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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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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호러 - 두 개골의 서



1.SF?

작자 역시 이 책이 SF범주에 속하는지 의아스러웠던 모양이다. 영생의 탐색, 그 자체는 매우 SF적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영생을 탐색하는 수많은 도가계열 무협판타지도 SF일까? 결국 로버트 실버버그는 다시 단언한다. 휴고상과 네블러상 후보로 지목되었다는 자체가 SF라는 증거 아니겠냐고. 매우 매우 의문스러운 발언이다. 그 만큼 이 책은 SF라는 장르에서 특이한 책이다.

하긴 소위 인문학적인 SF를 표방하는 작품들이 종종 그러하다. <다아시 경의 모험>시리즈는 어떤가? 대체역사 판타지라는 장르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랜달 개릿의 이 수작을 SF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체역사소설은 평행우주론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SF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일까?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호러미스테리성장소설이다. 네 명의 대학생이 영생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이 다소 호러적인 결말로 치달으면서 그중 일부는 성장(?)한다는 이야기.

그러나 SF이건, SF가 아니건 이 소설은 재미있다.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2. 잘되면 신선, 못되어도 건강?

한 동안 이 나라에는 단전호흡의 열풍이 불었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여러 책들이 출간되었는데 그 책 중에 <잘되면 신선, 못되어도 건강은 챙긴다>라는 제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명의 대학생은 도서관에서 미처 번역되지 않은 <두개골의 서>를 발견하고 그 책에 서 영생하는 수도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된 정보를 토대로 그 수도사들이 살고 있는 사원으로 간주되는 곳을 향해 출발한다. 이들의 생각을 평균내어 보면 이렇게 표현된다. 잘되면 영생, 못되어도 여행의 즐거움.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은 1972년도. 한국의 80년대 말과 90년대 중반까지 뭔가 비슷한 분이기가 느껴지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신비주의, 신과학, 뉴에이지의 물결이 사회 전반의 변혁에의 열망과 뒤섞여 물결치던 시절. 로버트 실버버그는 그 시점의 한 단면을 잘라내어 우리에게 생생하게 재생해 준다.

동양의 신비를 서구적으로 재해석하던 시절, 노장사상, 기(氣), 선단술에 대한 호기심과 인도의 신비주의가 서구적으로 분해되어 재생산 되던 그 시절의 지식인에게 ‘영생’은 단순한 메타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고 대학의 최고지식인이 이 비합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혹은 반신반의 하면서 이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캐릭터의 사고 곳곳에 묻어나는 모순, 합리적 이성과 직관적 믿음의 충돌은 바로 당시 지식 사회의 횡단면이다. 이 책은 그래서 뛰어난 소설인 동시에 지식인 사회에 대한 훌륭한 풍속자료다.

이 책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스츠키 다이세츠와 엘리아데가 보이고, 칼 융이 쓴 <태을금화종지>의 서문과 해설서가 보이고 프리초프 카프라가 숨어있다. 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신지학회와 그들이 섬겼던(혹은 섬겼다고 착각하는) 숨은 그랜드마스터들이 슬며시 웃음을 띠우며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구식으로 해석되던 동양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시간이 있다면 이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써보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주제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서구적으로 재해석된 동양이 다시 우리에게 우리의 이미지로 다가왔고 그 때가 바로 우리의 80년대와 90년대 중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립고도 아스라 하지만 잊고 싶은 부분도 있는  옛 시절의 냄새.



3. 문체, 그리고 번역


이 책은 4명의 일인칭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들의 성격에 따라 네 가지 문체로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다. 로버트 실버버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 “고약한 글쓰기 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로버트 실버버그는 훌륭하게 네 명의 캐릭터를 문체를 통해 형상화 하는데 성공했다. 왜냐하면 번역에서도 네 명의 성격은 멋지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티모시는 건조하고 상상력이 부족하며 단도직입적이고 네드는 현란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말이 길어진다. 이 두 캐릭터 사이에 일라이-그는 네드쪽에 가깝다-와 올리버-그는 티모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가 있고 이들은 각자의 성정을 일인칭 시점에서 거리낌없이 표현한다. 

