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콜스 - 영화 [몬스터콜] 원작소설
패트릭 네스 지음, 홍한별 옮김, 짐 케이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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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깊은 공포를 경험한 순간은, 어느 밤의 꿈이었을 것이다. 옛 동네를 걷고 있었다. 한 무리의 명랑한 소녀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 나는 그중 한 소녀의 운명을 알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예측은 일어나기 전에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말을 함으로써, 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경계하고 별스럽게 행동하다가 운명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위태로운 운명을 알면서 모른 채 하기도 어려웠다. 이도저도 못한 채, 그러나 운명이란 것의 힘에 짓눌려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었다.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두려움에 굴복하고 거의 체념하며 고개를 뒤를 돌리려는 찰나, 검은 손의 존재를 보았다. 두려움이 극에 달해서 깼다. 꿈 밖에서도 똑같이 밭게 숨을 쉬면서 떨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 검은 손이 운명 또는 그에 맞먹는 거대한 힘의 형상화라고 생각했다. 그 손이 나를 해치려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존재를 드러냈을 뿐.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도 나는 압도당했다. 두려움의 압도였다. 

 

그 후에도 몇 년 동안이나 그 꿈을 생각할 때면 생생하게 그때의 두려움이 살아나 순간 모든 게 멎는 것 같았다.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공포였다. 


『몬스터 콜스』를 읽고 영화 「몬스터 콜」을 보았다. 영화 속 몬스터가 거칠게 등장하는 화면을 보다 한동안 잊었던 그 꿈이 떠올랐다. 나는 코너 같았다. 두려워했고 억눌려 있었다. 그리고 꿈은, 마음의 발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꿈이 내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괜찮다고, 견딜 수 있다고,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한편 내가 솔직한 마음을 숨기고 있음을 나는 꿈을 꾸고 나서야 인정했다. 그리움, 걱정, 갈망을 꿈에서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책『몬스터 콜스』와 영화「몬스터 콜」 패키지. 패스릭 네스 글, 시본 도우드 구상, 짐 케이 그림, 홍한별 옮김, 웅진주니어, 2012


악몽을 꾸는 아이 

『몬스터 콜스』. 코너가 주인공이다. 13살 남자아이. 코너도 꿈을 꾼다. 땅이 무너져 내리고 그 경계에 코너의 엄마가 서 있다. 코너는 땅 속으로 떨어지는 엄마의 손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놓친다. 자꾸 반복하는 악몽이지만 코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지만 솔직히 말하면 말할 수 없었다. 감히 엄마를 잃는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프니까. 아주 아파서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상상은, 하는 것만으로도 금기다. 실제 잘못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 무렵, 몬스터가 나타났다. 밤 12시 7분. 언덕 위에 있던 거대한 주목나무가 코너네 집 마당에 서서 코너에게 말한다. “내가 세 가지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네가 네 번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코너 오말리, 너는 네 진실이, 네가 감추는 것이,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걸 안다.” “너는 이야기할 거다. 그러려고 네가 나를 불렀으니.”


몬스터, 그러니까 주목나무 괴물이 이 말을 할 때, 코너는 자신의 악몽을 생각했다. 또 다짐한다.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몬스터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날이 지나 다시 밤 12시 7분이 되었을 때, 몬스터가 찾아와 약속대로 이야기를 한다. 

첫 이야기는 마녀와 왕자가, 두 번째는 약제사와 목사가 나온다. 몬스터는 두 이야기에 모두 등장한다. 두 이야기 모두 ‘옛날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여 흔히 아는 구조로 진행될 법하지만 중반부 이후로 넘어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며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맺는다. 그것은 코너 역시 느끼는 바여서 코너는 자신이 예상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게 결말을 짓는 이야기에 당황한다.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아무리 인간의 이중성을 생각한다고 해도. 억울한 희생이 있다. 그렇게 만든 실제 인물은 왕자와 약제사이지만, 더 들여다보면 문제를 야기한 근원적 인물은 마녀와 목사임을 알게 된다. 반대로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신부를 죽인 왕자와 목사의 딸들이 죽도록 방관한 약제사를 쉽게 이해하거나 이들에게 동조하기는 어렵다. 


