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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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어렵고 딱딱한 얘기를 할 것만 같은 직업 가운데 하나가 평론가가 아닐까 싶다. 종종 '벙커1' 팟캐스트를 통해 들었던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53)은 그러나 재미있고 흥미롭게 음악 얘기를 할줄 아는 보기 드문 사람이다. 인디영화제작에도 참여하고 많은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면서 다양한 삶을 (자칭)악착같이 살아와선지도 모르겠다. 과음으로 술병을 얻어 요양하면서 공부했다는 와인, 명리학에 대해서도 팟캐스트 강의를 하는 등, 문화예술과 역사에도 두루 밝은 해박한 지식에 재주많은 저자는 자(字)가 ‘산만’이고 호(號)는 ‘의박’(의지박약)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책 표지도 저자를 닮아 엉뚱한 색상에 산만한 글자들로 덮여있는 이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저자가 많은 강의를 해오면서 처음으로 쓴 책이다. 출판사 대신 저자가 직접 지었다는 책의 제목이 새삼스럽고 새롭다. 더 이상 삶에 전복과 반전이 불가능한 '헬조선'이라 자조적으로 불리는 신산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생생한 강의를 모아 쓴책이라 문체가 대단히 직설적이고 감각적이다. 음악 평론책이 무색하게 잘 읽힌다. 한국과 서양음악의 결정적 순간들을 특유의 입담과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음악을 공부해야 한다'거나 '음악에 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는 강박에서 자유롭게 느껴지는 책이다.

강헌이 뽑은 음악사의 결정적 순간들은, 재즈와 로큰롤이 등장했던 시기와 한국에 통기타 음악과 밴드 음악이 등장했던 시기, 그리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활동했던 시기, <사의 찬미>와 <목포의 눈물>이 불려졌던 시기에 주목하며 이 순간을 대표적인 전복과 반전의 순간으로 꼽았다.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주석에는 또 하나의 정보가 풍부하게 담겨있다. 요즘은 주석이 많이 달리는 책이 별로 없다. 주석을 풍성하게 달아서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보를 알고 싶은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 저자가 한국 최고의 앨범재킷으로 꼽은 한대수 2집 앨범 


# 시대라는 악보위에 그려진 음표, 음악

수많은 예술중에서 음악만큼 신비화의 추앙을 받은 예술도 없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또한 시행착오의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역사적 생산물 중의 하나일뿐이다 - 본문 가운데 

도발적인 책 제목처럼 음악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들에 대한 전복과 반전의 사유를 시도한 점이 새롭고 신선하다. 예컨대 재즈가 노예의 삶을 살아온 흑인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재즈 음악을 만들어낸 이들 다수가 백인이며, 미국 재즈를 대표하는 루이 암스트롱이 성공한 이면에 백인들의 지배 전략에 순응했던 이력이 자리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10대들이 키운 '로큰롤', 한국에서의 트로트 혁명과 포크음악의 발흥,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위대함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 또한 전복과 반전의 사유를 거쳐 재해석된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저절로 음악을 통해 시대를 읽고 느낄 수 있게 되며, 시대에 비추어 음악을 다르게 듣게 된다. 

저자는 사회와 음악을 참신한 시선으로 꿴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동 모차르트와 악성 베트벤'도 마찬가지다. 모차르트는 궁정에서 권력가들에게 아부하면서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모짜르트가 살던 시대엔 귀족이나 궁정의 후원 없이 음악가로서 독립적인 삶을 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베토벤이 살던 시대는 달랐다. 공화주의자가 유럽 전체를 휩쓸었다. 베토벤은 공개 연주회와 악보 출판을 통해 당시 유럽의 중심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자유롭게 표현하며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첫번째 예술인이었다. 예술가의 업적은 태어난 재능이나 개인의 노력 여부만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씨줄 날줄처럼 엮여있다. 

역사에서의 영웅주의 못지않게 우리는 예술분야의 천재주의 사관에 익숙하다. 익히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가들은 보통 사람과 다르고, 특별한 재능과 소명을 하늘로부터 부여받고 태어났다는 식으로 배웠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정규직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나 이루지 못했다. 베일 속에 감춰진 예술가의 신비화를 벗기고 민낯을 들여다볼 때 음악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 단순히 객석에서 동경의 시선을 가지고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음악 역시 많은 약점을 가진 인간이 몸부림치며 피와 땀으로 만든 노동의 생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인식 속에서 음악은 더 진실 되게 들리지 싶다.