이 소설이 고약한 글쓰기 훈련이라는 저작의 주장에 동의하며 동시에 번역자에게는 더욱더 혹독한 훈련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근래에 읽었던 몇몇 번역 소설과 달리 매끄럽게 읽히는 것을 볼 때, 또 네명의 성격이 문체에서 드러나는 것을 고려할 때 번역의 완성도도 상당히 높아 보인다. 덕분에 즐거운 글읽기, 행복한 글읽기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4. 그 밖에 몇 가지........

북스피어에서 나오는 책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지난번 <아발론 연대기>에서와 같이 이번에도 디자인이나 외장에 만족감을 느꼈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있어 보여?” 책상 위에 놓인 이 책을 보고 던진 마님의 말이다. 하드카피 양장본에 두께에 비해 가벼운 무게, 은백색의 책갈피띠, 멋진 표지 디자인, 본문에 바로 주석을 달아서 독서의 흐름을 끊지 않는 편집디자인........ 컨텐츠도 좋지만 소장욕을 불러일으킬만한 외장과 꾸밈새도 좋았다.


내 취향으로 판단하자면 결말부분이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이 보다 나은 결말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결말과 각 캐릭터의 성격, 기대 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작자의 의도나 지향점을 분석할 여지가 또 생긴다. 분명히 작자는 무언가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음 기회에 스포일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작자의 의도를 좀 더 분석한 글을 올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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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 전8권 세트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피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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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끝없는 상상력의 원천,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


과거의 왕이었고 미래에도 왕인 자 - 글래스턴배리 수도원 아더왕의 묘비에서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어린 시절 우리의 상상력과 꿈을 그 얼마나 자극하던 단어였던가. 우리는 막대기 엑스칼리버를 들고 상상의 백마를 타고 골목 골목을 브리튼의 어느 숲속이라고 여기며 달렸다. 이순신도 멋졌고 김유신도 멋졌지만 아더왕와 원탁의 기사는 무언가 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였다.


우리에게만 그러했을까? 아더왕과 그의 멋진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천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중세 유럽의 시인들은 각 민족과 지방의 전설에 아더왕의 이야기를 결합했고 끝없이 순환시켜가며 마침내 죽지 않는 왕, 과거에도 왕이었고 미래에도 왕인 한 인물과 그를 둘러싼 ‘불멸의 상징’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종교와 신화, 신화와 비의, 그리고 주술과 상징이 버무려진 이야기들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로 여긴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중 천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인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왜 아더왕은 그토록 오래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까?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라서?


<아발론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더왕이 살았던 브리튼의 숲속에 숨겨진 수많은 비밀과 상징들이 고스란히 아발론에 잠들어 있었고 인류는 그 비밀과 상징을 통해 시간을 넘어서 한 때 인류가 가졌던 지혜를 후손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의와 상징들은 기독교가 고대의 신비를 억압하기 전, 태고의 인류의 원형적인 사고와 신앙이었다.



2. 여신들의 이야기


성모여, 당신은 살아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 단테


<아발론 연대기>를 흔히 기사들의 편력, 모험 이야기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발론 연대기는 <여신들의 이야기>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기사들은 여신들의 계획, 양육, 음모에 따라 끊임없는 모험을 겪는다. 최고의 기사인 란슬롯은 여신에게 키워졌고 귀네비아로 상징되는 여신의 힘으로 모험을 떠나고 왕국을 분열시키고 다시 평화를 찾는다. 란슬롯은 귀네비아를 볼 때마다 황홀경에 빠진다. 마치 이시스를 본 ‘입문자(initiator)'들이 이시스의 현현을 보며 황홀경에 빠져들 때처럼. 그리고 귀네비아의 사랑을 얻은 후 무한의 힘을 발휘한다. 이시스가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베일을 걷고 입문자에게 진실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면 입문자는 세상의 모든 미혹을 물리칠 지혜와 힘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다빈치 코드>가 그리 좋은 책은 아니지만 적어도 몇 가지 진실은 담고 있다. 기독교는 인유의 의식에서 여신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신을 앉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기독교로 인해 여신은 중세의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신화와 전설에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아발론 연대기>는 기독교가 절대권력으로 유럽을 지배할 때 여신이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숨겼고 어떻게 자신을 원형으로 만들어 보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여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 그리고 자신을 볼 수 있는 자 에게만 기꺼이 자신의 베일을 걷는다.


