하고, 그러면서 나름의 일관성을 지닌다. 


내가 느낀 라곰은, 1차원적인 상태에서 얻는 행복은 아니다. 물론 라곰이 햇볕을 받는 즐거움, 맛있는 것을 먹는 기쁨 같은 것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을 더 잘 느끼고 소홀하지 않도록 돕는다. 그러니까, 행복을 진정 행복으로 느끼기 위해 지녀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에 가깝다. 우리 식으로 치면 절제, 중용에 가깝다.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쓸데없이 말을 늘어놓기를 지양하나 일을 하고 현상을 받아들일 때는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라 항상 의문을 품으라 한다.

 

라곰은 ‘적절함’을 추구한다. 라곰이 어떤 상황에서는 ‘절제, 중용’으로 대치될 수 있겠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라곰은 자칫 ‘평균’ 정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실제로 스웨덴 사회에서는 튀는 것을 혐오한다고 하니 이런 면모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절함’이 단순히 ‘평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함은 최적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최’가 붙는다고 해서 자신을 소모시키면서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또 아니다. 최적의 상태가 꼭 ‘최고’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적절함, 최적의 상태란, 과하지 않게 편안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내게 라곰은 이런 식이다. 쉽게 정의하기도 어렵고 말로 정의해 놓고 실천하려 하면 막막할 수 밖에 없다. ‘라곰답게 행복하자’라고 결심한다고 해도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은 나름 균형을 맞추며 살려 하고 평온함 안에서 생기와 즐거움을 찾으려 하니 '라고머'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 다들 각자의 라곰을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곰이란 말을 쓰지 않았고 라곰이 추구하는 행복과 우리 사회가 무심코 행복이라 인정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있을지 모르나, 각자 살아온 만큼의 내공을 발휘하여 상황에 맞는 적절함을 발휘할 때, 안온함, 기분 좋음, 즉, 행복을 느끼는 경험은 해 보았을 것 같다.

 

패션으로 라곰을 설명한 부분은, 라곰을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설명해 주니 라곰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영국에도 라곰이라는 패션 브랜드가 있다. 이 브랜드는 라곰을 편안한 스타일이라고 해석했다. 전체적으로 편안해 보이는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이 라곰을 걸치려면 꽤나 돈을 써야 한다. 청바지와 자연스레 닳은 느낌의 베이지색 캐시미어 스웨터는 비싼 가격에 팔려나간다. 너무 튀지 않는 정도가 좋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옷차림을 하면 결국 피곤해진다. 그렇다고 헝클어진 스타일은 안 된다. 편안한 세련됨을 추구한다.”

 

영국의 라곰이란 이름의 브랜드 패션 원칙이기도 하나, 라곰의 원칙이기도 하다. 이러면서도 또 하나의 조건이 붙는다. 그럼에도 원하면 입으라는 것. 힐이든, 플랫이든 원하는 것을 신고, 맞춤정장이든, 캐주얼이든 원하는 것을 입으라는 것. 어떻게 보면 다 수용할 것 같으나 까다롭고, 까다로울 것 같으나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이것은, 1차원적 행복 추구 차원은 아니다. 


어쩌면 공자나 불교에서 끊임없이 말하는 것처럼 지키되 자유로워질 것, 자유롭되 원칙을 지킬 것. 지키는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경지에 이르고, 또 자유롭게 행동해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경지에 이르라는, 말 안 될 것 같지만 일터에서든, 가정 생활에서든, 인간관계에서, 업무에서, 불과 얼음 사이를 오가는 자신을 내려놓고 어루만지며 어떤 식으로든 수양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지향하는 방향과 라곰은 통한다.

 

그러니 경박한 행복은 아니다. 까다롭되 우아하다. 행복이 꼭 우아할 필요는 없으나 지금 이곳에서 라곰스러운 행동 방식은 권장하고 따라할 만하다. 지금 우리 사는 곳에는 너무 많지 않은가. 말도, 물건도, 불필요한 소모도, 스트레스도… 적을수록 좋다는 것이, 미니멀해지는 것이 꽤 필요하다. 물론 세상이 지나치게 미니멀해지고 획일화된다면 그때 라곰은 열린 마음,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는 자연스러운 태도를 의미하는 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게 될 터이다. 라곰은 그런 말이다. 행복의 원칙을 말하지만 원칙을 강조하느라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 쉽게 행복의 상대적이고 가지각색인 면을 짓누르지 않는. 열려 있되 풀어지지 않은, 고집은 있되 말랑한. 그래서 우아한. 

