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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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할매는 한 개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조선 후기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 지역이 겪어온 시간의 층위가 고스란히 펼쳐지는 소설이다.

처음에는 제목 그대로,
그저 한 ‘할머니’의 삶을 담담하게 그린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이 소설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지역의 역사, 더 나아가 한국사의 단면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인상을 준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그 사건들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의 사회 질서,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생존,
해방 이후의 혼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변화들이
‘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로 축적된다.

특히 이 소설에서 다루는 지역은
늘 중심에서 비껴나 있던 곳이다.
교과서에 한 줄로 요약되는 역사 뒤편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견디고,
침묵하고, 때로는 타협하며 살아간다.
할매는 바로 그 침묵의 시간들을 복원한다.

할매 속 인물들의 삶은 영웅적이지 않다.
대단한 결단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행동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역사를 겪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없는 시대 속에서
버텨야 했고, 감내해야 했으며,
때로는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했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인생이 된다.

이 소설이 조심스럽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에 가깝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기록으로 남은 역사는 대부분 권력자와 승자의 이야기지만,
할매는 그 이면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시간을 복원하려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역사는
웅장하거나 극적이기보다는
숨 가쁘고, 고단하며, 때로는 무력하다.

문체 역시 과장되지 않는다.
담담한 서술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울림이 생긴다.
마치 할매가 옆에 앉아
“그땐 말이다…” 하고
툭툭 이야기를 던지는 것처럼,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시대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남는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과거’는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관통한 현재였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할매는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결의 역사 소설로,
역사가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사람 이야기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거창한 설명 없이도
한 지역과 한 시대를 이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조선부터 현대사까지,
그 지역의 역사를 숨 가쁘게 헤쳐 나온 한 인생을 따라가며
우리는 결국 이렇게 느끼게 된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누군가의 삶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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