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쪽 가제본 안에 작가님의 손 글씨 편지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주인공 채령이가 그들과 당당하게 만날 수 있게 응원을 부탁하는 작가님의 글은 더욱 궁금증을 유발했다.
사립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온 엄마는 채령의 손을 잡고 집 밖에 나와 길도 없는 숲속을 달려간다. 신발 신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달린 엄마와 채령은 맨발이다. 솔방울과 나뭇가지에 찔린 발바닥이 아파 입을 열었다가 채령은 얼핏 본 숲속에서 무언가 따라오고 있는 것을 봤다.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차갑고 섬뜩했다. 형체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가제본 8쪽)
엄마는 채령의 왼팔에 빨강 파랑 노랑 삼색 실로 된 팔찌를 묶어 주신다. '그것은 엄마가 단 한 번도 팔에서 풀어 본 적이 없는 팔찌였다.'(가제본 9쪽) 채령는 엄마가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다.
"이게 너를 지켜 줄 거야. 그리고 이제부터 넌 엄마가 느끼는 것, 엄마가 볼 수 있는 것을 빠짐없이 다 느끼고 볼 수 있을거야. 엄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고통스럽고 힘들 거야. 그래서 네가 엄마와 같은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랐어. 하지만 이젠... 그래, 넌 잘해 낼 거야.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엄마가 지금까지 했던 말, 네가 등 뒤에서 지켜본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 봐. 엄마는 널 믿어!"(가제본 9~10쪽)
그리고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멀리서 '기괴한 소리만 사방에서 들려왔다.'(가제본 11쪽) 그렇게 채령은 엄마와 헤어졌다. 혼자서 며칠을 멍하니 있었는지 모른다. 이모란 분이 오셔서 채령의 손을 꽉 잡더니 경성역까지 데리고 왔다. 경성역에서 이모는 자주 두리번 거렸고 채령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따금 무언가 보았다. '그것은 물을 잔뜩 머금은 붓으로 얼추 윤곽만 그린 듯한 모습이었는데,'(가제본 13쪽) 이모가 긴장한 표정으로 "너도 느끼고 있지? 누군가 우리를 쫓고 있어. 도대체 네 엄마는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가제본 14쪽)
이모는 대합실을 한 바퀴 돌더니 구두닦이 소년과 일부러 부딪쳤다. 구두닦이 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엎어졌고 그것을 주려고 이모는 앉으면서 구두닦이에게 돈을 주면서 채령이를 '천변풍경'까지 데려다주라고 부탁한다.
이모는 뒷머리에 묶었던 머리끈을 풀어 채령 머리에 묶어 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풀지 마라고 말한다. 이모가 나가자 소녀은 숫자 열까지 세고 채령이 손을 잡고 대합실을 빠져나온다. 밖에 나오니 아까처럼 '차갑고 섬뜩한 것'의 움직임은 없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것 한둘이 언뜻언뜻 눈에 띄었다.'(가제본 17쪽)
함께 가던 둘은 소년을 부르는 소리에 멈췄다. 소년의 이름은 단아다. 단아는 급한 일이 있다면서 채령에게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뛰어갔다. 할 수 없이 채령은 혼자 가다가 다리 위에서 악귀를 본다. 그리고 악귀가 하는 말이 들린다. 중년 신사가 다가와서 안부를 묻는다. 처음에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투었는데, 목소리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이신귀. 중년 신사가 채령의 목덜미를 죄어 왔다. 빠져나올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소용이 없다고 느낄때 '채령의 팔목에 있던 팔찌의 파란색 실이 툭 끊어졌다.'(가제본 31쪽)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가 채령 입에서 나왔다.
"그 피 묻은 손 치우지 못해? 죄 없는 조선 사람들 데려다가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네 어미가 죽은 게 왜 그들 탓이야?(중략) 그렇게 죄를 지었으면 네가 살던 간토에서 쥐 죽은 듯이 있을 일이지 어찌 조선 땅까지 건너온 것이야?"(가제본 31쪽)
그리고 채령은 중년 신사의 몸을 세게 밀쳤다. 아니 채령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 조종이라도 하듯이 채령이 움직였다. 채령이 도망치다가 다시 잡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때 누군가 채령의 귀에 속삭인다. '왼손을 써! 내 몸속의 온 기운을 끌어오는거야.'(가제본 34쪽)
채령은 손바닥을 펼쳐서 중년 신사의 가슴을 밀었다. 꽤 큰 힘을 받은 남자는 뒤로 밀려났고 채령의 손바닥에 새 문양이 보였다. 그 새 문양은 엄마 어깨에 있던 새 모습과 비슷하다. 채령이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남자가 일어나서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다시 채령에게 다가오는데, 그때 골목 담장에서 새까만 그림자 여럿이 후드득 뛰어 나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고양이였다.!
채령은 이 모든 일이 꿈만 같다. 채령의 손을 보고 이모가 하는 말은 아직도 꿈속 같다. 누군가에게 채령이 손이 닿으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오래 간직했던 물건을 만져도 과거를 읽을 수 있단다. 왜 엄마는 이런 능력을 채령이에게 줬을까.
처음 보는 서양의 신부가 엄마를 찾으면서 엄마 이름을 말한다. 신부는 열흘전에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단아도 얼마전에 사라진 아이를 찾지 않으면 짝발 형한테 엄청 혼난다고 한다. 단아는 요즘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낮에 아저씨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 예전에도 그랬다잖소. 재작년인가? 호열자가 한창 유행할 때 백신인가 뭔가를 개발한다고 고타니 병원에서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는 애들을 잡아갔다며?"(가제본 53쪽),
"저렇게 구걸하고 다니는 아이들 중 하나 잡아간다고 티도 안 날테니, 이게 모두 식민지 조선의 비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가제본 54쪽)
채령은 단아가 준 작고 동그란 구슬을 뀌어 만든 장신구를 받았을 때 '그때 알 수 없는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작은 아이가 키 큰 어른에게 마지못해 끌려가는 모습이다. '(가제본 50쪽)이모가 말한 '독' 능력인가보다. 위험함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떴다. 그때 방향이 동쪽으로 느껴졌다.
단아가 말하는 래호의 생김새와 채령이가 독으로 본 아이는 같았다. 서양 신부를 본 순간 찾는 아이가 래호인 것을 알았다. '조선인 아이를 외국인 신부가, 그리고 단아가 동시에 찾고 있었다.'(가제본 65쪽) 모든 일이 채령에게 다가오고 있다. 마치 해결하라는 듯이.
채령은 무언가에 이끌러 간 버드나무 밑애서 래호 단추를 발견했다.채령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흐르는 쪽으로 걸어갔다. 판잣집 사이에 있는 초가집 앞에서 또 하나의 단추를 발견했다. '만약 래호가 일부러 단추를 하나씩 뜯어서 흘렀다면'(가제본 84쪽)
사라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자신의 느낌이 이끄는 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채령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제 강점기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판타지 이야기가 기대된다.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영화를 보는 듯 그려진다. 영화로 만들어도 볼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