  

 그러나 복잡함을 거쳐 보지 않으면 단순함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라곰은 균형을 추구하는 문화라는 점을 잊지 말자. 서로에게 빚을 지고 갚지 않으면 그 균형을 깨는 것이다. 저울의 추를 한쪽으로 옮기는 것과 같다.
자급자족에 대한 무의식적인 인식은 낭만적인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결혼하지 않은 연인이 수년 동안 함께 지내며 아이를 여럿 낳아 기르면서도, 금전적으로는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결혼이란 마치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영원히 의지하게 된다는 선언과도 같다며 반대하는 이도 많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항상 의지하고 정서적으로 매여 있게 된다면, 어떻게 나만의 라곰을 찾을 수 있겠는가?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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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9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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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 가는 걸 좋아한다. 몇 번을 반복해서 둘러보고 창덕궁의 전각을 알아갈 때, 지금 내가 보는 모습이 조선시대 때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혼란스러웠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이곳의 미추를 판단해야 하는지 말이다. 지금 내 눈으로 보는 것을 부정해야 할까?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면 안 되는 걸까?

 

미추의 문제로 따지면 난 지금의 창덕궁도 너무 좋아한다. 한옥, 단청, 인정전 앞에 깔린 박석, 나무, 파란 하늘과 한옥의 어울림 등등 그 자체로 내게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00년대 초반 창덕궁을 처음 보고서는 반했고 여전히 내가 보는 것은 이 모습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창덕궁을 갔을 때다. 유치원으로 보이는 꼬마들이 우르르 왔는데, 희정당 앞에서 선생님이 건물의 내력을 목청을 높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건물은 어떤 건물이에요, 일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훼손하고 바꿔 놨어요, 일본 사람들이 잘못했지요, 화가 나는 일이에요, 이런 말이었다. 나는 희정당 앞에서 주춤거리며 그 설명을 들으며,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 꼬마를 보며, 꼬마의 웃음에도 아랑곳않고 일본에 화 내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보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먼저 가르치려 드는구나.’ 부정적 감정, 더 많은 지식을 알고 스스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감정의 정답을 주는구나. 감정의 ‘정답’이라 하는 이유는 그게 우리가 일본에 대해 깊숙이, 고질적으로, 대를 이어 간직하는 류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답습하고 물려주며 민족의 트라우마는 계속 트라우마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어떤 식으로 승화되거나 변화하지 못한 채.

 

저자의 생각처럼, 일제강점기가 대한민국의 트라우마라는 데에 매우 매우 동의한다. 일본과 분단, 이 두 가지는 한반도에 태어나면서부터 우리한테 덧씌워진 무게 같은 것이고 이 두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 더 히스테리한 이유는 이 스트레스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은 일제강점기의 정치사, 독립운동사, 외교사를 담은 지식 정보 책이자 전 국민적, 전 민족적, 전 국가적 트라우마에 대한 저자의 치유 방법이자 치유 노력이기도 하다. 역사를 제대로 응시하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나는 동참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방법과 교육이 지겨워서 그런 것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도, 지금도 반복되는 일본인의 겸허하지 못한 태도도, 그때마다 ‘유감이다’라는 표현을 쓰며 대응하는 모습도. 게다가 현재 일본의 행태에서 일제강점기의 군국주의 잔류를 찾아내며 분노하는 이들은 그 시절을 경험한 연령대만이 아니다. 경험하지 않은 이들도, 일본 총리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심하던 이들도 나이가 들수록 일본의 행동에 민감해지는 듯하다.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 섬과 다를 바 없는 장소에 살며 기사, 책, 주변 사람을 통해 정보뿐 아니라 분노, 서글픔, 피해의식까지 계속 쌓고 키워가는 것만 같다. 기억에 기억을 거듭하며 분노를 더 또렷이 기억하는 듯싶다. 도대체 한-일 축구 경기는 언제나 마음 편히 볼 수 있을까.

 

객관적 서술, 깔끔한 구성의 참고서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은 한 번에 완독하고 끝낼 책이 아니다. 집중해서 읽는다고 해도 1870년대 개항기부터 1940년대 해방과 분단까지, 70여 년의 기록을 한 번에 꿰뚫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건, 인물, 내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내 머릿속에 배치하려면 암기와 발췌독, 재구성과 내가 가진 정보와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대신 읽으면서 내가 아는 다른 이야기, 정보를 덧붙이고 또 다른 책을 읽을 때 자료로 삼으며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역사책이며 ‘실록’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사실 위주로 서술한다. 저자의 관점은 있되 객관적으로, 당시의 복잡한 정세를 간결한 문장으로 군더더기 없이 진행하기 때문에 속도감이 있다. 이 속도감 덕인지 무겁게만 인식된 당시 시대를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긴박하고 역동적으로 대하게 된다. 하긴, 얼마나 역동적인 시대였던가.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 생겨나고, 정치 상황은 급격히 변하고, 살던 데서 쫓겨나고 이름을 바꾸고, 나라가 바뀌고, 크게 분노하고 크게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어쩌면 그마저 따라가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며 살았을 시대.

