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특히 과학바보인 내게 미셸이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과학이론의 설명은 문장의 이해능력을 확 끌어내려 읽다 말기를 수차례. 그에 반해 부뤼노의 성적 일탈과 자유분방한 성문화에 대한 묘사가 등장할 때는 불타오르는 호기심으로 꽤 많은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은 한마디로 성(性) 풍속의 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런 변화가 시작된 시기의 선구자적 범주에 속해 일찍이 가족을 버리고 '히피'의 길을 선택한 두 형제의 어머니 자닌, 각자 다른 모습으로 그 변화의 흐름속에서 살아갔던 그녀의 두 아들 브뤼노와 미셸 그리고 그들과 함께였던 크리스티안과 아나벨...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림받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부뤼노는 불행하게도 진정한 사랑, 크리스티안을 만났지만 그녀를 위한 희생을 결심하지 못했고,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한다면서도 보통의 부모들처럼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삶보다는 개인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어쩌면 그는 미셸이 키우던 새장 속 카나리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새장 문을 열어주어도 바깥으로 나와서는 겁에 질려 소파에 똥을 싸고 바로 새장으로 달려가 들어가는 문을 찾았던 카나리아처럼, 사랑을 모르는 세계에 새장처럼 갇혀 있다가 바깥 세상으로 나와 사랑할 자유를 얻었지만, 그런 무한정의 자유가 그에게는 더 버겁고 두려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도 그 사랑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건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생인 미셸의 세계관은 기계적이고 비정한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형 브뤼노와 달리 다시 만난 아나벨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일까? 부모가 곁에 없었지만, 그는 자라면서 항상 할머니와 함께 였고, 곁에는 고모들과 사촌 형제 그리고 아나벨이 있었다. 기숙사에 있으며 친구들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주말에 잠깐 만날 수 있는 아버지마저 많은 시간을 아들에게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았던 브뤼노와는 성장했던 환경이 달랐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아나벨의 경우를 생각하면 부모나 주위 환경만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만은 아님이 틀림없다. 게다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인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 처음으로 진심을 다 해 사랑했던 남자, 미셸에게 성적으로 거부당하고 자유로운 성문화에 휩쓸리며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에 띄는 아름다움이 독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입자가 '소립자'라면 이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입자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각각의 소립자들 둘이 만나 결합되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각각 소립자들의 존재 사이가 별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너무 멀어서 잠깐 마주치기만 하고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을 만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누군가와 스치기만 하며 외롭게 살아간다.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적응하며 그저 흘러가며 인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흐름을 가속화하는 사람이 있고,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성적 자유라는 시류에 몸을 맡긴 브뤼노와 아나벨이 그랬고, 그런 시류가 시작될 때 과감하게 가족을 버리고 '히피'가 된 자닌이 그랬고, 인간을 다른 종으로 대체하는데 큰 역할을 한 미셸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신인류들의 말처럼 우리는 여전히 모순덩어리이고, 이기심에 끝이 없으며, 수많은 육체적,심적 고통속에 살아가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냈고,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살아가기도 한다. 모든 면에서 우리가 꿈꿔왔던 완벽한 행복에 도달한 그들이 부럽기는 하다. 하지만, 목적인 그 행복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는 지금의 우리가 어쩌면 더 치열해서, 결과를 알 수 없어서 더 흥미진진하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