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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ㅣ 웅진 모두의 그림책 6
이적 지음, 김승연 그림 / 웅진주니어 / 2017년 11월
평점 :
‘떠난 자와 남은 자’라고 썼다가 ‘남은 자와 떠난 자’라고 제목을 바꿉니다.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읽고 하는 이들은 ‘남은 자’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남은 자의 일은 떠난 자의 빈자리를 느끼고 그들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뿐입니다. 『어느 날,』에 나오는 꼬마처럼.
꼬마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꼬마는 일상의 하루를 보냅니다. 그저 일상의 하루를. 모든 것은 그대로인 채로 할아버지만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일하던 로열나사, 할아버지가 신던 구두 세 켤레, 할아버지가 살던 동네, 할아버지와 말을 나누던 이웃도 모두 그대로인데, 할아버지가 뺨을 비비던 기억까지 생생한데, 오직 할아버지만 없는 세상. 반대로 오직 할아버지만 없을 뿐이지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아이는 허망한 마음을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합니다.
할아버지와 함께한 경험은 동네 어디에나 있고 모두에게 있지만, 할아버지를 실제로 찾으려 하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구체적으로 닿지도 않습니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아이는 할아버지가 일하던 로열나사로 들어가 할아버지의 옷 속에서 할아버지의 냄새를 맡습니다. 서글퍼하던 아이는 어느새 할아버지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할아버지의 양장점 이름 같은 로열나사, 우주 어딘가에 있는 로열나사 행성으로 나아갑니다. 할아버지는 평생 해 오던 옷 짓는 일을 그곳에서도 하겠지요. 그때처럼 구식 라디오를 들으면 일을 하겠지요. 큰 단추, 작은 단추, 실이 행성과 위성, 그들의 궤도처럼 그려지는 세계, 똑똑한 사람들이 섬유와 양장점을 연구하고 아이는 할아버지의 신발을 우주선 삼아 놀고 양복 재단지와 실뭉치가 행성처럼 꼬마와 할아버지를 지탱해 주는 곳. 지금 할아버지는 그곳에 있을까요.
이별은 갑작스럽습니다. 예고된 이별도 분명 있지요.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한 이별도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늘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쉽게 익숙해질 수 없는 경험입니다. 현실과 사람의 인식 사이에 큰 괴리가 생깁니다. 현실에서 이별은 벌어진 일이고 사실이 되었지만, 사람이 그 사실을 인식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 이후에도 오래고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맞는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적응하게 되는 것이지요. 안 그러면 할 게 없으니까요. 선택지가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온다면’ ‘다시 지난 주로 돌아간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요. 선택지가 없는, 거의 유일무이한 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별은 갑작스럽고 아이는 어리둥절합니다. 그건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어른은 그동안 들어온 것들이 있지요. 태어나면 떠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서 돌아가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말들이고 이와 더불어 영화, 책, 뉴스, 주변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는 생각해 본 바가 있을 테고요. 그럼에도 쉽지 않고 생경한 일입니다. 추상적 경험과 이해가 없는 아이라면 또 다를 수밖에요. 기댈 지식, 먼저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가 축적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 괴리를 메꾸는 게 판타지이자 상상입니다. 이들이 어디로 갔을까, 우리 곁을 떠나 이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이들이 어디로 갔을까, 하며 만들어내는 세상이요. 꼬마도 그렇지요.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로열나사 우주로 나아간 것처럼요.
한때 옷 짓는 문화에 관심이 많아 한복점이니 양장점이니에 관심을 둔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다가 양장점과 우주의 의외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 풋, 웃음을 띠고 말았습니다. 양장점의 ‘나사’는 우주로 연장되기에 참 좋지 않나요? ‘나사NASA’라는 이름 자체가요. 미국에 기반을 둔 우주항공국이지만 나사나 허블은 지구 전체에 천체 정보를 보급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이미지와 정보를 보유하고 있고 우주 관련 프로젝트를 하지요. 그래서 ‘나사’의 국적을 따지기 전에 나사는 ‘우주’ 자체를 상징하지요. 우주를 향하는 지구의 대표 본부요. 할아버지의 작은 양장점은 그보다 작지만, 할아버지의 우주로 나아가는 또 다른 본부가 됩니다.
채도가 낮아 편안한 색, 색이 배어든 소박한 느낌의 종이도 마음을 따뜻하게 감쌉니다. 차분한 색조로 내려앉은 동네 풍경과 집 내부 모습은 현재보다는 80년대, 90년대 초에 가깝습니다. 지은이 이적 또는 그림작가 김승연의 어린 시절 풍경이 아닐까 싶지요. 책을 보다 문득 궁금해진 것은 계절입니다. 면지부터 바닥에 떨어진 은행잎을 보면 노랗거나 하얗게 바랜 것이 가을 같은데, 대문 안에 솟은 나무에는 목련꽃(제가 보기에는)이 피었고 대문 위 작은 화단에는 나팔꽃이 피었지요. 이것들이 한 계절에 다 일어나기는 어려운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아이의 슬픔이 1년 내내 이 모습으로 지속되었다면, 그건 안 되지요. 물론 슬픔이 1년 내내, 아니 그 이상 가겠지요. 그러나 그 슬픔은 변해야지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되니까요.
어느 날, 같이 있던 존재들이 하나는 남은 자가, 하나는 떠난 자가 되고 맙니다. 늘 함께 있던 사람이 떠났는데도 천지가 개벽하지 않음이 이상합니다. 일상은 여전히 일상입니다. 그래서 야속하고, 그래서 견딥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요. 느릿느릿 적응할 겁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받아들이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남은 자의 몫임을.
꼬마는 자꾸 반복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라고. 사실 우리가 할 말이 무어가 있을까요.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되뇔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