 

일제강점기의 전반적 상황을 아우르려 하지만 민중 생활사나 문화사가 중심은 아니다. 시대를 10년 단위로 나누고 시대마다 세계 정세, 일제강점기 정책과 한국 사회 변화, 시대별 주요 사건과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나누어 정리했다. 일제강점기 정책, 사회 변화, 주요 사건과 인물을 나누어 담아 나 같은 입문자는 이해하기가 더 쉬웠다. 일제의 정책과 총독 정보에서 일제강점기의 시대별 양상-사회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고 시대별 주요 사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풍미한 인물 이야기에서 주관적으로, 머리보다 마음으로 시대상에 접근하게 된다.

 

저자는 사건마다, 시대상마다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안타깝다거나 억울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감정을 많이 실지는 않는다. ‘안타깝다’는 말도 객관적 사실로 쓰인 정도다. 서술이 군더더기 없다고 느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읽어 내려가며 감정의 소모가 적어서 일제강점기 역사임에도 읽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속도감이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거침 없이 일제강점기 시대를 한 맥으로 이어간다. 저자는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읽고 쓴 걸까. 이 시대를 골목길 저 안쪽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한 시대를 관망한다.


큰 그림부터 사람 이야기까지, 당시 시대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구성

 


세계 동향

저자는 먼저 가장 큰 그림을 보여 준다. 세계 동향이다. 10년 단위로 나누어 간략히 정리했는데 이 부분만 모아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사를 보는 셈이 된다. 우리는 우리 상향을 보기에도 버겁지만, 당시 식민지, 개항, 민족 독립 등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고 대공황, 사회주의, 민주주의, 제국주의는 세계가 연결되는 틈을 타고 전해지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 또한 그랬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일찍 서양의 문물을 수입하고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 침략 정책까지 고스란히 수입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맺고 조선을 개항시키는데 이는 “미국이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수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제 통치 / 한국 사회의 변화

이 부분에서는 일제가 조선을, 대한제국을 어떤 과정으로 침략하고 국권을 강탈했는지, 또 어떤 식으로 한국인의 권리를 짓밟았는지를 서술했다. 경제 수탈, 전반적 통치, 문화 억압은 식민지 후기로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데, 1930년대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민족말살정책을 폈고 1940년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면서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일제의 억압 정책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 양상도 달라졌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피해자로만 인식하는 것은 이 시절 한국 사회의 전반적 변화를 간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참혹한 시절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근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새로운 물건,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고 인구는 늘고 산업에서는 기계화가 시작되었다. 공장이 많아지고 공장 종사자가 증가 속도가 빨랐으며 공교육 제도를 체계화했다. 물론 이런 제도의 시행과 경제 변화의 주축은 일제였다. 목표 또한 일제가 자신들의 부를 늘리려고, 한국인을 일본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기르려는 것이었다. 자발적 근대화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하물며 식민지가 된 국가들은 어떨까. 스스로 선택하거나 자발적으로 경험하거나 실패할 기회도 없이 억지로 주어진 경험에 허덕이고 근대를 앞서 경험한 국가에 더 착취를 당했다. 이런 점이 지금도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트라우마로 기억하는 이유가 되겠지만, 바로 이 때 한국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에 일부러라도 주목해야겠다. 


일제강점기 동안 경제, 산업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물론 노동 종사 영역도. 



또 다른 이야기 - 시대별 주요 사건

이 책에서 민중 이야기, 문화사, 생활사의 비중이 크지는 않다. 앞에서 말한 일제의 국권 수탈, 통치 양상의 변화, 한국인의 저항과 새로운 정부 수립의 갈망이 가장 중심이 되는 흐름이다. 여기에 보다 구체적인 각 시대별 주요 사건, 시대를 풍미한 인물은 사실과 통치 위주로 기록되는 실록에 생동감과 현장감을 불어넣어준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 일본이 철도부설권을 대가로 맺은 간도협약, 삼일운동, 간토대학살, 백백교 사건, 제주 해녀들의 경찰 주재소 습격 사건, 소작쟁의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을 뽑아 놓았다. 