3. 비밀과 상징의 숲


상징은 다른 표현양식을 통해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측면을 드러낸다 - 진 쿠퍼


유럽의 성당을 가면 우리는 가끔 놀라게 된다. 도대체 중세에 건설된 성당에 왜 이렇게 기독교와 관계없는 조각과 그림이 많은 것일까? 물론 전면을 장식한 화려한 모자이크와 벽화, 조각은 틀림없는 기독교의 그것이다. 그러나 기둥아래, 벽면 아래를 살펴보면 기기묘묘한 조각과 그림들이 곧잘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위용과 성스러움에 압도당한 우리는 그런 하찮은 조각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지나간다. 아미앵성당에 조각되어 있는 연금술의 상징도, 옥스퍼드와 킬펙의 성당에 조각되어 있는 셰엘라-나-기그의 이교도적인 상징도 관광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성당을 지은 메이슨은 기독교에 많은 상징과 기호를 심어서 그 기호를 아는 사람에게만 자신들의 신비를 전한다. 마찬가지로 중세에 널리 퍼진 신화와 전설에는 고대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 란슬롯은 왜 세 가지 색깔의 갑옷과 무기를 들고 모험을 완수한 것일까? 왜 멀린은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것일까? 왜 란슬롯은 수레에 탄 순간 수치스러운 기사로 취급받았을까?


저승과 이승, 그리고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이 있다. 그 경계의 비밀을 알고 전하려는 사람들을 우리는 마법사, 혹은 샤먼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한번은 누구나 샤먼이 되어 경계를 넘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살아 있으면서 그 여행을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인들은 ‘영웅’이라고 불렀다. 란슬롯과 가웨인은 그런 의미에서 영웅이다. 칼 차고 전쟁을 하는 영웅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영혼을 지닌 채 완전함을 찾아 또 다른 차원의 부름에 응할 줄 아는 순례자로서의 영웅.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어야할 삶의 여행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 줄 줄 아는 용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영웅이다. 그리고 그들 영웅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너 역시 영웅이며 기꺼이 비밀과 상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여행을 떠나라고.


그들의 속성을 알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중세의 옛 모험담과 로맨스만을 볼 뿐이다. 그리고 그 상징들 속에 녹아있는 풍부한 진실들을 놓치게 된다. 삶의 신비를 잃어버린 우리들은 우리를 향해 외치는 고대의 지혜를 들을 수 없다. 중세의 고딕 성당을 지나가며 고작 그림엽서에 실릴만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처럼 우리는 눈앞에 있는 생의 신비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삶은 결코 단체 관광여행이 아니다. 모든 이에게 삶은 편력이자 모험이며 모든 이는 그 자신의 삶에서 여신의 부름을 받아 퀘스트를 떠나는 기사이자 영웅이다. 그리고 그 중 축복받은 몇몇은, 여신의 부름에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질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이들은 이시스의 베일을 들추고 신비의 황홀경에 빠질 것이다.



4. 꿈, 그리고 신화


우리의 내부에는 가득 차 있는 꿈의 판테온이 있다 - 조셉 캠벨


기사들이 모여 만찬을 먹으며 환담을 나누는 궁성으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왕비를 납치하고는 머나먼 자신의 나라로 떠나버린다. 왕비를 찾으러 가는 란슬롯은 그 들어보지 못한 왕국이 한번 가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등장 할 때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그 검은 기사는 알고 보니 먼 마법의 왕국의 유명한 왕자이자 기사이며 그 아버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현군이다.


전형적인 꿈의 내러티브다.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우리, 혹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져간다. 우리는 두려움에 떤다. 그리고 그를 ?던지 혹은 그로부터 도망간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전혀 낯선 곳에 서있는데 그 침입자는 익히 알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로 변해 있다.


이 다소 모호한 내러티브구조를 보면서 개연성과 리얼리즘을 논하며 극적인 재미가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속의 우리는 그 개연성 없는 내러티브에 빠져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슬픔에 겨워 울기도 한다. 누구도 꿈을 극의 구조로 이해하고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속의 미분화된 상징들을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무의식의 일부로 파악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신화는 인류가 꾸는 꿈이다. 그 속에는 먼 시간의 저편에서 손짓하는 인류의 내밀한 사고와 욕망이 담겨있다. 그 상징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인간을 이해할 때 우리들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더왕의 신화는 그리스신화보다 더 오래된 인류의 원형의식을 보여준다. 여신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로고스가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야훼라는 이름으로 여신을 몰아내기 이전의 시절,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의 시대에 인류가 꾸었던 꿈들이 소박한 내러티브 내에 반짝이고 있다.