▲ 반성의 의미로 다소곳이 앨범을 만들었지만, 끝까지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은 신중현


신중현은 박정희에게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뮤지션이다. 이유는 너무도 약소했다. 박정희가 일제시대 총독부가 행했던 선동 가요를 본받아 정권 선전을 위해 자신이 직접 노래를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려고 신중현에게 의뢰했는데 신중현이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중현은 그 뒤 '대마초 사범 연예인 1호'가 되어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탄압을 받는데 한 마디로 '괘씸죄'였다. 원래 우리나라는 그 때까지 대마초 흡연이 금지되지 않았다. 

박정희의 '복수혈전'으로 비로소 범죄가 된 것이다. 박정희 시절에 이루어졌던 노래 검열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세상에나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가 금지곡이었고 그 이유가 '근로 의욕 저하~'라니. 과연 창조 경제의 전통은 거기서 시작되었나 보다. 검열의 이유들이 참 창조적이다. 하지만 '아침이슬'은 금지된 이유조차 없이 금지되었다. 한 마디로 묻지마 금지곡이었다 - 본문 가운데 

'전복과 반전'은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강헌은 그 기점을 1969년 9월19일로 본다. 남산 드라마센터(옛 서울예전)에서 한 장발 청년이 자신이 만든 톱과 징 등 이상한 악기들을 펼쳐놓고 혼자서 노래를 부른 날이다. 이 청년이 한대수다.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출현한 첫 싱어송라이터였다. 한대수 공연 닷새 전인 9월14일 대한민국 국회는 3선개헌을 의결하고 박정희 독재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문화 학살을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희생양이 한대수와 신중현이었다.

'청년문화의 기수'한대수의 등장과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나란히 둠으로써 이후 11년 동안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불행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것. 단순히 군부 독재와 민주주의의 항쟁이 아닌 기성세대 또는 기득권에 대항하는 젊은이들의 투쟁의 역사로 정의한다. 

▲ 박정희 정권시절 유일하게 이유없이 금지된 명곡 '아침이슬'



# 우리에게 모차르트, 베토벤같은 작곡가가 없는 이유 

무엇보다 그의 책을 읽으며 평소에 품었던 한가지 의문을 풀게되어 좋았다. 반만년 역사의 우리나라에도 음악가가 많았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작품이 많지 않다. 19세기 이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곡가는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 서양의 경우 우리보다 인구가 그리 많지도 않은 국가에서도 수많은 작곡가를 찾을 수 있다. 왜일까? 저자에 의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에서은 아무리 음악을 잘해봐도 신분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음악가들은 사농공상에도 못 들어가는 양천조차 되지 않는 천민이었다. 극히 일부의 시기를 제외하면 아무리 국가에 공훈을 세워도 양민이 될 수 없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 궁내외의 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가들은 악공(樂工) 내지는 악생(樂生)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천민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천민이고 그 자식들도 천민이 되었다. - 본문 가운데 

비슷한 처지로 떠오르는 예술가가 도자기를 빚는 도공이다. 일본에선 국보로 대접할 만큼 훌륭한 기술을 가졌으나 사회적 대우가 열악하다보니 도공과 함께 우리의 훌륭한 도자기 문화는 서서히 몰락해갔다.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가 중간계급이었던 서양에서 음악가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즉 현세에 인기를 얻어야 했다. 죽고 난 뒤의 성공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서양음악은 철저하게 경쟁을 통해서 승리를 거두는 욕망을 탑재하게 된다. 만약에 서양의 음악가가 어떻게 해도 계속 하층계급이었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귀족이었다면, 음악을 가지고 세속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서 다툴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자신은 안 되고, 어떻게 해도 자신은 늘 되는데 굳이 다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중간계급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속물적인 성취동기를 끊임없이 부여한다. 저자는 이것이 서양음악이 갖고 있는 경쟁력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 강헌은 수년 째 아이돌 음악이 판치고 있는 한국의 대중음악을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책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음악에는 다양한 얼굴이 들어있다. 상품으로서 많이 팔리고 싶은 욕망과 뭔가 창조적인 가치를 가지고 싶어 하는 예술적 속성이 들어있다. 혹은 사회적 발원이기 때문에 뭔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욕구도 들어있다. 상품적 요소, 예술적 요소, 사회적 요소가 모여서 대중음악이 만들어진다. 대중음악적으로 가장 훌륭하고 풍요로운 시대는 위 세 가지 요소가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출 때였다. 

