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의 딸 2
정지아 지음 / 필맥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생리문제는 여자들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배가 아픈 것은 둘째 치고천이 넉넉한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는가. 그 몸으로 눈구덩이 위에쓰러져 자고 며칠 밤을 새우며 꼬박 행군을 하고 비옷도 없이 장맛비를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장거리 행군 때는 물론이고 낙동강 전선에서는 밤낮도 없이 매일매일 계속되는 전투에 쫓기느라 용변도 제대로 못 볼 때였으니 그 고통은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아래가다 헐어 여자들의 걸음걸이가 모두 오리걸음이 됐는데 미얄스러운 박종하가 계속 여자들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따라다니는 통에 웃음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양봉순 같은 사람은 52년 여름 무렵엔 아예 생리가 끊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다. 여성과 예술인을 특별히 우대하는 남부군이라 일선 지휘자들이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주었지만 특별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거부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남자들보다 몇 배나 더 열악한 신체조건을 가지고도 남부군의 여성들은 남성과동등하게 조국해방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 P350

기다리던 소식 대신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전은 그들이 바라던 바였다. 51년 6월 23일 소련 외상 말리크가 유엔에서휴전을 제의한 다음부터 남한의 전 빨치산들도 정전을 요구하며 싸워왔다. 그러나 휴전협정에서 빨치산들의 거취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죽음과 함께 생활했던 지난날이지만 이제 정말로 남은 것은 혁명가다운 장렬한 최후뿐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빨치산들에게는 바늘 하나 꽂을 만한해방구도 없었다. 자기들이 피를 흘리며 싸웠던 그 땅에서 최후까지 싸울수밖에.

남한 전체를 통틀어 그 무렵 얼마쯤의 빨치산이 남아 있었을까. 경남도당에는 이영회의 57사단까지 포함해서 쉰 명도 되지 않았고 남부군 역시 비슷한 숫자였다. 전남만 백여 명 이상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휴전협정에서 빨치산들의 거취문제가 거론될 것으로 기대했다가낙담하기도 했다. 휴전회담이 빨치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건 이제 몇 가지 선택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혁명투쟁을 포기하고 살기위해 자수하는 방법이었고, 둘째는 언젠가 다시 올지도 모르는 해방을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유격투쟁을 지하조직 사업으로 바꾸는 것, 셋째는 사라진 꿈과 더불어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수차례 연구하고 실시했으나 성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살아 있던 대다수의 빨치산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세 번째를 선택했다. 이전까지는 해방의 그날이 목전에 있음을 믿고 싸웠다. 이제는 멀어진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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