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 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
위근우 지음 / 시대의창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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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패치》를 비롯한 한국의 수많은 연예 매체는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아닌, 독자가 원하고 욕망하는 정보를 제공하면서 독자의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개념의 혼용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팩트주의의 당위적 기반이되는 언론의 자유와 독자의 알권리는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고, 실천적 맥락에서 공적 함의를 가질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론에는 자유 이상으로 자기 제한의 책임이 따릅니다. 《디스패치>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리고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팩트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이 매우 공익적이고 양심적인 언론인 척 한다는 것입니다. - P152

만약 상대가 나의 불편함을 무시한다면 프로불편러의 외침은나만의 불편함으로 혹은 같은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끼리의 공명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신발 안의 작은 돌멩이처럼 별것 아니지만신경 쓰이는 프로불편러의 존재를 통해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끼고결국 말을 내뱉으며 그 말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갖게 된다.  - P140

 전문가에게 코멘트를 받는 대신 코멘트를 주는 사람을전문가로 둔갑시키는 언론의 비양심이다. 어떤 이슈에 대해 제대로된 논거를 기반으로 관점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고 해서 무작위로 코멘트를 수집한 뒤 그것으로 기사 분량을채우고 마치 의미 있는 기사인 것처럼 내보낸다면 언론의 존재 이유자체가 사라진다. 언론으로 존재하기 위해 기사를 빠르게 많이 생산해야 하지만, 그 때문에 언론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배신하는 것에대해 과연 언론은 어느 정도로 자성하고 있을까. - P129

지식 소매상으로서의 역할이든 여러 첨예한 이슈에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든 그 자체로만 보면 ‘지식 셀럽‘은 순기능을 한다고 볼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방송에서 종종 만능 키처럼 활용된다는 것이다. 생전에 TV 권력에 대해 강력한 비판의 날을 세웠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질문했다. "어제는 보스니아 문제를이야기하고 오늘은 이민 법안 토론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내일은또 다른 프로그램에서 알제리 문제를 다루는 학자에게서 어떤 깊은 성찰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순기능은 자기 제한의 미덕을갖추지 않는 순간 그대로 역기능이 되어버린다. - P112


"과거의 절차에 의해서라면 입학했을 지원자들이 새로운 절차가그들의 입학할 권리를 침해했다거나 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덜 존중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들은 옛날 정책의 운 좋은 수혜자였을뿐이다. 이제는 정책이 그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바뀌었다. 그것이 정당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옛날 정책에 익숙해 있는 까닭일 뿐이다." ㅡ피터 싱어(대학 교수. 철학자)ㅡ - P106

어느 순간 인문학이 분과 학문으로서의 구체성과 전문성을 잃고 21세기를 지배할 통찰력의 원천이나 삶의 비밀을 밝혀줄 열쇠처럼 신비화될 때, 이미 그것은 지식으로서의 학문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인문학의 신비화는 그래서 인문학에 대한 경시와 연결되어 있다. 두 방식 모두 인문학의 경험적이고 논증적인 지식으로서의 가치를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위 글에서 예를 들었듯, 인문학의 신비화가 합리성과 상식에 대한 거부의 형태로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사변적 말장난을 벌이기 위해선 합리적 논증 대화의 토대를 치워버려야 한다. 그 현란한 말의 쇼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 뒤 만병통치약을 파는 모습은 그래서 과거 어떤 직업을 떠올리게 한다. 예전엔 그런 이들을 약장수라고 했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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