1960년대 미국이나 1980년대 한국이 그랬다. 상품적으로 굉장히 훌륭하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창조성을 가진 음악가들이 있었고, 굉장히 사회적인 의식을 가진 음악도 많이 나왔다. 무척이나 다양하게 공존했다. 지금은 K-POP이 한류를 타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고 있지만, 오로지 상품으로서의 음악만 독주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소수 엔터테인먼트가 모든 걸 다 가지는, 승자 독식의 시대라는 점에서 굉장히 불행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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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는 나무
장세이 글.사진 / 목수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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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한옥들이 모여 있는 서울 가회동 혹은 북촌에 가면 이웃동네인 재동에 꼭 들리게 된다. 수백 년 묵은 고목 소나무 그것도 흰 소나무를 보기 위해서다. 헌재(헌법재판소)가 들어선 재동은 예전에 잿골이라 불렸다.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많은 이를 죽여 온 동네가 피바다가 되자 이를 덮으려 재를 뿌렸다고 잿골이 되었다고.

 

동네 이름만큼이나 호기심과 시선을 끄는 존재가 흰 소나무 '백송(白松)'이다. 잎은 여느 소나무처럼 푸르지만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남은 자리의 줄기가 하얘 백송이라 부른다. 중국 사신을 따라왔다가 홀로 남은 지 600년이나 되었다. 흰빛을 좋아하는 한민족은 백송을 귀히 여겨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 책 <서울사는 나무>는 이렇게 600년 고도(古都) 서울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듯 공존하고 있는 나무들 이야기다. 희귀한 백송처럼 대접받고 사는 노거수(老巨樹: 오래되고 큰 나무) 가 있는가 하면, 잘못된 이름에 편견까지 지고 사는 아까시 나무, 냄새가 난다며 뿌리째 뽑혀버린 은행나무 등 사람들만큼이나 나무들도 서울살이가 녹록치 않다.

 

서울의 흔한 길과 그 길이 지나는 동네에 사는 비술나무·양버즘나무, 서울을 숨 쉬게 하는 크고 작은 공원에 사는 가죽나무·귀룽나무,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역사성과 균형감을 선사하는 조선의 궁궐에 사는 느티나무·회화나무 등 서른두 그루의 나무들이 풍부한 사진들과 함께 나온다. 한 도시에 살면서도 모르며 살았던 나무들에 대해 알게 되는 기쁨도 있지만, 어찌하여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살게 되었는지 연유를 되짚으며 자연스레 나무가 살아가는 길과 공원, 궁궐의 내력을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서울 나무여행이라는 색다른 나들이를 하게 하는 좋은 여행서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재동 사는 흰 소나무 '백송']


세상에 나쁜 사람은 많지만 나쁜 나무는 없다

 

사람은 가진 것 없다고, 인물이 못하다며 다른 사람 얕잡아 보듯이 아까시 나무가 뿌리를 넓게 퍼뜨린다고, 은행나무 열매 냄새가 지독하다고 '나쁜 나무'라 부르며 멸시하지만, 나무는 제게 든 모든 생명을 순순히 보듬어준다. 나무의 생에 비추어 사람의 생을 바라보라. 햇빛과 물과 공기만으로 푸르고 높이 자라는 나무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모하며 헛된 것을 내놓는지 말이다 - 본문 가운데

 

오르기 쉬운데다 수목이 울창해 산책삼아 자주 찾아가는 서대문구 안산은 본래 모래흙과 바위로 된 척박한 토질의 산이다. 이 산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 흔히 아카시아 나무라고 부르는 아까시 나무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이 나무는 안산공원의 푸른 오늘을 만들었다. 아까시 나무는 아까시아 나무의 바른 말로 영어로도 아카시아 나무가 아니라는 뜻에서 'False Acasia'라고 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카시아 나무라고 고집스레 부르는 한국인에게 아까시 나무는 오만 것을 내주었다. 척박한 산지에 뿌리내려 녹음을 선사했고 더러운 공기를 걸러주었다. 그래 봐야 "아, 가시가 많아 아까시구나" 소리나 듣는데도 오늘도 거친 땅에서 뿌리를 넓혀갈 뿐이다.

 

이렇게 아까시 나무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아까시 나무의 뿌리처럼 끈질기다. 다른 나무를 못자라게 한다, 조상의 관 뚜껑을 움켜쥐고 있다, 없애도 없애도 되살아난다더라 등 아까시 나무는 저만 살고자 하는 '나쁜 나무'라 여겨졌다. 단내가 강한 꽃향기조차 지린내 같다고 욕을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이 땅에 들어온 아까시나무는 토질을 가리지 않고 잘 자라는 성질 덕에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사방조림(황폐한 산지에 나무를 심어 토양을 보존하고 지력을 유지)을 위해 대거 심어졌다. 이후 유해수종이라는 깊은 오해를 받아 결국 조림 중단, 땔감용 벌채 등의 형벌로 이어졌다. 아까시 나무는 이렇게 마구잡이로 심어지고 무참하게 베어지다가 21세기가 되어서야 아까시 나무의 여러 효용이 알려지면서 또 다시 숲이 만들어지고 있다.


