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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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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가 있다.  

형 브뤼노 클레망 1956년 3월생

부친 세르주 클레망

1928년에 태어난 자닌 세칼디는 총명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1945년 대학에 입학해 파리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숱한 연애 끝에 미남은 아니지만 강렬하고도 단순한 남성적 매력을 지닌 전도 유망한 세르주 클레망을 만나 결혼하고 1956년 3월 브뤼노를 낳는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개인의 자유를 '육아'라는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지겨운 일과 바꿀 생각이 없었으므로, 어린 브뤼노를 외가로 보낸다. 

동생 미셸 제르진스키 1958년 6월생

부친 마르크 제르진스키

돈은 많았지만 자신이 선망하던 사교계에 들어갈 수 없었던 자닌은 그들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마르크 제르진스키를 만났고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 브뤼노를 친정에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1958년 남편과 합의이혼 후, 그와 살림을 차리고 6월에 아들 미셸까지 낳는다. 하지만 자닌은 그늘진 성격에 혼자 살 때의 습관을 버리지않는 마르크를 두고 바람을 피우기 시작하고, 급기야 성적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의 창설자인 프란체스코 디 메올라의 정부가 된다. 오랜 출장 후, 집에 돌아온 마르크는 방치된 미셸을 발견하고 아이를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긴다.      

이렇게 두 형제는 자신들의 부모가 아닌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부뤼노의 삶, 그리고 그의 사랑, 크리스티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신적 문제가 있는 외할머니와 단둘이 같이 살던 부뤼노는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는 다른 학생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한 사춘기를 통과하며, 친구가 없고 여자를 두려워하는 남자로 성장한다. 결혼도 하고 28살에 아들도 얻지만, 결국엔 결혼 생활에도 실패하고 삶의 주된 목표로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중년 남성이 되어버렸다. 

42살이 된 부뤼노는 그 해 여름 휴가동안, 그야말로 '화끈하게 섹스할 수 있는'장소로 알려진 <변화의 장>이라는 캠프에서 크리스티안을 만난다. 성적 욕구의 만족을 위해 시작됐던 그들의 만남은 서로를 아끼고 진정한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잠시, 크리스티안은 두 다리가 마비된 채로 살아야하는 장애인이 된다. 자신을 위해 부뤼노가 희생하기를 원치 않았던 그녀는 브뤼노의 연락처를 남겨놓고 자살하고,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돌볼 결심을 하지 못했던 브뤼노는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     

미셸의 삶, 그리고 아나벨

두 살 때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 미셸은 책을 좋아하는 우등생으로 자라고, 중학교 3학년 때 독일어 수업을 들으며 아나벨을 만나게 된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빼어난 미모의 아나벨은 오랜 시간을 미셸과 함께 하며 그를 좋아하지만, 남녀간의 관계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는 미셸은 그녀를 놓쳐버린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난 후, 그는 명문대학에 들어가 박사 과정까지 마치며 최고 수준의 분자 생물학자가 된다.

미셸은 할머니의 묘지를 옮기기 위해 잠깐 집에 들렀다 25년 만에 우연히 다시 아나벨을 만나고, 많은 상처를 받으며 불행하게 살아 온 아나벨과 재회한 미셸은 그런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며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인간 관계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행복은 잠시뿐, 아나벨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도 가망이 없음을 알고는 자살하고 미셸은 그녀를 떠나보낸 후, 아일랜드에 있는 연구소로 직장을 옮겨 연구를 진행하다 홀연히 사라진다.    


