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과학 - 과학자가 풀어 주는 전통 문화의 멋과 지혜
이재열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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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과학’은 전통 살림살이에 깃든 과학 원리를 차분하게 풀어내면서, 일상이 얼마나 정교한 지식 위에 서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미생물학자의 시선으로 부엌과 안방, 대청과 마당을 바라보는 구성이 인상적이어서, 평범한 집 안 풍경이 실험실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책은 오래된 시골집의 문이 삐걱 열리는 장면처럼, 집 구조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1부 집, 2부 부엌, 3부 안방, 4부 대청, 5부 사랑채, 6부 마당으로 이어지는 흐름 덕분에 독자는 집 안을 걸어 다니듯 각 공간의 살림살이를 차례로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공간을 축으로 서사를 엮어 나가는 방식은 전통문화를 단편적인 풍속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이해하게 해 줍니다.



저자는 미생물학자라는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 그릇 하나, 선반 하나에도 숨어 있는 과학을 집요하게 포착합니다. 음식을 익히는 조리법과 미생물의 침입을 막는 저장법이 사실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전통 요리법을 단순한 ‘옛날 방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다시 보게 합니다. 조상들이 선택했던 토기·도기·자기의 재질과 구조, 숨 쉬는 그릇과 숨을 막는 그릇의 차이를 풀어내는 대목에서는, 눈앞에 있는 식기들이 갑자기 과학적 도구로 변하는 느낌이 듭니다.



부엌과 장독대, 술과 식초, 김치와 장아찌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집집마다 다르게 담가 먹던 술과 식초, 동치미와 오이지, 여러 가지 김치에 담긴 미생물의 작용과 발효 환경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전통 레시피가 곧 실험의 축적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온도, 통풍, 일조량, 염도, 용기의 재질과 모양 등 현대 공정관리에서 중요하게 보는 요소들이 이미 전통 살림살이 속에서 섬세하게 조절되고 있었다는 점이 인상에 오래 남습니다.





집 구조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부엌, 안방, 대청, 사랑채, 마당이 단순한 동선이 아니라 에너지와 물질의 흐름을 조절하는 장치로 다가옵니다. 아궁이와 온돌이 난방과 조리를 동시에 해결하는 효율적인 발명품이라는 설명, 햇빛과 바람을 고려한 대청과 마당의 설계는 전통 한옥이 단지 정서적 공간이 아니라 치밀한 생활과학의 산물임을 드러냅니다. 또한 전통 온실과 한지를 다루는 장에서는 농업과 건축에서도 과학적 실험과 최적화가 끊임없이 시도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 연구 성과와도 연결고리를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는 역사, 민속, 건축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이 수행한 최신 연구 사례를 소개하며, 전통 살림살이가 여전히 실험과 응용의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전통의 지혜를 ‘옛것’으로 박제하지 않고, 오늘의 과학과 대화시키려는 태도가 책 전체에 일관되게 흐릅니다.



독자로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살림이 단지 집을 관리하는 노동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와 긴밀히 연결된 지식 활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편리한 도구와 전자제품 속에서 살다 보면 과거의 살림은 비효율적이고 고단했을 것이라 쉽게 단정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안에 담긴 치밀한 판단과 실험정신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섬세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기후, 재료의 성질을 몸으로 체득해 온 경험이야말로, 오늘날 데이터와 이론으로 재해석할 만한 소중한 자산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책을 읽는 내내, ‘살림’과 ‘과학’이 서로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차분하게 스며들었습니다. 과학은 실험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밥을 짓고 장을 담그고 집을 짓는 손길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수행되어 왔다는 관점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줍니다. 덕분에 일상 속 사소한 행위들도 원리와 이유를 가진 의미 있는 선택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앞으로 무언가를 할 때 ‘왜 이런 방식일까’라는 질문을 더 자주 던지게 될 것 같습니다.



총평하자면, ‘살림의 과학’은 전통문화에 대한 향수나 미화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 속 지혜를 차분히 검증하고 재해석하는 시도를 통해 오늘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집과 살림살이를 바라보는 과학자의 시선은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만들고, 동시에 그 낯섦을 통해 새로운 이해와 존중을 끌어냅니다. 책을 덮으며 전통 살림을 단지 과거의 유물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 속에 숨은 과학과 지혜를 현재의 언어로 다시 읽어 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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