[서대문독립공원 사형장 안팎에 심어진 두 그루 양버들 나무]


사람살이와 함께하는 나무살이

 

거대하나 부박한 도시, 서울에서 나무는 이렇게 생명이기보다는 물체에 가깝다. 간판 가린다, 그늘 드리운다, 낙엽 많이 진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가지치기를 당하고 댕강 베어진다. 툭하면 손발이 잘리고 여차하면 참수 당한다 - 본문 가운데

 

서울에서 대부분의 나무는 고장난 전봇대 비슷한 취급을 받곤 한다. 특히 길가에 선 나무의 운명은 더 가혹하다. 매연에 온 줄기가 새카매지고, 종일 소음에 시달리며, 밤이 내려도 환한 가로등과 간판 불빛에 잠들지 못한다. 겨울이면 꼬마전구에 칭칭 감긴 채 "따뜻하지?"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은 나무가 주는 무한한 은혜를 받으면서도 떨어진 꽃과 잎과 열매를 쓸어 모아 일반쓰레기로 분류할 뿐이다.

 

서울에 사는 나무가 처한 각박한 현실은 곧 서울에 사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번다한 도심에서 생존하는 일은 나무나 사람이나 고되고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지 싶다. 사람은 입이 있어 하소연이라도 하고 다리가 있어 달아나기라도 하건만, 나무는 그 모두를 고요히 받아들여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릴 뿐이다. 나무가 인간보다 위대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무너져가는 인간성이 다소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책속 곳곳에 담겨있다. 

[경복궁에 사는 노거수 은행나무]


저자는 나무를 생명이라기보다 물체로 대하는 도시인들의 무신경한 태도도 돌아보게 해준다. 가혹한 환경에서도 어김없이 새순을 튀우고,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퍼뜨리고, 잎을 키워 그늘을 넓히는 나무의 아름답고 위대한 생명력에 주목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숲 해설가인 글쓴이 장세이씨는 '식물인간' 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단다. 나무의 신진대사가 역동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의 편견이라면서, "당신이 살아 있듯, 나무도 살아 있다"고 강조한다.

 

서대문형무소가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에 사는 '통곡의 미루나무'도 마음을 붙든다.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사형장을 만들 때 함께 심었단다. 이 나무는 무슨 죄목으로 사람들이 지척에서 죽어가는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나무의 운명이 가혹하기도 하다. 저자에 의하면 미류나무로 알고 있는 이 나무는 사실 버드나무과의 양버들이란다. 미국에서 건너온 버드나무인 미류나무는 요즘엔 종적을 찾기 어렵다고.

 

책속에 여행지도 같은 부록이 들어있다. 때죽나무, 참빗살나무, 가죽나무, 벚나무, 귀룽나무, 산수리나무, 아까시나무…. 서울 종로구 삼청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빽빽하게 도열한 40여종 1000여 그루의 수종(樹種)과 위치를 남김없이 담아낸 '나무 지도'가 그것. 삼청동은 많이 찾지만, 삼청공원까지 오는 사람은 드물다. 삼청동에서 쇼핑이나 관광만 하지 말고, 이 지도를 들고 다니며 나무들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알아간다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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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식당 -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老鋪 기행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중앙M&B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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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서울 남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종종 들르는 빵집이 있다. '과자 중의 과자, 태극당'이라는 간판에서부터 오래된 제과점의 분위기가 솔솔 풍기는 곳이다. 해방 이전 일본인 제과점에서 일했던 창업주는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제과점 주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두고 간 장비를 받아 빵집 간판을 내걸었다. 70년이나 된 가게다. 


어린 시절 푹 빠졌던 '사라다빵','카스텔라' 등을 옛 모양과 맛 그대로 먹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이모·삼촌이라고 부르고 싶은 오래된 직원들이 많다는 것도 이 빵집의 또 다른 특징이자 미덕이다. 그만큼 '사람대접'을 해주는구나 싶어서다.  


잡지사 기자를 하다가 돌연 '요리 유학'을 떠난 후 요리사가 된 저자 박찬일은 이 책 <백년식당>에서 이런 가게를 노포(늙을老, 가게 鋪)라 칭한다. 