솔직히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특히 과학바보인 내게 미셸이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과학이론의 설명은 문장의 이해능력을 확 끌어내려 읽다 말기를 수차례. 그에 반해 부뤼노의 성적 일탈과 자유분방한 성문화에 대한 묘사가 등장할 때는 불타오르는 호기심으로 꽤 많은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은 한마디로 성(性) 풍속의 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런 변화가 시작된 시기의 선구자적 범주에 속해 일찍이 가족을 버리고 '히피'의 길을 선택한 두 형제의 어머니 자닌, 각자 다른 모습으로 그 변화의 흐름속에서 살아갔던 그녀의 두 아들 브뤼노와 미셸 그리고 그들과 함께였던 크리스티안과 아나벨...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림받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부뤼노는 불행하게도 진정한 사랑, 크리스티안을 만났지만 그녀를 위한 희생을 결심하지 못했고,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한다면서도 보통의 부모들처럼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삶보다는 개인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어쩌면 그는 미셸이 키우던 새장 속 카나리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새장 문을 열어주어도 바깥으로 나와서는 겁에 질려 소파에 똥을 싸고 바로 새장으로 달려가 들어가는 문을 찾았던 카나리아처럼, 사랑을 모르는 세계에 새장처럼 갇혀 있다가 바깥 세상으로 나와 사랑할 자유를 얻었지만, 그런 무한정의 자유가 그에게는 더 버겁고 두려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도 그 사랑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건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생인 미셸의 세계관은 기계적이고 비정한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형 브뤼노와 달리 다시 만난 아나벨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일까? 부모가 곁에 없었지만, 그는 자라면서 항상 할머니와 함께 였고, 곁에는 고모들과 사촌 형제 그리고 아나벨이 있었다. 기숙사에 있으며 친구들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주말에 잠깐 만날 수 있는 아버지마저 많은 시간을 아들에게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았던 브뤼노와는 성장했던 환경이 달랐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아나벨의 경우를 생각하면 부모나 주위 환경만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만은 아님이 틀림없다. 게다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인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 처음으로 진심을 다 해 사랑했던 남자, 미셸에게 성적으로 거부당하고 자유로운 성문화에 휩쓸리며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에 띄는 아름다움이 독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입자가 '소립자'라면 이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입자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각각의 소립자들 둘이 만나 결합되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각각 소립자들의 존재 사이가 별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너무 멀어서 잠깐 마주치기만 하고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만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누군가와 스치기만 하며 외롭게 살아간다.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적응하며 그저 흘러가며 인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흐름을 가속화하는 사람이 있고,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성적 자유라는 시류에 몸을 맡긴 브뤼노와 아나벨이 그랬고, 그런 시류가 시작될 때 과감하게 가족을 버리고 '히피'가 된 자닌이 그랬고, 인간을 다른 종으로 대체하는데 큰 역할을 한 미셸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신인류들의 말처럼 우리는 여전히 모순덩어리이고, 이기심에 끝이 없으며, 수많은 육체적,심적 고통속에 살아가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냈고,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살아가기도 한다. 모든 면에서 우리가 꿈꿔왔던 완벽한 행복에 도달한 그들이 부럽기는 하다. 하지만, 목적인 그 행복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지금의 우리가 어쩌면 더 치열해서, 결과를 알 수 없어서 더 흥미진진하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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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느낌 있다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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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배우,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그림도 그리고 글까지 이렇게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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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게 배우와 화가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얼굴이다. 

배우가 쌀로 밥을 짓는 일이라면 화가는 그 찌꺼기로 술을 담그는 일 같다고 설명하면 어떨까.

같은 재료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 방법에 따라 결과물은 전혀 다르게 나온다.

운동선수처럼 독하게 훈련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로 영화를 찍는다. 그렇게 밥과 같은 연기가 만들어진다. 그러고 나면 몸과 마음에는 잔여물이 생긴다. 연기로는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 그것을 끄집어내어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술과 같은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림이 나를 회복시키고 다시 연기에 정진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물론 연기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게 연기란 넘치는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하는 일이다. 연기란 감정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의 배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느 감정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제 나는 그림과 연기를 두 바퀴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연기를 하고 돌아오면 팽팽해진 신경과 굳어진 이성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억눌렀던 감정과 창작욕을 그림을 통해 발산하고 나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텅 빈 상태가 만들어진다. 연기가 그림을 부르고 그림이 연기를 가능케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 연기는 상호작용을 하며 내 세계를 더욱 넓고 길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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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지혜 42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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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아이키우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을 마흔 셋의 정신과의사인 그녀가 파킨슨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택한 길은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고,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을 했고, 이 책까지 썼단다. 그런 그녀가 오늘을 '그럭저럭'도 아니고 '재미있게'까지 산다는데, 그 이유가 궁금할 수 밖에. 오늘도 책을 통해 또 이렇게 삶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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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키는 법


1. 외워 버려라

 -> 맘에 안 드는 상대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고 그냥 넘겨라.