판단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또 있다. 왕자는 신부를 죽인 죄를 마녀에게 뒤집어 씌워 마녀를 내쫓게끔 했다. 그 뒤, 왕자는 나라를 아주 잘 다스렸다. 이렇게 되면 왕자가 한 잔인한 짓이 마치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래야만 했던 정치적 과정이 되고 만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복잡하고 모순되고 서글프다. 다만 우리 대부분은 내면의 갈등, 욕망, 금기를 갖고 살고 그 감정들이 말도 안 될 것 같은 이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의 심리가 오밀조밀 엉킨 역사를 이해하고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여러 관점에서 볼 줄을 안다. 물론 쉽지 않다. 이런 속을 갖고 사는 것은. 스스로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은.  


해리 & 코너 - 그나마 코너를 아는 척하던 1인이 등을 돌린다

학교에서 코너는 말이 없다. 입을 꾹 다물고 누군가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답한다. 모두들 코너의 처지를 안다. 그 나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사는 아이는 많지 않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코너에게 거리를 두고 볼 뿐 어찌하지 못한다. 믿음직한 소꿉친구 릴리가 있다. 하지만 코너는 릴리에게 냉담하다. 릴리가 코너의 아빠가 엄마를 떠났다는 것과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코너는 말할 친구가 없다. 그리고 코너는 아무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학교는 가지만 그 시간 동안 머물 뿐이다. 점점 아무도 코너에게 다가오지 못한다. 코너는 투명인간이 되어간다. 괴롭히는 해리를 빼고는. 


해리는 코너의 상황을 알고도 괴롭힌다. 코너는 말없이 맞는다. 


코너는 그냥 슬픈 게 아니었다. 슬픔은 분노를 수반한다. 엄마 때문에 잠을 못 자느라 고단한 게 다가 아니었다. 고단한 일상은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 감정들이 다 엉켜들고 이 감정 덩어리에 코너는 짓눌려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아이. 고통을 말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쩌면 속죄의식이었을 것이다. 고통을 그대로 견디며 벌을 받는 것. 일말의 위안이었을 수도 있다. 마땅히 받을 벌을 받고 있다는 것. 맞을 용기는 있으나 엄마가 세상을 떠나는 꿈을 말할 용기는 없었다.  


말도 안 되지만 그나마 코너를 외롭지 않게 만들었던 것은 해리일지 모른다. 영화 장면을 덧붙여 이해하자면(=감독의 해석에 빌려 얘기하자면), 코너는 식당에 앉아 있었다. 해리가 다가왔고 코너는 해리가 자신을 괴롭히러 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코너는 몬스터를 그린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두 손으로 꼭 들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내가 코너에게 느낀 것은, 폭력에 대한 진절머리나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였다. 상대가 오면 스케치북을 내밀어 몬스터를 보여 줄 듯이. 순간, 아이러니하게 코너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극점에 있는 해리로 보였다. 아무도 코너에게 다가오지 못할 때 해리만은 다가왔다. 심지어 괴롭혔다. 코너가 스스로 진 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겁내거나 함께 감상에 젖지 않고 자극할 존재는 해리뿐이었다. 


그런 해리가 말한다.

“이제 네가 안 보여.” 


코너는 해리를 때린다. 어린아이 힘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그때 코너는 몬스터와 함께였다. 외할머니의 거실 가구를 부술 때처럼. 그러나 아무도 코너를 벌주지 않는다. 모두 코너를 의식하지만 다가오지 않았다. 코너는 모두의 눈에 보이지만 더 동떨어지게 되었다.  


코너가 식당에서 해리에게 도발하는 장면을 일러스트레이터 짐 케이는 손가락을 그림 도구 삼아 표현했다. 양 페이지 가장자리에 손금, 지문이 드러나도록 찍어 놓았다. 이것은 묘하게, 코너를 내려다보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누가 누구인지 개개인의 얼굴을 인식할 수도 없이 그저 군중, 코너를 투명인간으로 몰아간, 코너가 자신의 관심 밖으로 내보낸 학교의 수많은 인물들. 손가락 도장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내려다보는 군중만 같다.  


이제 코너가 이야기한다 

코너는 외할머니가 온 이유를 안다. 외할머니네서 지내야 하는 이유도 안다. 엄마를 떠나 다른 사람과 가족을 만든 아빠가 찾아온 이유도 안다. 엄마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결코 정확한 단어로 말하지 않고 그건 외할머니나 아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함께 이야기 좀 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코너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말하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던 때가 정말 오고 만다. 엄마는 새로 쓴 약이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코너가 주목나무로 만든 약이 효과가 없을 수 있냐고 따져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알았다. 엄마 말대로. “내 생각에, 네 마음 깊은 곳에서, 너도 알았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니?”