5. 우리 모두는 성배를 찾아야 한다.


<길가메시>는 모든 사람의 서사시다 - 마크 헤드슬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매일 매일 똑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 진정한 삶의 의미는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곤 한다. 그러나 바쁜 일상사는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을 여유를 베풀지 않는다. '옷 속의 가시 같은‘ 의문을 묻어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마음속의 가시는 꿈속으로 스며들고 언젠가는 우리 곁을 찾아올지도 모른다.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궁정생활을 즐길 때 먼 마법의 나라에서 온 여인은 외친다. 그대들은 그저 밥만 먹으며 흥청거리는 게으름뱅이라고. 그녀의 나라에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데 왜 떠나지 않느냐고. 그 여인, 혹은 여신은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가려진 비밀이 우리를 부르기 위해 보낸 사자인 것이다.


삶이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모험을 향해 떠나야 한다. 실제의 여행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비밀을 찾는 모험의 여행을 말이다. 아더왕이 찾던 성배와 길가메시가 찾던 불사의 비밀은 우리의 존재 깊숙이 숨겨져 있는 비밀의 상징이다. 사회가 혹은 외부의 권력이 삶에 강제한 가치와 의미들이 아니라 각자의 가슴 속 깊숙이 새겨진 생의 의미를 찾을 때 우리들의 생은 불멸의 것이 된다. 육체적 생은 끝날지라도 우리가 삶의 무대에 아로새긴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브리튼의 숲이 아닐지라도 모험은 존재하고 존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시작될 수 있다.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내방에서, 사무실의 컴퓨터 앞에서도 우리는 모험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진정으로 비밀을 알기를 원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여신은 자신의 사자를 보낸다.


그 부름을 인식하여 존재의 비밀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싶다면 우리는 경험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각자의 모험은 개별적인 것이지만 이미 모험을 끝낸 이들이 상징을 통해 남겨둔 지도하나쯤을 간직한다면 뜻밖의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먼 옛날 브리튼 숲에서 있었던 일, 아니 그 보다 더 먼 옛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던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두자.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길가메시이고 오시리스와 호루스이며 아더왕의 기사들이니까.


<아발론 연대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현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한권의 책에 담을 수 있는 가장 많은 비밀과 의미를 담아둔 훌륭한 편력의 참고서. 생의 모험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브리튼 숲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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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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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얼리즘? 우리의 '일상'은 다르다.
카버의 소설은 밑도 끝도 없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캐릭터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떤 일을 하고 아무런 결말 없이 소설은 끝난다. 무엇을 이야기 하는 건가? 도대체 저 등장인물은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나? 왜 심리상태와 행동이 저다지도 다른가? 괴이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비참하고 처연한 등장인물은 선하지도 않고 더구나 악하지도 않다. 다만 처해있는 상황은 막연히 출구없는 막다른 곳이라는 느낌이다. 카버의 등장인물은 언제나 '갖혀 있으며' 무엇보다도 탈출하려고도 않는다. 그 자신의 큐브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인과관계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어떤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 도무지 리얼리즘이 없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이 애잔한 감정은 무엇일까? 캐릭터의 그 말도 안돼는 행동에 아무런 이의없이 동의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가 그린 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사실 우리는 그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혹은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말을 맺는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행동은 마음과 따로 놀고 감정은 언제나 우리 통제를 벗어난다. 출구 없는 반복, 이것이 우리가 살고있는 시공아닌가? 그가 그리는 '세계'는 어떤 리얼리즘보다 더욱 리얼하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끝나는 그의 소설은 가슴을 친다.