2. '~하는 척'이 필요한 때가 있다

 -> 솔직한 게 최고라며 싫다고 말해봤자 관계만 어그러질 뿐이다.


3.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자 해도 내가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맨 처음 받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상처로 남길지 그냥 상대방에게 돌려주고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4. 더 이상 그가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라.

 ->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자.



독립은 스스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사실 독립은 의존해야 할 때 의존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살다보면 남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럴 때 독립적인 사람은 당당하게 도움을 청한다. 또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도움을 준다. 타인의 도움은 잠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자신의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자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아끼고 쓰다듬지 않고 멋대로 던지면, 그릇처럼 다 깨져버리니까. 그리고 한 번 깨어진 그릇은 다시 붙이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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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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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토니는 '자기보존 본능'이 있는 평범한 남자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자신의 친한 친구 에이드리안과 사귀게 되었고, 사람이니 당연히 화가 났고, 그래서 '에라 엿이나 먹어라'하는 맘으로 저주를 퍼 부은 편지를 보냈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잊어버렸을 뿐이다. 머리숱이 적어진 육십 노인이 된 그에게 어느 날, 엉뚱하게도 그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자신에게 남긴 편지가 도착한다. 그 편지로 인해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생각해내고, 다시 만난 베로니카를 통해 자신이 모르고 있던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다.

   

이 책, 벌써 세번째다. 작가의 말처럼 처음 볼 때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결말 때문에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고, 이번엔 작년에 나온 영화를 보기 전, 원작이랑 비교할 요량으로 읽었다. 장편이라 하기엔 많이 짧은 소설에 어찌나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그런데 세번째임에도 여전히 또 다른 문장들에 밑줄을 긋게 된다. 짧은 분량에도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빈틈없이 치밀했고, 화자인 토니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담백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토니의 말처럼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이기에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이며 살았던 그에게, 기억은 그의 편에 유리하게 변질되고 혹은 잊혀져 갔다. 처음 읽었을 땐,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 베로니카로서는 토니에게 느낀 가장 큰 실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며 그것 때문이 아니었구나, 베로니카의 말처럼 나도 역시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구나' 싶었다. 토니는 베로니카와 사귀며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베로니카는 토니를 통해 알게 된 에이드리안에게서 그녀가 원하던 감성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토니에게는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았던 것들에게, 섬세한 에이드리안은 매혹되지 않았을까. 비밀이라도 있는 것 같은 미소와 작은 손짓에. 그래서 토니가 쓴 저주의 말보다 그녀의 엄마를 찾아가라는 충고가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리라.


소설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토니의 혼란으로 끝나지만, 어쩌면 그가 여전히 '아직도 감을 못 잡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좀더 실리적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기에,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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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이다. 

 

그는 나보다 도량이 넓고 준열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한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 반면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같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아비의 의무를 다했고, 외동딸은 결혼이라는 한시적 피난처로 떠났다. 이제 할 일은 알츠하이머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진 재산을 잊지 않고 그 아이에게 남기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 부모보다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가진 재산이 자식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 시점에 맞춰 죽어주는 편이 더 좋다. 그것이 출발점이 되리라.

