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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토니는 '자기보존 본능'이 있는 평범한 남자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자신의 친한 친구 에이드리안과 사귀게 되었고, 사람이니 당연히 화가 났고, 그래서 '에라 엿이나 먹어라'하는 맘으로 저주를 퍼 부은 편지를 보냈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잊어버렸을 뿐이다. 머리숱이 적어진 육십 노인이 된 그에게 어느 날, 엉뚱하게도 그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자신에게 남긴 편지가 도착한다. 그 편지로 인해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생각해내고, 다시 만난 베로니카를 통해 자신이 모르고 있던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다.
이 책, 벌써 세번째다. 작가의 말처럼 처음 볼 때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결말 때문에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고, 이번엔 작년에 나온 영화를 보기 전, 원작이랑 비교할 요량으로 읽었다. 장편이라 하기엔 많이 짧은 소설에 어찌나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그런데 세번째임에도 여전히 또 다른 문장들에 밑줄을 긋게 된다. 짧은 분량에도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빈틈없이 치밀했고, 화자인 토니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담백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토니의 말처럼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이기에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이며 살았던 그에게, 기억은 그의 편에 유리하게 변질되고 혹은 잊혀져 갔다. 처음 읽었을 땐,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 베로니카로서는 토니에게 느낀 가장 큰 실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며 그것 때문이 아니었구나, 베로니카의 말처럼 나도 역시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구나' 싶었다. 토니는 베로니카와 사귀며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베로니카는 토니를 통해 알게 된 에이드리안에게서 그녀가 원하던 감성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토니에게는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았던 것들에게, 섬세한 에이드리안은 매혹되지 않았을까. 비밀이라도 있는 것 같은 미소와 작은 손짓에. 그래서 토니가 쓴 저주의 말보다 그녀의 엄마를 찾아가라는 충고가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리라.
소설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토니의 혼란으로 끝나지만, 어쩌면 그가 여전히 '아직도 감을 못 잡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좀더 실리적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기에,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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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이다.
그는 나보다 도량이 넓고 준열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한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 반면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같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아비의 의무를 다했고, 외동딸은 결혼이라는 한시적 피난처로 떠났다. 이제 할 일은 알츠하이머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진 재산을 잊지 않고 그 아이에게 남기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 부모보다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가진 재산이 자식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 시점에 맞춰 죽어주는 편이 더 좋다. 그것이 출발점이 되리라.
젊었을 땐 - 내 얘기이다 - 자신의 감정이 책에서 읽고 접한 감정과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란다. 감정이 삶을 전복하고, 창조하고, 새로운 현실을 규정해주길 바란다. 세월이 흐르면, 그 감정이 좀 더 무뎌지고, 좀 더 실리적이 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런 감정이 지금 그대로의 삶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응원해주길 바란다. 자신이 그럭저럭 괜찮게 살고 있다고 말해주길 바란다. 이런 심정에 일말이라도 그릇된 것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