식당에 사람처럼 늙었다는 표현을 하다니. 사실 오래된 식당은 고목처럼 정겨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은 점포이니 인간 대접을 해도 되겠구나 생각한다. 빵집에서 냉면집, 갈비집, 국밥집까지 18개의 노포들이 등장한다. 인간미 느껴지는 노포들, 음식, 사람들 이야기에 빠져 하나씩 찾아가고 싶은 좋은 여행서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우직한 노포의 맛

"어머니에게 배운 그대로 합니더. 그래야 맛이 나지예. 뭘 더 맛있게 넣어볼까, 이런 생각은 안 합니더. 그라모 손님들이 '옛날 맛'이 아이라꼬 하겠지예. 그지예?"(부산 할매국밥 편 가운데)

이 책 제목처럼 100년이나 되진 않았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노포가 있지 않을까 한다. 자전거 타다가 들르는 빵집 '태극당', 대림시장 감자탕집, 행주산성 원조 국숫집 등은 나만의 노포다. 이 '늙은 가게'들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한 가지로 좁혀진다. 

모두 단순하고 우직한 맛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세와 유행, 트렌드를 좇고 따르기 좋아하는 나라에서 이런 미덕을 유지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시대와 유행에 뒤처진다는 초조함에 많은 식당들이 요즘 잘 팔리는 새로운 음식, 신상 메뉴로 바꾸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위 부산 할매국밥 집 '아지매'의 말처럼 노포들이 옛 맛을 고집하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래야 맛이 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맛있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한다. 아마 이것은 국내외 노포 어디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십몇 대를 잇는 일본 식당의 후계자들은 대개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어떻게 하면 선대와 '똑같은' 음식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온 힘을 쏟겠습니다."

진하고 얼큰한 보통의 해장국들과 달리 전남 나주의 명물 해장국 '곰탕'은 국물이 맑으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설렁탕과 함께 수백 년 전의 맛이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단순하고 우직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 그것은 감칠맛 나는 비법육수나 식욕을 돋우는 맵고 빨간 양념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신용 있는 거래처와 오랜 관계를 맺으며 받아오는 신선한 식재료와 주인장의 믿기 힘든 부지런함에서 비롯된다. 

책 속 노포들 대부분의 주인장들은 새벽같이 나와 밤 늦도록 주방에서 일한다. 놀랍게도 명절에만 쉬는 가게들도 많다. 직원은 돌아가며 쉬어도 주인은 뼈가 부서져라 일한다. 농경민족 특유의 근면함은 농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노포의 음식은 자극적인 맛이 거의 없고, 재료의 순수한 맛, 씹는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냉면의 원조라 할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을 때 심심하고 밍밍한 맛만 느껴져 음식이 잘못 나온 줄 알고 직원을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 맛이 없죠? 그게 냉면이에요. 하하!"

나이 지긋한 직원 아저씨에게서 무슨 선문답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그 후 몇 번의 여름이 더 지나서야 의도한 듯 의도하지 않은 무위의 예술 같은, 무미의 냉면 맛을 겨우 즐기게 됐다. 김치도 원래는 맵기만한 빨간색이 아니었단다. 1980년대 컬러 TV가 보급되면서 시각에 자극을 주고 식욕을 돋우는 강렬한 빨간 양념을 하게 된 거라고 얼마 전 부천시 원미동에 많이 있는 '뼈다귀 해장국'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맛의 비결이 궁금해 2대 주인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뼈다귀 해장국 맛의 비결이요? 돼지 뼈를 잘 세척하고 삶는 게 기본이에요. 요즘엔 돼지 냄새를 없앤다고 한약재를 넣기도 하는데 한약은 달여 먹어야죠. 정성 들여 돼지 뼈를 세척하고 또 세척합니다. 그게 비결이지요." 

노포라고 하면 왠지 허름하고 오래된 식당만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맛있어서 오래 이어진 식당이 노포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 살아남는 이유는 그 식당 음식이 맛있어서다.  

우리에게 '백년 식당'이 없는 이유
 

 



▲  70년 된 빵집 태극당. 우리에게 백년식당이 없는 역사의 사연을 품고있다.



호기심을 유발하고 책을 고르게 했던 제목처럼 100년이 된 식당은 아쉽게도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웃한 일본처럼 대를 이어 가업을 지켜온 곳을 찾기 쉽지 않다. 왜 우리나라에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노포가 없는 걸까? 

