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헌책방에서 이반 일리치를 읽다 - 2018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선정도서
윤성근 지음 / 산지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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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샀다고 도장이 찍힌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이제야 다 읽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책 내용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데 재미있게도 이 책, 동네 헌책방에서 이반 일리치를 읽다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이탈로 칼비노는 도시의 번영과 몰락, 도시 전면의 화려함과 그 뒤에 허다한 누추함을 단편으로 나열한다. 이야기 속 도시는 어디에도 없으나, 또한 모든 곳에 있는 온갖 도시의 묘사이자 비유이다. 사람과 도시는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유토피아를 꿈꾸나 디스토피아도 배제하지 못한다. 칸이 디스토피아 격인 도시들을 보며 최후의 상륙지가 지옥의 도시일 수밖에 없다면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지.”라고 말한다이에 칼비노는 폴로의 입을 통해 말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전자일까, 후자일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전자일 것이다. 딱히 돈, 계급, 물건에 좌우되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 듯 보이나 실은 그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할 뿐 결국은 그 삶이 내게 안정감을 주지 않을까, 라며 현재를 서글퍼하고 저 삶을 선망하니.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그 주인장. 그는 후자이다. 이 도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세상 속도에 휩쓸리지 않으나 글쓴이는 자신이 나아갈 길은 신기할 정도로 잘 찾아낸다. 자기 속도대로 살며 길을 만들고 찾아내는 점도 대단하지만 다른 이의 미세한 신호를 따라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에 길을 잇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 놀라웠다. 그의 방식은 그가 살면서 하나하나 깨닫고 책에서 읽은 것을 체득하고 실험한 결과이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감수성 넘치는 에세이도 아니다. 실은 위로한답시고 목소리 차분히 내리고서는, 세상 기준이나 속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최고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 더 마음에 든다.

 

저자는 자기 사는 얘기를 성실하게 한다. 경쟁이 극심한 대도시, 어쩌면 이 대도시의 속성이 칸과 폴로의 대화에 나오는 지옥이리라. 헌책방 주인장은 이곳에서 이반 일리치에게 배운 것들을 실험하고 싶단다. 칼비노의 소설 구절에서 헌책방 주인장이 생각난 이유이다. 그는 이 지옥을 떠나지 않고 지옥에서 지옥 아닌 것을 찾고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그것을 펼쳐놓고 있다.

 

그를 자기 삶의 실험자라 하고 싶지만 이런 명칭을 붙이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금세 들었다. 그는 살고 있다. 자기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해 준다. 한 사람이 사는 이야기일 뿐인데도 그 이야기가 값지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는, 아주 많은 우리는, 자기 삶인 듯하지만 세상의 암묵적 기준에 휘둘리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욕구인지 세뇌된 욕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성심껏 하고 있다

어떤 계기에서든 배제할 것을 배제하고 자기 생활을 꾸려가는 그를 응원한다. 게다가 도시에서. 그의 생활이 또 어찌 변화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식이든 기대가 된다.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인스타 계정을 보다가 은평구 존 레논이라고 쓴 멘트를 보고 푸핫, 뿜은 적이 있다. 책표지 캐릭터도 주인장을 더 닮게 했다면 어땠을까, 더 생동감 있고 위트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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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집 - 생명.평화.자연을 노래하는 글 없는 그림책, 2010 볼로냐 라가치 픽션부문 최우수상 수상작 날개달린 그림책방 4
로날트 톨만.마리예 톨만 글 그림 / 여유당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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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읽어도 아름답더니, 지금 읽어도 아름답고 마음을 울렁이는 책. 고마워요. 이 그림책을 내 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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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조심 웅진 모두의 그림책 7
윤지 지음 / 웅진주니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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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색이 가득한 그림책을 받았다. 형광색의 과감함에 어울리지 않게 제목은 ‘마음 조심’

이글이글 해가 떠오르는 아침부터 달이 환히 뜨는 밤까지, 어느 소심한 이들의 하루를 보여주는 책이다.


소라게의 하루는 이렇다. 


알람 소리에 깨어 일어나고 출근을 한다. 출근길을 나서며 소라게는 말한다. 

  

"안녕, 나는 소라게야.

보통 사람보다 조금 느리고 조금 잘 놀라서

사람들은 내게 소심하다고들 해."


출근길은 복잡하고 붐빈다. 폭력적이기도 한데, 이렇게 복잡하고 붐비는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곧잘 각박해지기 때문이다. 출근길 사람들은 시간이 촉박하고 매일 반복된 피로가 쌓여 있다. 삶이 치열한 만큼 각자가 말없이 분출하는 부정적 에너지나 폭력성은 커진다. 그 속을 소라게가 지나간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지만 그러다 보니 소라게는 늘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달고 산다. 그러고도 만원지하철에서 겨우 내린다. 

