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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 융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인생 수업
최광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아이를 낳고 키우며 전업으로 살고 있는 지금, 문득문득 내가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리적으로는 분주하고 감정적으로는 꽉 차 있지만, 그 안에 ‘나’라는 존재는 비워져 있는 듯한 허기를 자주 느낀다.
시간이 주어지면 오히려 어색하고, 혼자만의 공간이 생기면 그게 낯설다.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 이렇게 흔들리고, 왜 어떤 말엔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고, 왜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지도.
그리고 나를 알고 싶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그런 시기에 만난 이 책 《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마치 지금 내 삶을 정면으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중년, 모든 것이 뒤섞이고 다시 쓰이는 시기
저자는 말한다. 중년은 본격적으로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라고.
그동안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방식들이, 이제는 자꾸만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
겉으로는 안정돼 보이지만 속에선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올라오고, 자꾸만 익숙했던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
지금의 나, 40대 초반인 나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이전처럼 삶을 밀어붙일 수 없고, 모든 선택 앞에서 더 많이 망설이게 된다.
자신감이 줄어든 건지, 아니면 정말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건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 속에서 이 책을 만났다.
저자는 융의 말을 빌려 말한다.
인간의 정신은 본래 서로 대립되는 요소들이 충돌하고 협력하는 장이며, 우리는 늘 그 양극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겉으론 당당하지만 속은 여전히 불안하고, 사회적으로는 외향적이지만 내면에선 고요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며, 성취욕과 동시에 ‘그냥 쉬고 싶다’는 회피의 마음도 함께 존재한다.
그 대극들이 충돌할 때 우리는 혼란을 겪는다.
그런데 이 책은 말한다.
그 혼란 속에 바로 ‘진짜 나’가 숨어 있다고.
이 문장이, 내 마음을 다독였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이 시기가 잘못된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걸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혼란이 곧 변화의 신호라는 이 책의 메시지는, 지금의 나에게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내 안의 대극성, 나를 나답게 만들다
융의 ‘대극의 원리’는 인간 이해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내 안의 모순됨이 문제가 아니라 본질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림자가 크면 자아도 크다. 자아가 커지면 그림자도 같이 커진다.”
이 구절은, 내가 강해질수록 그만큼 내 안의 취약함도 함께 커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빛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과 함께 있을 때 균형이 잡힌다.
나에게도 자애롭고 따뜻한 면이 있는 동시에, 냉소적이고 회피하고 싶은 감정이 함께 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양면성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해주었다.
오히려 그것을 껴안고 통합해가는 과정, 즉 대극을 수용하는 삶의 태도야말로 진짜 어른의 태도다.
내 안의 그림자와 대면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을 공부하며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남이 아니라 내 안의 나라는 사실이다.
아이를 키우며 무의식적으로 따라했던 부모의 말투, 억눌린 감정이 튀어나올 때면, 나는 내가 낯설어진다.
그리고 부끄러워진다.
이 책은 그걸 ‘그림자(shadow)’라고 말한다.
억누르고 무시해온 내 감정, 욕망, 상처들.
이제는 그걸 부정하는 대신 마주하고 껴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중년이 되어 그것들과 마주할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짜 성장을 시작한다.
“나는 나의 그림자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안다”는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문제의 원인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융이 말한 아니마(남성 안의 여성성), 아니무스(여성 안의 남성성) 역시 중요한 통찰을 준다.
감정 표현이 익숙지 않은 남성, 지나치게 돌보고 희생하는 여성— 이 모든 것은 한쪽 성향만 과도하게 작동된 결과다.
남성성/여성성의 대극을 조화롭게 수용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중년 이후의 건강한 인간이다.
나 역시 여성으로서 내 안에 있는 단호함과 추진력, 때론 공격성까지도 인정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개성화의 길 위에서, 흔들림은 당연하다
융은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개성화’, 즉 ‘자기 실현’을 말했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내면의 모습(Self)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 길 위에서는 흔들림이 당연하고, 상처는 필연이다.
저자는 말한다. 중년이란, 삶이 처음으로 “나를 기준으로 다시 설계되는 시기”라고.
그 전까지는 타인의 시선, 사회적 성공, 관계의 틀에 갇혀 살아왔다면, 이제는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의 방향을 묻고 선택해야 한다.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특히 강하게 와닿았던 말은 이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고, 그 안에 있는 그림자에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외부를 탓하고 문제를 바꾸려 한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내 안의 무의식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중년이 되어 겪는 삶의 위기, 감정의 충돌, 관계의 단절은 외부의 잘못이 아니라, 이제껏 내가 억눌러왔던 나의 ‘그림자’가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안내서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보다 강한 위로는 없다
《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나 같은 40대 중년 여성에게 단순한 조언을 넘어, 깊은 자기 성찰과 통합의 여정을 제안하는 책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뭔가를 바꾸고 싶다는 충동보다는, 지금의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어지는 마음이 남는다.
늦지 않았다. 이 말이 이토록 따뜻하고 단단하게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나를 꺼내고, 마주하고, 수용하고, 통합해가는 그 길 위에서 이 책은 매우 사적인 동행자가 되어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협찬받아 읽었지만, 내용은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