한국은 30년만 돼도 노포 축에 들고, 50년 넘은 식당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특히 서울 종로 피맛골 일대가 헐리면서 노포의 기준에 들 만한 여러 식당들이 사라진 일은 참 안타깝다. 구시가의 역사가 사라질 때, 우리 사회사도 함께 역사의 뒷길로 흔적도 없이 매몰된다는 아픈 교훈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다행히 요즘은 식당의 역사가 중요해졌는지, 길을 걷다가 'since 19XX'이라고 써놓은 간판을 종종 보게 된다. 어떤 식당은 간판에 자랑스럽게 'since 20XX'이라고 써놓고 있어 실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역사 있는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개개 식당의 역사가 짧은 나라도 없단다. 금방 뜨거워지고 식는다는 우리의 '냄비기질' 때문일까? 그 이유는 서두의 빵집 태극당의 창업 이야기에서 보듯 우리의 고단한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공간의 좌충우돌, 끔찍한 전쟁과 그 후유증, 그리고 이승만 정권과 4·19 민주 혁명에 이어지는 쿠데타, 산업화와 부동산 투기 광풍... 이런 와중에 업력을 쌓아갈 식당은 스스로 무너지거나 돈 되는 다른 일을 하게 되고, 그 역사의 단절을 가져왔다. 어떤 식당도 이 100년의 세월을 차분하게 보낼 상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본문 중에서)

특히 전쟁과 피란 통에 살 길이 막막해 가업을 이어받는 게 녹록치 않았을 거다. 그래서 책 속 노포의 역사는 전쟁 이후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노포의 주인장 누구나 고질병이 생길 정도로 식당일이 중노동에 가까운 데다, 요즘과 달리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환경이 백년 식당의 어려움을 더했다. 과거 식당 일은 천하고 힘들어서,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 적었던 것.    

그럼에도 여기 소개된 식당들을 가보지 않으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 것 같다. TV에 흔히 나오는 맛집 방송들처럼 음식과 비밀 레시피, 맛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시간 여행자처럼 시간과 공간을 지켜온 맛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하나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그 삶 속에 애틋함과 감동이 절절히 스며들어 있다. 
 

볼 일이 있어 부산에 갔다가 책에 소개된 영도의 어묵집에 찾아갔다. 1953년에 창업, 현재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부산에서 만들지 않아도 부산어묵이라고 이름이 붙을 정도로 유명한 부산어묵. 역시나 생선살의 고유한 풍미가 물씬 느껴졌다. 어묵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단순하고 우직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http://sunnyk21.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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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언어 - 나는 왜 찍는가
이상엽 글.사진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취미로 사진을 찍으며 사진 잡지나 모니터로 남들이 찍은 사진들을 감상하다 보니, 같은 카메라로 찍어도 사진에는 찍는 이 혹은 사진가에 따라 여러 종류의 사진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흡사 소설처럼 이야기가 읽혀지는 사진, 한 편의 수필 같은 짧고 굵은 메시지의 사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사진 등··· 이외에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사진, 우리시대의 거울 같은 사진이 있는데 바로 다큐멘터리 사진이다.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에만 묶이지 않고 진정성이 담긴 기록에 충실할 때 다큐멘터리 사진은 감동과 공감을 얻는다. 그리고 사진의 예술성은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형성된다. 모든 예술이 인간의 삶과 유리되어서는 별 의미가 없지만, 특히 인간과 그 삶의 기록에서 벗어나서는 의미를 얻기 어려운 게 사진일 게다.

 

이 책 <최후의 언어-나는 왜 찍는가>는 포토저널리스트이자 우리 시대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이상엽이 찍은 100여 컷의 필름사진과 함께 저자의 단상이 담긴 포토 에세이다. 사진으로 현실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이에 의미를 부여하며 최후의 언어인 사진으로 시대의 증언이 되고자 하는 다큐 사진가가 찍고 쓴 책이다 보니, 숙명적으로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사진집이기도 하다.

 

제주 구럼비 해변엔 해군기지 공사장을 따라 서귀포를 향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을 세운 이스라엘을 욕하다가 우리 땅에서 이런 풍경을 본다 - 본문 가운데

 

진도 팽목항과 제주 강정마을,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말고도 연평도, 백령도와 새만금에서 해외인 중국 동북성과 동부 연안도시, 실크로드까지…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파괴되어 가는 산과 강, 팍팍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특히 비가 오는 제주도의 남쪽 강정마을을 찾아 제주가 동북아 분쟁의 전초기지가 될지 평화의 섬으로 남을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라는 저자의 일갈은 독자의 허를 찌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연의 경치들을 무참히 짓밟는 모습들은 곧 '우리'가 자행하고 있는 우리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보통 사람들이 그들더러 개발과 성장의 선봉이 되어달라고 열렬한 얼굴들로 의탁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소득이 높다는 울산 그것도 현대자동차 공장 앞에서 비정규직 차별 반대를 하는 노동자 2명이 올라가 농성을 하는 높이 45m의 송전탑 사진은 전기가 온 듯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2명(천의봉, 최병승씨)은 이 철탑에서 자그마치 296일간 농성을 벌였다고 하니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정규직 직원들과 똑같이 일을 하고도 말도 안 되는 차별과 대우를 받아야 하는 그 억울함이 얼마나 큰 건지 알 것 같았다. 수많은 방송매체와 언론의 보도보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마주하는 진실은 강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카메라가 삶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더불어 이 책은 과거의 유물이라고 여겼던 흑백사진의 묘한 매력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 각 분야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물사진에서 실크로드 각 나라의 풍경사진까지… 칼라색감을 배제한 흑백사진은 뭔가 본질적이면서도 직관적인 힘을 지녔다. 풍경사진도 그렇고 특히나 사람이 꽉 차게 들어간 사진은 그 사람의 겉모습보다는 표정 속에 숨은 내면에 대해 잠시 생각에 빠지게 한다. 풍경은 풍경대로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느끼게 되고. 디지털 카메라에 흑백사진기능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사진집이기도 하다.