국사 시간에 배운 것들, 지금은 키워드만 간신히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고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건을 접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자유시참변은 처음 알게 된 사건이다. 1921년 6월, 여러 파벌의 독립군 사이에 일어난 지휘권 다툼 때문에 백 명이 넘는 독립군이 러시아군에 사살되었고 수천 명의 독립군이 무장해제된 일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저 긴박한 시대에, 간절한 바람을 갖고 모인 이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지휘권 다툼을 벌일까 싶었다. 그런데 곧 이런 생각을 했다. 목표는 같고 의지는 강했으나 사상도, 방법도 서로 다른 이들이다. 어쩌면 그 의지와 목표가 너무 절박하기 때문에, 그러나 서로 겨뤄볼 여력도 되지 않았기에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러자 이 또한 절박한 시대가 몰아붙여 일어난 참사로 보였다.


자유시 참변이 안타까운 사건의 대표적 예라면 완바오산 사건은 예나 지금이나 간과할 수 없는 언론의 어두운 면을 보여 준다. 이것은 중국의 완바오산 싼싱바오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선일보 기자가 잘못 보도하는 바람에 한국인이 한반도에서 수백 명의 중국인을 살해하거나 해한 일이다. 처음에 중국인 하요융더가 자신도 임차한 땅을 한국 이주민에게 재임차한 일은 잘못이나 그 이후 그 땅에 수로로 건설하려고 그곳에 살던 중국인들의 양해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일을 벌이고 수로 완성까지 강행한 것은 한국 이주민의 잘못이었다. 이런 내막은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중국인이 한국 이주민이 건설한 수로를 파괴했다는 기사를 호외로 발행했으니, 역시나 내막을 알지 못하는 한반도에 있는 한국인이 중국인에게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자유시 참변이 시대가 만든 비극이라면 완바오산 사건은 시대보다는 언론과 무지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풍미한 인물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이 시대의 한계가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다양한 인물을 뽑아서 보여주는데, 국권 수탈 시기인 1910년대까지는 일본의 편에 서서 매국에 앞장 선 인물을 정리했다. 이완용, 송병준, 윤덕영, 이지용 등이다. 이후에 소개되는 인물은 나철, 박은식, 이승훈, 김좌진 등 독립운동을 하거나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려고 애쓴 인물이 많다. 


그중 마지막으로 나오는 인물은 윤동주다. 교토지방재판소에서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당시 윤동주의 유죄 사유는 이렇다. “윤동주는 어릴 때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문화적으로 깊이 빠져 있었으며,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한국)의 차별 문제에 대해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망동을 했다.”


참 이상한 말 아닌가. 일제강점기의 시대상을 단적으로 짐작하게 하는 판결문이다. 어딘가에 태어나 그 땅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자신이 사는 땅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걸 망동이라 하다니,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는 것은 이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조차 잘못이 되는 이상한 세상에 살았다는 것이구나. 통치가 막바지에 달할 수록 고문, 징병, 가혹한 수탈로 살고 죽는 것조차 일제가 좌지우지했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부정적 감정을 벗어나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보기  

저자는 지배와 저항의 논리로만 일제강점기를 보지 말라고 한다. 저자의 말과 의도에 호응하지만 이렇게 보려면 나는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트라우마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를 일제에 넘기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분명 고질적인 문제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바탕이 되어서 일제강점기가 결정적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보아도, 일제강점기에 분명 결정적 트라우마가 형성된 것은 맞고 그것이 지금까지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그 시절의 잔혹함, 암울함, 무지가 그 시대를 상처투성이로 기억하게 만들었으며 그때 비롯된 사고 방식, 발전 방식, 새로운 문물의 수용 방식, 그때 형성된 사회 체제 등이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


'들어가는 말' 중. 저자는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 좋은 관점을 제시해 준다.

 


중요한 점은 이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일제강점기가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보고 덮을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 시절이 트라우마의 시작점인 것을 알지만 또한 이때가 전통시대를 마무리짓고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는 변화의 시작점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사회 변화, 생각의 변화, 독립운동의 기개를 더 들여다보며 그 시대의 역동성을 느껴보고 싶다. 

 

하나 더 덧붙인다. 서두에 창덕궁 얘기를 했는데 훼손된 유적지, 유물이 다 일제강점기 때 그렇게 된 건 아니다. 전쟁통에 다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근현대라 부를 시기, 전쟁 이후 한창 도시화, 서구화에 치중하던 20세기 중후반에도 유적지 훼손은 일어났다. 우리 전통의 것을 어여삐 보지 못하고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버릇이 일제강점기 때 뿌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물리적 훼손이 다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이런 점을 더 살피며 일제강점기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역사를 재구성하고 싶다. 이건 내 일이다. 한 명의 독자인 내 일. 그래서 이 책은 한 번에 끝낼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볼 책인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알아야 할 게 많고 깨야 할 것이 많으며 밝혀야 할 것이 많다. 작가들이 하나하나 다 발굴해 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해야 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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