  

소심하고 성실한 소라게 씨, 엘리베이터 자리를 새치기 당하고도 사무실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그러나 사무실 일과에서도 소라게 씨의 성격이 달라질 리는 없다. 상사의 고함소리가 들리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착각한다. 고객의 목소리에도 이런 식으로 반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거칠게 전화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급기야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리고는 놀란 마음에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소라게 씨. 상사가 이런 소라게 씨를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야단을 맞고 눈물까지 흘리는 소라게 씨. 


소라게 씨를 위로하는 동료도 있고 소라게 씨와 비슷한 친구들도 있다. 소라게의 소라게의 소심 동지라 할 생물체들은 책 곳곳에 등장하는데, 다들 소라게처럼 작고 우렁이, 달팽이, 게, 거북이처럼 위급하면 쏙 숨어버릴 수 있는 껍질 집을 가지고 있다. 세상일 겪으며 소심증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지만 그 또한 착각인지, 큰 소리 한 번만 나도 도로 소심한 존재로 돌아가고 만다. 

  

소심한 일상을 이해하고 나누는 친구들과 ‘마음 조심’하라며 당부하고 집에 돌아온 소라게 씨. 소심한 하루를 마쳤지만 내일 아침부터 이 일상은 다시 시작이다. 더 심한 날이 있을 것이고 덜 심한 날도 있을 것이다. 나아지겠지, 살다 보면 이런 반응에 이만큼 괴로워하지 않게 되겠지, 하면서 하루를 또 견디는 것이다. 소심한 이의 일상이자 웬만한 도시인, 직장인의 하루이다. 


앞면지. 해가 떠오르고 소심한 이의 하루도 시작된다.

뒷면지. 해가 지고 소심한 이들의 하루도 마감한다. 뒷면지까지 보고 표지를 덮고 나면, 앞표지부터 또 다시 하루가 시작되니, 책 자체가 소심한 이의 하루이자 반복되는 일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소라게나 소라게 친구를 제외한 사람들과 세상 사물을 보면 초록색에 검은 색으로 명암을 넣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보통 선인장을 표현하는 방식과 비슷해 보인다. 일상에 지친 도시인이 가시 가득한 선인장처럼 가시 돋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색과 형태는 도시인과 참 잘 어울린다. 특히 출근길. 여유 공간도 없이 주변을 온통 에워싼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느라 신경 쓰이고, 배차 간격을 하나만 놓쳐도 늦지 않을까 조마조마해지고, 한 마디로 짜증이 온통 배어 손만 대어도 터질 것 같은 도시인. 지하철에 사고가 나도 사람을 걱정하기보다 출근 시간 때문에 걱정해야 하는 비정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경적 소리, 상사와 고객의 거친 목소리는 주황색으로 표현해서 현기증 느낄 정도로 강렬하게 전달되는데 꼭 분출하는 용암 같다. 

선인장 같은 출근길 도시인. 가시 돋혀 있기는 선인장이나 출근길 빽빽한 지하철 안의 나나 비슷하다.


소라게 씨의 모습은 나의 모든 모습과 비슷했다. 큰 경적 소리에 깜짝 놀라고 새치기 당해도 아무 말 못한다. 소라게 씨와 다르다면 나는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새치기한 사람의 뒷통수를 노려본다는 것뿐. 고객과 전화하는데 자신이 없어서 기어드는 목소리로 하다가, 전화가 끝날 무렵 전화선 너머로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여기 상담원은 좀…” 큰 목소리를 폭력으로 여기는 것도 너무 닮았다. 


지금은 아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회사 생활로 대표되는 사회생활을 얼마나 했던가. 그렇게 배운 태도, 요령으로 지금은 일을 미리 겁낼 필요도 없고 쉽게 당황하지 않고 대처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한 번 죽 읽었을 때, 나는 이 단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그 날 저녁에 지인에게 문자를 보내며 바로 소라게 얘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저 오늘 소라게처럼 마음의 집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 같아요. 저 좀 나오게 해 주세요. 불라불라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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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파이어 - 열정의 불을 지피는 7가지 선택
존 오리어리 지음, 백지선 옮김 / 갤리온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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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자를 책보다 신문 기사로 먼저 만났다.

그의 아들과의 일화가 인상적이었다. 아들이 네 살 때, 존의 배를 보게 된다. 화상을 입은 붉고 우둘두둘한 맨살을 말이다. 아들이 아빠의 배를 보고 기척을 보이자 존은 순간 경계 상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최악의 상황을 준비한다면서. 그때 아들이 말했다. “I love it!”

 

최악의 상황을 준비한 존에게 아들이 한 말은 정말 멋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쓸모없는 선입견에 대해, 그로 인한 판단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한 일화였다. 나는 그 뒤에도 입버릇처럼 “I love it!”하며 아이를 따라했다.

