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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말의 숲을 거닐다 - 다채로운 말로 엮은, 어휘 산책집
권정희 지음 / 리프레시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저자가 강조하는 ‘다채로운 말하기’의 힘이 실제 삶 속에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책의 앞부분에서 소개되는 ‘는개’라는 단어처럼, 알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 자체가 달라지는 어휘들이 많았습니다.
이 단어는 이슬비와 안개의 중간 같은 비를 뜻하는데, 저는 그동안 그런 비를 표현할 말이 없어 늘 어색하게 설명하곤 했습니다.
‘는개’라는 표현 하나를 알게 되는 순간, 같은 장면도 훨씬 생생하게 떠올랐고 제 말도 조금 더 섬세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적바림’처럼 이미 익숙한 영어식 표현을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을 발견했을 때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울림이 제 말하기 습관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그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나는지를 짧은 일화와 함께 보여줍니다. 독자로서도 그 말의 쓰임새를 자연스럽게 상상해보게 되고, 다음 대화에서 직접 써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어요.
책에서 제시하는 질문들처럼 “당신은 어떤 말로 하루를 채우고 있나요?”, “지금의 감정을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라는 생각을 하며 읽다 보면, 자연스레 나만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게 됩니다.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일상 속에서 지나치는 순간들이 사실은 더 아름답게 포착될 수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였습니다.
‘켯속’처럼 일이 되어가는 속사정을 뜻하는 단어는 누군가의 상황을 섣불리 판단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막을 알지 못한 채 속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하며, 누군가의 사정을 조금 더 기다려주고 듣게 되는 태도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두망찰’이라는 표현은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얼어붙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는데, 이 말이 주는 리듬감과 장면성이 그런 순간들을 유머 있게 바라보게 해 주었어요.
저자는 이러한 어휘들을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예시와 짧은 대화, 스스로의 경험을 빌려 풀어냅니다.
삶의 장면들은 조용히 흘러가지만, 그 안의 감정은 생각보다 세밀하고 다층적입니다. 이 책은 그런 감정의 미세한 결을 표현해줄 단어를 건네주며, 일상에 조금 더 따뜻한 언어를 불어넣어 줍니다. 일상에서 바로 써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실용적 장점이었어요.
저자는 말의 깊이를 ‘관계의 태도’로 바라보는 시선을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의 기준을 남에게 칭찬받는 능력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더 정확하고 따뜻하게 전달하려는 의지로 본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받았어요.

언어가 사람을 규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용히 좁혀주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습니다.
책의 여러 단어들 예를 들어 ‘수굿하다’처럼 고개를 조금 숙인 듯한 태도를 표현하는 말은 새로운 어휘의 발견을 넘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고개를 미세하게 숙이고 마음속 말을 망설이는 사람을 볼 때, 이제 그를 ‘수굿하다’라고 표현하며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언어에 담긴 차별과 편견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보여주는데, 장애를 비하하거나 직업을 낮춰 부르는 말을 바꾸자는 그의 제안은 말하기의 품격이 타인을 향한 존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단어 하나에도 세계관이 담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말의 숲을 거닐듯 언어습관을 천천히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실제로 몇 가지 단어를 생활 속에서 의식적으로 사용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먼저 손에 잡힌 말은 ‘적바림’이었어요. 그날그날 떠오르는 생각과 작업 아이디어를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곤 했는데, 이 단어를 알고 난 후부터는 ‘메모해야지’라는 말 대신 ‘오늘 적바림 좀 해둬야겠다’라는 표현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단어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조금 더 나를 위한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왜 이렇게 복잡하지?”라고 투덜거리곤 했던 저는 ‘잡박하다’라는 표현을 떠올리며 복잡함을 조금 더 차분하게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중 한두 가지를 먼저 정리해보자는 저자의 제안은 하루를 훨씬 덜 혼란스럽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무리
읽고 느낀 것은 ‘말을 바꾸면 삶이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겠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말이 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주는 책이었어요.
언어는 남을 설득하기 위한 기술보다 자신의 마음을 진심으로 전달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