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모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가 뭔데 내 외모를 평가해. 살찐 사람 몸은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건가. 게다가 긇지 않은 복권이라니. 상대방은 누구보다도 절실히 자신의 현실을 살아가는 중인데 타인이 왜 함부로 그 사람을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로 구정하는 것인가.
평생 가까워질 이유가 없는 사람의 청첩장을 받아 들 때마다 나는 아득하고도 뜨악한 기분이 든다. 결혼을 하지 않은 한 40대 선배는 그동안 나간 축의금만 해도 웬만한 중고차 한 대 값이 넘는다고 토로를 할 지경이니, 청첩장을 둘러싼 일종의 자본주의적 배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고를 쓸 때마다, 고료가 입금될 때마다 마치 텅 빈 우주에 한 줌의 먼지가 된 것처럼 공허한 마음이 들고는 한다. 그래도 아직은 젊으니까 다행이야, 하는 생각을 하며 나를 달랜다. 그럴 때면 문득 스무 살의 그 어느 날 샤워 가운을 입은 채 내게 "Always be young"이라고 말했던 미국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제야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아무런 소속 없이,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이 시간에 거리에 서 있다는 것을 절감했고, 그것은 무척 생경한 감각이었다. 언제나와 다름이 없는 평일 오후의 한낮인데 모든 게 달라져버린 듯한 느낌. 결국 내가 향한 곳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집이었다. 가방이 무겁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그렇게 됐다.
나는 매일 싸우는 것처럼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내 뜻ㄷ로 되지 않는 세상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람들과,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말이다.
때때로 나는 내 몸에서 지구를 발견한다. 무기질이 부족해 손톱이 잘 부서지고, 면역력이 떨어져 건선이나 지루성피부염 같은 만성질환이 생겨버린 내 몸. 필요하고 쓸모 있는 것은 부족하며, 온갖 쓰레기들이 꾸역꾸역 점령하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구조물을. 이 모든 악순환에는 결국 단 하나의 해결책밖에 없는 것 같다. 절제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을,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이 때문에 나는 지금도 배달 앱을 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다짐하는 중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지구(?)를 위해서 말이다.
외적인 모습에 최선을 다한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일종의 허상처럼 느껴졌고, 내가 지금껏 가져왔던 쓸데없는 자기 강박의 연장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매분 매초 더 나은 가치 기준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최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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