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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과학 - 뇌는 어떻게 우리의 운명을 만드는가 ㅣ 프린키피아 7
한나 크리츨로우 지음, 김성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한나 크리츨로우의 『운명의 과학』은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스스로의 선택이며 어디까지는 이미 정해진 경로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책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며 살아왔는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었고, 지적 호기심이 강하게 자극되었습니다.

저자는 유전자, 뇌 발달, 호르몬, 어린 시절 경험, 사회적 환경 등이 어우러져 한 사람의 성격과 기질, 판단 방식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다양한 연구와 사례로 보여줍니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보며 쉽게 내리던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평가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이의 충동성, 불안, 우울, 혹은 반복되는 실패조차 단지 그 사람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뇌와 환경이 오랜 시간에 걸쳐 빚어낸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타인에 대한 판단보다 이해와 연민의 시선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히 “모든 것은 뇌가 정해 둔 대로 흘러간다”는 냉혹한 결정론으로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자는 뇌가 평생 변화하는 가소성을 지닌 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의 한계와 경향을 아는 것이 운명 앞에서 체념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 운명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묵직한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자유롭게 삶을 설계할 수는 없지만, 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환경과 습관을 조정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조금씩 수정해 갈 여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희망처럼 다가옵니다.

특히 식욕, 중독, 관계, 신념과 같은 일상적인 주제를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장면들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 행동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다이어트가 번번이 실패하는 경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반복하는 스마트폰 확인, 특정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패턴 등이 모두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의 보상 시스템과 학습된 회로의 작동과 깊이 얽혀 있다는 설명을 읽고 나면, 자신을 다그치던 시선이 조금 누그러지게 됩니다. 동시에, “그렇다면 나의 뇌 회로는 지금 어떤 경험을 먹고 자라나고 있는가”라는 자성적인 질문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평소 무심코 쌓아온 습관들이 곧 나의 미래 성향을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을 더 신중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다가온 감정은, 인간에 대한 시선이 한층 부드러워진다는 점입니다. 타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 혹은 스스로의 부족함에 괴로울 때, “이건 오롯이 내 잘못”이라고 단죄하기보다는 “나와 타인의 뇌가 어떤 조건 속에서 이렇게 형성되었을까”를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그 관점의 전환은, 잘못을 면제해 주는 변명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보다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도록 유도합니다. 교육과 복지, 형벌과 책임에 대한 사회적 논의까지도,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을 통과한 뒤에는 훨씬 더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평하자면, 『운명의 과학』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낭만적인 믿음을 해체하는 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보다 더 단단한 종류의 책임감을 일깨우는 책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 대신,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알기에, 내가 바꿀 수 있는 조건부터 성실히 다듬자”는 태도를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운명을 극복해야 할 적으로만 보던 시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의 뇌와 나의 환경, 나의 과거와 미래가 서로 얽혀 만들어 갈 이야기 자체를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은 과학 교양서를 넘어,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보다 성숙한 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철학적 성찰의 계기가 된다고 느끼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