코너는 엄마의 병실을 나와 주목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간다. 어떻게 주목나무로 만든 약이 엄마를 고칠 수 없는지 화를 냈지만 몬스터는 엉뚱한 말을 한다. “나는 네 엄마를 낫게 하려고 온 게 아니다. 너를 낫게 하려고 왔다.” 그러면서 코너에게 네 번째 이야기를 종용한다. 


코너는 다시 악몽의 가운데 놓인다. 주목나무 괴물이 아닌 진짜 몬스터, 파멸의 몬스터가 엄마를 끌어당기는 꿈. 앞부분에서는 일부만 보았던 꿈이 이제 완전히 드러난다. 코너의 엄마는 낭떠러지에 떨어질 위험에 처했다. 코너는 엄마의 손을 잡았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러다 손을 놓친다. 

코너는 자기가 엄마의 손을 놓았다고 한다. 코너가 손을 놓아서, 엄마를 보냈다. 그리고 이보다 더 격렬히 고통스러운 진실, 손을 놓은 것까지는 인정해도 코너가 하지 못한 말 한 마디까지, 코너는 내뱉는다. “그저 끝나길 바랐어! 다 끝나길 바랐다고!” 


“그게 나를 이렇게 외롭게 만드는 걸 더 견딜 수가 없었어.” 


아픈 엄마를 앞에 두고 감히 할 수는 없는 생각이었다. 코너는 이런 생각을 한 데 대한 벌을 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목나무 괴물은 코너를 벌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코너를 벌하거나 어두운 낭떠러지로 당기지 않았다. 불덩이 같은 말을 내뱉은 뒤, 평온함이 코너를 감쌌다. 



말에는 주술성이 있고 이야기에는 치유 능력이 있다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고 말의 내용이 좋지 않다면 더욱 그렇다. 무심코 말했는데 말처럼 불행이 일어난다면, 실제로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말을 한 사람은 오랫동안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자기가 한 말에 주술적 힘이 있어서 그렇게 되기라도 한 양. 이런 예는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직업에 따라 입에 올리지 않으려는 말이 있다. 시험을 앞두고서 특정 표현을 조심하기도 한다. ‘부정 탄다’나 ‘말이 씨가 된다’는 표현에는 말이 한낱 소리와 의미의 조합이 아니라 그 의미를 실현할 힘을 가졌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코너는 속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속내를 솔직히 털어 놓는 게 왜 문제겠는가. 단지 밤에 꾼 꿈을 말하는데 몬스터까지 나와 이 소동을 부려야 할까. 그건 꿈을 소리 내어 말로 할 때 말에 담긴 의미가 살아날까 봐서이다. 코너는 말이 실제가 될까 봐 두려워한다. 꿈을 꾼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꿈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거부한다. 상황이 위태로워질수록 코너는 말의 굴레에 점점 더 옥죈다. 


코너만이 아니다. 어른들도 엄마가 낫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을 떠날 거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끝과 죽음을 말하면 안 된다는 금기와 그에 따른 억압이 서로에게 진솔하게 다가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단 한 사람도 자연스럽게 끝과 죽음을 말할 사람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 그 말 한 마디라도 더 나쁜 결말에 보탤 수 없으니. 그리고 그렇게 된 뒤의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으니. 모두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다. 아빠도, 엄마도, 외할머니도, 다 그렇다. 진짜 해야 할 말을 가장 쉽고 정확한 단어로 말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심리적 기제가 언어의 금기가 아닐까 싶도록 안 좋은 미래를 암시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벽을 쌓는 이들을 전면에 배치해 놓았다. 


이 금기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고 서로의 불통을 풀어내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금기의 말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이야기에는 치유 능력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는 건 연습이 필요하다. 자기 마음을 인정하는 용기, 그게 진짜가 맞는지 확인하고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는 명민함, 자기에게 묻고 답하며 진실로 향하는 과정을 견디는 인내 같은 것들. 자기의 진실에 다가가고 자기 마음을 인정하고 나면, 이제는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위로한다.