2. 쇼윙, 아무런 작위 없는...
물끄러미 등장인물의 출구없는 일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정말로 작가의 그것이다. 그는 '우리 세대의 삶'을 정말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가감없이 슬며시 우리에게 던진다. 이봐, 너 이렇게 살고 있지? 그지?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슬며시 웃으면 속삭이는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너무나 리얼한 일상, 나의 일상을 던지는 그의 짓궂은 표정은 그러나 사뭇 진지하다. 농담 속에 뼈를 담는 것이다. 그냥 삼키기에는 몹시도 목에 걸리는 날카로운 뼈말이다. 그래서 일상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소설의 신(scene)이 다시 재현되는 것을 느끼며 놀라게 된다. 나 역시 출구 없는 세계에서 헤매이고 있다는 사실에...

3. 아주 작은 그러나 끝없이 큰...
그가 그리는 일상은 아주 자잘하고, 캐릭터가 사는 곳은 미국의 작은 깡촌이다. 더구나 그는 소설의 인과관계를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캐릭터의 소소한 몸가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소소한 것들은 아주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모르며 우리와 관계 맺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것이 실상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우리는 설명할 수 있는가? 최대한의 진실은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런 의미에서 커버는 자기가 본것 만을 보여 줌으로 자신이 말하지 않는 모든 것이 '보여주는 것'뒤 에 숨어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미니멀한 일상 뒤에는 그 일상을 움직이는 '알수 없는 거대한 것'이 있고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기에 말해질 수 없다. 그래서 커버는 윙크를 찡긋하며 웃는 것이다. 말안해도 알지? 그러나 그 윙크에 맞장구 치며 웃기에는 아직 나는 젊다. 그래서 다시 탈출구를 찾아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글쎄, 아직 나는 잘 모르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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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까지 100마일
아사다 지로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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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 리얼리즘은 없다. 그러나...

한 남자가 몰락한다. 밑바닥까지. 희망은 어디에도 없다. 그 남자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일어선다. 그리고 어머니를 살리는 그 길이 바로 자신의 재활의 길이 된다. 참으로 선한 존재들이 그와 함께 한다. 그들은 결코 잘살거나 번듯한 존재들이 아니다. 못난 술집아가씨 마리, 야쿠자 사채업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명의. 마침내 삶의 희망이 그를 찾아온다. 어머니의 부활과 함께...

어디서 많이 보았던 줄거리이다. 한 효자, 죽어가는 어머니, 그리고 그를 돕는 천지신명. 어린 시절 늘 읽었던 동화의 단골소재다. 다만 그를 돕는 최후의 존재가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신에 가까운 의술을 지닌 의사라는 것만 다를 뿐. 더구나 그를 돕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현실에서는 볼수 없는 선한 존재들, 현실에 살고 있는 천사들이 아닌가. 현대를 배경으로 한 동화책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번역자의 말대로 이 소설은 읽는이의 가슴을 친다. 내러티브구조 자체가 동화적이긴 하지만 그가 입힌 외피의 형태는 우리의 삶을, 우리네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상류계급은 하나같이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야쿠자보다도 몰인정한 인간으로. 외형적인 삶의 껍질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를 외면하는 주인공의 형제들, 성공한 자신의 변호사친구, 은행지점장이 된 매형, 이들은 조금 세련되긴 했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전래동화의 악한 그대로이다.

이들로부터 배척받는 주인공은 마침 IMF로 인해 거리로 내몰린 우리들의 아버지와 오버랩되면서 마침내 눈물샘을 자극하고야 만다. 이 감동은 치열한 리얼리즘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2. 우리가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결코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설사 외형적인 껍질을 구한다 해도 우리가 그속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가슴 속의 따뜻한 그 무엇이다. 이 소설은 그것을 준다.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설사 죽는 것보다 못한 상황일지라도 그 삶을 보다듬어주는 존재들이 우리곁에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삶은 살아갈 만 하다는 메시지를, 우리가 원초적으로 갈구하는 사랑을...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은 특히나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어쩔 수 없는 감동이 거기에 있다.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어머니는 부당하게 자신을 희생해온 사람이다. 그러나 '가난한 아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보다 부자인 아들에게 버림받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 여인 앞에서 어떤 감심장이 눈물을 감출 수 있을까. 우리가 갈구해온 무조건 적인 사랑이 그곳에 놓여 있었다.

3. 우리의 어머니는 6자 단칸방에서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가 과연 인간의 얼굴을 한 곳일까? 이책에 등장하는 악한들, 중상층의 허위의식 속에서 죽어가고 썩어가는 모습이 현재 우리의 얼굴 아닌가. 우리 사회에 인간은 없다. 다만 껍질만이 존재할 뿐.