 

젊었을 땐 - 내 얘기이다 - 자신의 감정이 책에서 읽고 접한 감정과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란다. 감정이 삶을 전복하고, 창조하고, 새로운 현실을 규정해주길 바란다. 세월이 흐르면, 그 감정이 좀 더 무뎌지고, 좀 더 실리적이 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런 감정이 지금 그대로의 삶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응원해주길 바란다. 자신이 그럭저럭 괜찮게 살고 있다고 말해주길 바란다. 이런 심정에 일말이라도 그릇된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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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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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도서관에서 빌려 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맘에 드는 문구를 적어두었던 메모장에서 발견한 몇 개의 문장들을 다시 읽으며 작가님들께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기회가 있으면 전자책으로 다시 찾아 김애란, 김연수, 박민규, 전경린 작가 편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 




작가  김 훈

담배를 줄여야 하듯이 책을 줄여야 할 때다. 남은 시력을 아껴서 써야 할 때가 왔다. 돋보기를 쓰고까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왠지 사람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 김훈 작가님, 제가 요즘 눈에 촛점이 잘 맞질 않아 안과에 갔더니 노안이 오기 시작했다고 많이 불편하면 돋보기를 맞추라는데... 사람답지 못해도 읽고 싶은 책은 읽어야 겠습니다. 작가님의 연세로 보아 지금은 돋보기를 쓰고 계실 듯 한데... 요즘 혹시 책을 읽지 않으시나요? 책은 읽지 않아도 괜찮지만 담배는 많이 줄이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좋은 글을 계속해서 읽고 싶으니까요. 




작가  심윤경

실제로는 내 무능력함의 많은 부분을 아이가 가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 때문에 내가 어떤 제약이나 결핍을 감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즐겨한다...... 사실은 아이 탓이 아니라 어리석고 나태한데다가 욕심만 많은 탓인 것을 스스로 안다.


-> 심윤경 작가님 말씀에 300프로 공감합니다. 아이가 이젠 혼자 스스로 하는 일도 많아 그리 잔소리하거나 간섭하지 않아도 되건만, 전전긍긍 아이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지적질하느라 바쁩니다. 그러면서 '내가 없으면 제대로 하는 게 없다', '내가 일일이 챙겨줘야 하니 바빠죽겠다', '그래서 나만의 시간이 부족하다' 투덜대지요. 가끔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 마인드 유지를 위해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지만, 앞으로 아이를 핑계로 대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작가  윤성희

"만약에" "왜" "과연" 이 질문들만 제때 던질 줄 안다면,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없으면 능력만큼의 존재라도 되어야 한다.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면 최소한 좋은 작가의 태도만은 가져야 한다. 작가는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귀담아들을 책임이 있다. 활로 그 이야기들을 엮어 묶어두어야 한다. 그러면 독자들이 그 이야기들을 다시 세상밖으로 떠돌게 할 것이다. 잊지 말자! 써야 할 많은 이야기들이 허공에 떠다니고 있다는 것을. 눈이 밝은, 맑은, 사람에게만 그것이 보인다는 것을.


-> ​윤성희 작가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그 때, 만약에 제가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면, 좋은 소설을 쓸 수는 없었더라도 최소한 좋은 작가의 태도 정도는 가질 수 있었겠죠? 이제야 제가  써 보고 싶은 소설을 쓸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과연 이미 어둡고, 흐려진 눈을 가진 제가 허공에 떠 다니고 있는 써야 할 많은 이야기들을 볼 수 있을까요?




작가  윤영수

다른 이에게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놓는다 해서 소설쓰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음은 선배도 나도 너무나 잘 안다. 어차피 혼자만의 작업이다. 혼자만의 체력으로 혼자만의 역기를 들었다가 얌전히 다치지 않게 내려놓는 것만이 작가의 할 일인 것이다.


-> ​작가님의 글을 다시 읽으며, 그동안 친구들에게 제 괴로움을 털어놓는 건 오래동안 지치지도 않고 꾸준히 해 왔음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글을 쓰는 건, 소설을 쓰는 건 외로운 혼자만의 작업임을 알지만, 어쩌면 '혼자'가 너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제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흘러가는 삶과 시간에 쓸려 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요. 그래도 저질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무게인 역기를 살짝 들어보려고 노력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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