 

현재 진행형인 전범기업 니콘

 

카메라는 사고하지 못한다. 사고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한다. 하지만 어떤 카메라가 어떤 히스토리를 갖고 내 품에 들어와 사진을 찍어 주고 있는가 하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다 - 본문 가운데

 

니콘(Nikon) FA, 미놀타(Minolta) CLE, 캐논(canon) 뉴 F-1, 펜탁스 LX, 라이카플렉스(Leicaflex) SL2, 자이스 이콘, 라이카 M4-P, 올림푸스(OLYMPUS) OM4TI, 캐논 EOS-1n, 니콘 F4s, 핫셀블라드 X-Pan, 콘탁스 RTS, 롤라이플렉스(ROLLEIFLEX) 2.8F, 마미야(MAMIYA) 7Ⅱ, 베리와이드(VERIWIDE) 100, 펜탁스 67Ⅱ, 핫셀블라드 500CM과 555ELD 등 이 책에는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까지 저자가 사진가로서 찍어온 무려 18대 카메라의 소소한 역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일본의 유명한 카메라 니콘에 대한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나 또한 처음 사용해 2년 동안 애지중지 찍고 다녔던 디지털 카메라가 작은 니콘 카메라였고, 우리나라에서도 니콘 카메라는 TV 광고에도 흔히 나오는, 사진작가를 비롯해 많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도 매우 인기 있는 카메라다. 그런 니콘이 전범 기업이었다니. 어릴 적 좋아했던 '우주소년 아톰'과 '마징가 제트'가 실은 일본만화였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회사가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무기를 만들던 대표적인 군산복합체 미쓰비시다. 미쓰비시는 군부를 등에 없고 군수장비를 만들면서  식민지에서 노동자를 강제 징용하며 거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강제 징용 당해 일본까지 가서 일한 사람들이 많다. 임금체불과 폭력적인 노동착취로 지금도 법정 소송 중에 있다. 더구나 이들은 현재에도 우익정치인을 후원하고, 극우 매체인 <산케이 신문>을 지원하며, 역사왜곡을 일삼는 극우 집단인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후원하고 있다.   

 

나 또한 저자처럼 니콘이 이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반성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이제 새로운 니콘 카메라를 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사진가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카메라는 단지 사진을 찍는 도구가 아니라 사진가의 정신을 육화시키는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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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자전거 여행 - 네덜란드, 벨기에, 제주, 오키나와에서 드로잉 여행 2
김혜원 지음 / 씨네21북스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자전거 여행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개에게 쫓기기도 하고, 지옥을 맛보게 되는 터널을 지나며, 야영 혹은 캠핑의 낭만을 즐기는 '탐험형'. 그리고 먹고 자고 이동하는 게 쾌적하고 편리한 도시 속을 여행하는 '시티 라이더'형. 후자는 자전거 용어로 '샤방 라이딩'이라고 해 속도나 주행 거리 등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도시를 구석구석 관광하며 돌아다니는 여행 방식이다.  

책 <드로잉 자전거 여행>은 서울 한강과 동네를 오가던 라이더가 처음으로 해외 그것도 유럽의 자전거 타기 좋다고 소문난 도시를 여행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후반부에 제주도와 일본 오키나와도 나오지만 책 속 주요 여행지는 네덜란드와 이웃도시 벨기에의 도시들이다.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의 생업을 십분 살려, 자전거 여행의 에피소드와 도시 풍경을 예술가 특유의 섬세함을 담아 여행기를 그림 에세이로 그려냈다. 만화책 넘기듯이 부담 없이 읽히고 보이는 신선한 느낌의 보기 드문 자전거 여행기다.   