우리는 되돌아 보지 않고 살았다. 껍질을 키우기 위해 정신 없이 사는 동안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 가장 아름 다운 것들은 6자 단칸방에 홀로 남아서 심근 경색을 일으키며 죽어가고 있다. 이제 껍질 마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뒤돌아 본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그 소중한 것들을 살리기 위해 100마일 떨어진 천국으로 향한다.

그들이 기꺼이 삶의 모험을, 삶의 감동을 대면하리라. 삶은 원래 그러한 것이니까. 그들이 기꺼이 천국에 도달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 사는 모양을 인간의 것으로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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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아웃사이더' 편집진 산문모음
김규항 김정란 진중권 홍세화 지음 / 아웃사이더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아웃사이더를 기다리며 - 각 편집진의 산문에 대한 감상.

1. 김규항씨의 글은 언제나 감정과잉, 그러나...

속물 지식인에 대한 분노, 얼치기 진보주의자(특히 박노해)에 대한 적의, 그리고 지식인양하는 자신에 대한 냉소까지 겹쳐 그의 글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정의 한 귀퉁이에 숨어있는 것은 이미 자본주의에, 자본주의적 욕망에, 자본주의적 상품화에 동화되어 버린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다.

언제나 감정과잉인 그의 글은 즐거운 독서경험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불편함을 준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 진리가 놓여있기에 그의 글은 다시 내 눈을 잡아끈다. 주변부에 있으면서 또, 주변성으로 주류를 바꾸기를 꿈꾸기에 기꺼이 그의 감정과잉을 감수하고 싶다.

2. 그의 글은 언제나 정색이다...

김정란씨의 글은 언제나 진지하다. 그의 글은 정색을 하고 있다.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어려운, 진지한 얼굴로 우리를 응시한다. '인물과사상'에서 처음 만난 그는 자본주의와 상업주의에 매몰되는 문학을 비판했고 거대언론의 힘에 야합해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일견 '순진해 보이는' 몇몇 작가들을 성토했다. 그 성토는 힘이 있었고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이번 글들은 사회속에 난무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 주는 글들이 가장 돋보였다. 이미지, 언어, 삶... 그의 글은 무겁고 장중하다. 가벼운 주제를 다룰 때도 있지만 그 가벼움은 소재에 속한 것이지 주제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는 탐험하는 사람이다. 문학은 그의 지도이자 나침반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탐험의 동참자일지도 모른다. 다만 깨닫고 있지 못할 뿐...

3.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그의 발랄함은 때때로 독자에게 독서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쾌를 느끼게 한다. 너무나 즐겁고 유쾌해서 나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끝까지 읽고, 읽자마자 다시 한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유쾌했고 즐거웠다.

물론 그의 글쓰기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다. 내 주위의 어떤 분은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글쓰기라고 비판하시곤 한다. 하지만 특유의 발랄함으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대는' 사람들이 과연 예의차림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 알량한 지식으로, 부정한 권력으로 타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의라는 것은 똑같은 얼굴 똑같은 표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는 예의 대신 풍자를, 그것도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질 만큼 멋진 풍자를 그들에게 보내준다.

4. 우리나라보다 딱 100년 앞선 나라, 프랑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프랑스가 얼마나 멋진 나라인가를 알았다. 에펠탑에서도, 프랑스제 화장품이나 패션제품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프랑스의 매력을 그의 글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에 걸맞는 시민의식을, 똘레랑스의 향기를.

우리 지식인들은 프랑스에서 도대에 무얼 가지고 오는 것일까? 그들은 우리 사회현실에 무감각하듯이 프랑스사회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택시운전사를 하면서 느낀 프랑스를 그들은 느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저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되어서 자기 이외의 것은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탓인가. 그들을 지식인으로 대접하고 살아야 하는 이 땅의 백성들만 불쌍할 뿐이다.

5. 그들의 책이 기다려 진다.

<아웃사이더를 위하여>는 그저 맛배기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함께 모여 화학작용이 생기기 이전, 각각의 원소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글들. 이 각각의 개성이 함께 모여 반응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니트로글리세린이 만들어질까? 아니면 철학자의 돌이 생길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들은 결코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나는 그 책의 최초의 정기구독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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