 

“I love it!” 아이의 말은 어쩌면 어린 존에게 그의 아빠가 했던 말과도 본질은 통해 보였다. 집을 망가트리고 화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는 아들을 본 그의 아빠는, 숱한 의문과 공포를 제쳐두고 아들에게 말했다. “, 아빠는 너를 사랑해.”

 

-

아빠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두려움으로 온몸이 마비될 것 같았다. 아마 도망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그러나 아빠는 두려움을 제쳐두고 끔찍한 화상의 상처가 아닌, 아들만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사랑과 용기, 믿음으로 충격과 슬픔, 두려움을 뚫고 곧바로 나에게 다가와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가 자랑스럽다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 아빠는 너를 사랑해.

이 세 단어로 나의 세계는 바뀌었다.

- 239

 

이 책은 이렇게 존의 삶을 가슴 뛰는 삶으로 이끈 기적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저자인 존 오리어리는 소년 시절 불장난으로 집을 망가트리고 자신도 극심한 화상을 입었다. 치료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존이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존은 이 과정을 견뎠고 그 뒤에 닥치는 수많은 난관, 고통을 견뎠다. 지금도 스스로 승리자라고 여겨도 좋을 만큼 만족스런 삶을 영위하고 있다. 화상의 고통은 여전히 있다. 삶의 난관은 시도 때도 없이 닥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 때문에 순간의 행복과 삶을 망치지 않는다. 무엇이 삶을 이렇게 받아들이게 하는지를, 이 책은 말해 준다.

 

존은 삶의 극단적 위기를 경험했고 그 어두운 터널을 견뎌냈다. 그럼으로써 존은 삶이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안다. 그러나 중요한 것, 이 마법 같고 겸허한 삶의 원칙은 존이 온전히 혼자 해낸 것이 아니다. 그의 삶에는 숱한 기적과 영웅이 있었다. 존 오리어리를 다시 삶으로 이끈 영웅들과 그들이 만든 기적의 순간들이 이 책에 있다. 아버지, 어머니, , 누나, 여동생은 물론이요, 매일 찾아온 의사 선생님, 물리치료를 담당한 간호사, 어린 소년의 화상 소식을 듣고 용기를 주려고 찾아온 전 육상 선수 글렌 커닝햄, 아나운서 잭 벅이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고가 나고 존이 입원해 있을 때 존의 가족을 도와 준 이웃, 존의 병원의 청소부도 모두 그를 삶으로 이끈 영웅이었다. 그에게 삶이란 호흡이 멈추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성장이 멈추는 순간, 좋은 영양분을 주는 것을 멈추는 순간 삶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겪은 기적의 순간과 영웅과의 만남은 내 순간 존을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하게 한다.

 

지금 존은 세계적인 강연가이다. 그의 첫 경력이 강연가는 아니었다. 부동산 개발업자로도 경력을 쌓았지만 결국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를 삶으로 이끈 기적의 순간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었다. 존은 책의 서두에 변곡점이라는 표현을 쓴다.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강렬한 사건의 순간을 맞을 수 있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맞고 사람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존은 그 순간을 거치며 살아가는 데 진정한 태도를 배웠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도 진심으로 삶의 매 순간을 대하고 변곡점의 순간에서 당신도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긍정성은 단순히 밝아지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힘은 역설적으로 그런 순간을 통해서 알아간다.

 

처음에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 책도 자기계발서에 넣어야 할까? 그렇다고 생각하고 읽은 책인데, 근래에 읽은 자기계발서 중에서 가장 뭉클했다. 온 파이어. 제목이 어찌 보면 짓궂다. 화상을 입어 극심한 고통을 입은 그에게 다시 On Fire라니! 하지만 그 불길이 그가 인생을 식히지 않는 불길을 발견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한다. 사고와 화상의 순간이 극심히 고통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다시 이 삶을 선택할 것이라고. 결국 열정이란 삶에 대한 깊은 애정임을, 자신에 대한 깊은 믿음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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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웅진 모두의 그림책 6
이적 지음, 김승연 그림 / 웅진주니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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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와 남은 자’라고 썼다가 ‘남은 자와 떠난 자’라고 제목을 바꿉니다.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읽고 하는 이들은 ‘남은 자’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남은 자의 일은 떠난 자의 빈자리를 느끼고 그들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뿐입니다. 『어느 날,』에 나오는 꼬마처럼. 


꼬마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꼬마는 일상의 하루를 보냅니다. 그저 일상의 하루를. 모든 것은 그대로인 채로 할아버지만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일하던 로열나사, 할아버지가 신던 구두 세 켤레, 할아버지가 살던 동네, 할아버지와 말을 나누던 이웃도 모두 그대로인데, 할아버지가 뺨을 비비던 기억까지 생생한데, 오직 할아버지만 없는 세상. 반대로 오직 할아버지만 없을 뿐이지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아이는 허망한 마음을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합니다. 