결국은 이야기가 남는다. 삶의 콘텐츠로서의 이야기, 성장과 성숙함의 자양분으로서의 이야기, 내면의 격렬한 움직임이 정리되며 건져낸 하나의 사리 같은 것. 


코너도 언젠가는 말을 할 것이다. 13살의 나이에 아픈 엄마를 보는 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고. 특히 아빠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포근하지 않은 할머니와 살아야 했고 학교 폭력에도 시달렸다고. 엄마를 사랑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 힘든 상황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그리고 고통과 외로움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고. 


러시아 무용가 니진스키가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보다도 더 고통을 당했다”(박명욱,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그린비, 264쪽) 말의 객관적 진실 여부를 떠나 니진스키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한 지점에 몰렸고 그런 시간을 꽤 지속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할 사람도, 날개를 펼칠 무대도 더는 없었다. 코너 오말리가 니진스키의 일기를 봤다면 이 문장을 자기의 말처럼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삶에 닥친 가장 큰 고통을 견디는 아이. 해리의 말대로 “자기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한편 고고한 척, 한편 외롭게 그 짐을 짊어진 소년.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몰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견디는 소년. 몬스터는 그런 코너 오말리를 치료하러 온 존재였다. 몬스터가 코너를 압박하여 코너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치유하는 구성 아래에는 말의 주술성과 이야기의 기능을 묵직하게 깔아놓았다.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몬스터가 나타난 이유를 엄마와의 접점에서 찾는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엄마. 엄마의 옛 스케치북에는 주목나무 괴물과 몬스터가 들려준 두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다. 엄마는 코너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코너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무의식에 숨어 있던 이 이야기가 꿈의 이미지로 나타났을 것이다. 또는 엄마의 바람과 텔레파시가 주목나무 괴물로 형상화되어 코너에게 전해졌는지도 모른다. 진심 간절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코너는 엄마와 자기의 공통점이 그림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림은 코너에게 단순한 낙서 이상이며 위안의 수단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응어리진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코너가 얻은 것들이다. 한 커다란 세계는 막을 내렸지만, 엄마와 코너는 주목나무 이야기로 이제 막 이어졌다. 


책에 비해 너무 앙증맞은 이미지이지만 이 또한 맞다. 주목나무 괴물은 코너의 엄마부터 코너까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 그들을 지켜주는 따스한 존재였으니.  


“이야기는 들짐승 같지.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영화 「몬스터 콜스」 중에서)

“이야기는 세상 무엇보다도 사나운 것이다. 이야기는 쫓아오고 물고 붙잡는다.”(54쪽)

“이야기는 중요하다. 진실을 담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일 수 있다.”(189쪽)

“코너, 언젠가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날이 올 거다. 틀림없이 그럴 거다. 날 믿어라.”(210쪽)

엄마와 코너는 결국 그 이야기를 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할 말이 없었다.(224쪽)


그래서 코너는 그렇게 했다.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이자 완전한 진실을 말했다.

“엄마를 보내기 싫어요.”(270-271쪽)


 

이렇게 읽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급해서 줄거리 파악만 하고 소감을 쓰면서 찬찬히 더 보았다. 그 사이 영화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이자 완전한 진실을 말했다.”를 옮겨 쓰는 순간, 

눈가에 슬픔이 몰려왔다. 

마지막에는 작가의 말이 적당할 것 같았다. 

이 책은 시본 도우드의 구상에 패트릭 네스가 새로운 생각을 덧붙이고 글을 써서 완성한 책이다. 아울러 그림은 짐 케이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어진 작업이다. 죽음은 어쨌든 끝이 맞다. 하지만 삶과 생명의 기운은 이마저도 이야기로 만든다. 바통이 넘어온다.   


“이제는 바통을 여러분에게 넘길 차례이다. 아무리 여러 작가가 이어달리기를 했더라도, 이야기가 작가에게서 끝날 수는 없다. 시본과 나의 일은 여기까지다. 이제 가라. 달려라.문제를 일으켜라.”


이야기를 풀어놓고 문제를 일으켜라. 묵혔던 것을 하나씩 풀어놓으면 그 다음에는 상대가 바통을 받든, 내 마음이 어찌 풀어내든 그 다음 이야기가 또 생길 터이니.

제대로 된 이야기라면 고단한 순간에 우리를 위로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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