"자전거를 타면 시선이 약간 위로 올라간다. 시야가 조금 달라진 것만으로도 걸으면서 느꼈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느껴진다. 자전거는 내가 지나는 풍경을 멋지게 만들어준다. 일종의 마법 같았다."(본문 가운데)

풍차, 튤립, 히딩크, 반 고흐 외에도 자전거용 신호등까지 따로 있다 보니 유럽의 자전거 수도라는 별명을 가진 암스테르담, 현대 건축의 각축장으로 불리는 로테르담,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된 그림 같은 도시 안트워프, 서유럽의 숨은 보석 브뤼셀…. 차도 옆엔 반드시 자전거 도로가 붙어 있는 이 국가들과 도시들은 왕래가 자유롭고, 자전거 싣기 편한 버스나 기차로 이동할 수 있어 긴 일정이 아니어도 한결 풍성한 자전거 도시 여행을 할 수 있다. 

다른 유럽 도시들과 달리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엔 옛 건축물이 전무한 이유, 1800년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아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으며 수탈하면서 부를 축적한 벨기에의 흑역사 등 생소한, 하지만 전혀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지는 유럽의 근현대사 이야기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특히, 유럽 자전거족들도 한국 라이더들처럼 흔히 '쫄쫄이' 바지를 입고 다닐까 궁금했었는데 의문은 책장을 넘기면서 자연스레 풀렸다. 유럽에도 쫄쫄이를 세트로 입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지 않게 보인다. 다만 일상복을 입은 라이더가 훨씬 많이 보이는 건 일상 속 자전거 문화가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흔하기 때문이었다.
      
시티 라이더답게 저자는 도시의 각종 박물관, 갤러리, 카페, 시민들이 모여 쉬고 있는 공원 등을 바퀴가 조금 작은 미니벨로 자전거를 타고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성당이나 미술관, 기차역 같은 공공건물까지 저자가 사진과 일러스트를 섞어 그려낸 도시의 건축물들이 인상적이었다.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옛 건물부터 개성과 창의, 실용성이 잘 구현된 현대의 일상적인 건축물들까지. 예술성과 함께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겨 여행심을 한껏 돋궜다.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그저 그런 건물들 일색으로, 어느 도시를 가나 비슷비슷한 풍경이 펼쳐지는 한국의 도시 여행은 별 인기가 없다. 지자체에서 공들여 만든 '걷고 싶은 거리'가 도심 곳곳에 있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들엔 저자가 유럽의 도시에서 느꼈던 '도시의 감수성' 이라는 매력이 아직 부족한 듯하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여행서를 펴내는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의 말마따나 "무엇도 영원한 것 없이 쓰러져 가는 것들로 가득 한 좌충우돌의 도시"에 사는 내겐 부럽고 아쉬운 부분이다.  

"2008년 첫 자전거로 미니벨로를 구입한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홍제천을 달렸고, '길을 달리다보니 한강이 나타났고, 그저 페달만 굴렀는데 어느새 분당에 와 있었다'고 돌이켰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동네 라이더'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9박 10일의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본문 가운데)

책을 펼치면 자전거 바퀴 같은 크고 동그란 안경을 쓴 귀여운 저자를 따라서 자전거 타기 좋다고 소문난 유럽의 도시 속으로 따라가게 된다. 여행지에서 방문한 명소들을 찍은 사진도 소개돼 있지만, 본인의 캐릭터와 함께 저자가 직접 그림으로 옮겨 그린 지도 및 자전거 여행 팁 그리고 그녀가 느꼈던 여행지에 대한 감성에 대해서도 한눈에 보기 편하게 나와 있다. 

여성 혼자서 용기 있게 감행한 발랄하고 당찬 여행자의 때론 재미있고 때론 가슴 벅찬 여행 일기는 이동, 숙박, 식사 등 여행지에 대한 세세한 정보들도 놓치지 않고 담고 있다. 후일 유럽 도시를 자전거타고 구석구석 여행하고 싶은 내게도 좋은 가이드가 됐다.

만화와 사진과 에세이가 이끄는 보기 드문 여행기라 피식 피식 웃으며 책장 넘기는 재미가 좋은데 실용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특히 저자가 발로 달려가 경험한 곳곳을 일일이 손으로 그린 암스테르담 약도는 네덜란드에 갈 때 필수 지참물이 될 듯싶다. 

직접 본인의 자전거를 수하물로 부쳐서 항공기에 싣고 가는 과정과 주의할 점을 그림과 사진으로 상세히 보여주고 있는 페이지도 사소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떠나려는 이에게 큰 도움이 된다. 초보 동네 라이더에게도 정말 애마 자전거를 데리고 멀리 여행을 떠나 가보고 싶게 만들어 주는 '유럽 자전거 여행 유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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