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3월
평점 :
품절


1. 리얼리즘? 우리의 '일상'은 다르다.
카버의 소설은 밑도 끝도 없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캐릭터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떤 일을 하고 아무런 결말 없이 소설은 끝난다. 무엇을 이야기 하는 건가? 도대체 저 등장인물은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나? 왜 심리상태와 행동이 저다지도 다른가? 괴이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비참하고 처연한 등장인물은 선하지도 않고 더구나 악하지도 않다. 다만 처해있는 상황은 막연히 출구없는 막다른 곳이라는 느낌이다. 카버의 등장인물은 언제나 '갖혀 있으며' 무엇보다도 탈출하려고도 않는다. 그 자신의 큐브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인과관계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어떤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 도무지 리얼리즘이 없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이 애잔한 감정은 무엇일까? 캐릭터의 그 말도 안돼는 행동에 아무런 이의없이 동의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가 그린 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사실 우리는 그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혹은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말을 맺는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행동은 마음과 따로 놀고 감정은 언제나 우리 통제를 벗어난다. 출구 없는 반복, 이것이 우리가 살고있는 시공아닌가? 그가 그리는 '세계'는 어떤 리얼리즘보다 더욱 리얼하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끝나는 그의 소설은 가슴을 친다.

2. 쇼윙, 아무런 작위 없는...
물끄러미 등장인물의 출구없는 일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정말로 작가의 그것이다. 그는 '우리 세대의 삶'을 정말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가감없이 슬며시 우리에게 던진다. 이봐, 너 이렇게 살고 있지? 그지?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슬며시 웃으면 속삭이는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너무나 리얼한 일상, 나의 일상을 던지는 그의 짓궂은 표정은 그러나 사뭇 진지하다. 농담 속에 뼈를 담는 것이다. 그냥 삼키기에는 몹시도 목에 걸리는 날카로운 뼈말이다. 그래서 일상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소설의 신(scene)이 다시 재현되는 것을 느끼며 놀라게 된다. 나 역시 출구 없는 세계에서 헤매이고 있다는 사실에...

3. 아주 작은 그러나 끝없이 큰...
그가 그리는 일상은 아주 자잘하고, 캐릭터가 사는 곳은 미국의 작은 깡촌이다. 더구나 그는 소설의 인과관계를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캐릭터의 소소한 몸가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소소한 것들은 아주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모르며 우리와 관계 맺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것이 실상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우리는 설명할 수 있는가? 최대한의 진실은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런 의미에서 커버는 자기가 본것 만을 보여 줌으로 자신이 말하지 않는 모든 것이 '보여주는 것'뒤 에 숨어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미니멀한 일상 뒤에는 그 일상을 움직이는 '알수 없는 거대한 것'이 있고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기에 말해질 수 없다. 그래서 커버는 윙크를 찡긋하며 웃는 것이다. 말안해도 알지? 그러나 그 윙크에 맞장구 치며 웃기에는 아직 나는 젊다. 그래서 다시 탈출구를 찾아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글쎄, 아직 나는 잘 모르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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