  

할아버지와 함께한 경험은 동네 어디에나 있고 모두에게 있지만, 할아버지를 실제로 찾으려 하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구체적으로 닿지도 않습니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아이는 할아버지가 일하던 로열나사로 들어가 할아버지의 옷 속에서 할아버지의 냄새를 맡습니다. 서글퍼하던 아이는 어느새 할아버지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할아버지의 양장점 이름 같은 로열나사, 우주 어딘가에 있는 로열나사 행성으로 나아갑니다. 할아버지는 평생 해 오던 옷 짓는 일을 그곳에서도 하겠지요. 그때처럼 구식 라디오를 들으면 일을 하겠지요. 큰 단추, 작은 단추, 실이 행성과 위성, 그들의 궤도처럼 그려지는 세계, 똑똑한 사람들이 섬유와 양장점을 연구하고 아이는 할아버지의 신발을 우주선 삼아 놀고 양복 재단지와 실뭉치가 행성처럼 꼬마와 할아버지를 지탱해 주는 곳. 지금 할아버지는 그곳에 있을까요.

  

이별은 갑작스럽습니다. 예고된 이별도 분명 있지요.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한 이별도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늘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쉽게 익숙해질 수 없는 경험입니다. 현실과 사람의 인식 사이에 큰 괴리가 생깁니다. 현실에서 이별은 벌어진 일이고 사실이 되었지만, 사람이 그 사실을 인식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 이후에도 오래고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맞는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적응하게 되는 것이지요. 안 그러면 할 게 없으니까요. 선택지가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온다면’ ‘다시 지난 주로 돌아간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요. 선택지가 없는, 거의 유일무이한 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별은 갑작스럽고 아이는 어리둥절합니다. 그건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어른은 그동안 들어온 것들이 있지요. 태어나면 떠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서 돌아가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말들이고 이와 더불어 영화, 책, 뉴스, 주변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는 생각해 본 바가 있을 테고요. 그럼에도 쉽지 않고 생경한 일입니다. 추상적 경험과 이해가 없는 아이라면 또 다를 수밖에요. 기댈 지식, 먼저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가 축적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 괴리를 메꾸는 게 판타지이자 상상입니다. 이들이 어디로 갔을까, 우리 곁을 떠나 이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이들이 어디로 갔을까, 하며 만들어내는 세상이요. 꼬마도 그렇지요.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로열나사 우주로 나아간 것처럼요. 

  

한때 옷 짓는 문화에 관심이 많아 한복점이니 양장점이니에 관심을 둔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다가 양장점과 우주의 의외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 풋, 웃음을 띠고 말았습니다. 양장점의 ‘나사’는 우주로 연장되기에 참 좋지 않나요? ‘나사NASA’라는 이름 자체가요. 미국에 기반을 둔 우주항공국이지만 나사나 허블은 지구 전체에 천체 정보를 보급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이미지와 정보를 보유하고 있고 우주 관련 프로젝트를 하지요. 그래서 ‘나사’의 국적을 따지기 전에 나사는 ‘우주’ 자체를 상징하지요. 우주를 향하는 지구의 대표 본부요. 할아버지의 작은 양장점은 그보다 작지만, 할아버지의 우주로 나아가는 또 다른 본부가 됩니다. 

  

채도가 낮아 편안한 색, 색이 배어든 소박한 느낌의 종이도 마음을 따뜻하게 감쌉니다. 차분한 색조로 내려앉은 동네 풍경과 집 내부 모습은 현재보다는 80년대, 90년대 초에 가깝습니다. 지은이 이적 또는 그림작가 김승연의 어린 시절 풍경이 아닐까 싶지요. 책을 보다 문득 궁금해진 것은 계절입니다. 면지부터 바닥에 떨어진 은행잎을 보면 노랗거나 하얗게 바랜 것이 가을 같은데, 대문 안에 솟은 나무에는 목련꽃(제가 보기에는)이 피었고 대문 위 작은 화단에는 나팔꽃이 피었지요. 이것들이 한 계절에 다 일어나기는 어려운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아이의 슬픔이 1년 내내 이 모습으로 지속되었다면, 그건 안 되지요. 물론 슬픔이 1년 내내, 아니 그 이상 가겠지요. 그러나 그 슬픔은 변해야지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되니까요.   



어느 날, 같이 있던 존재들이 하나는 남은 자가, 하나는 떠난 자가 되고 맙니다. 늘 함께 있던 사람이 떠났는데도 천지가 개벽하지 않음이 이상합니다. 일상은 여전히 일상입니다. 그래서 야속하고, 그래서 견딥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요. 느릿느릿 적응할 겁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받아들이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남은 자의 몫임을.   


꼬마는 자꾸 반복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라고. 사실 우리가 할 말이 무어가 있을까요.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되뇔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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