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와 그 가족들의 삶이 중요하다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할까. 가해자의 범죄로 인해 잿빛으로 일그러져 버린 피해자와 그 피해자의 가족들의 삶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닌 걸까? 계속 이렇게 숨죽여 웅크린 채로 살아야 하는 걸까? - P181

내게도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들이 너무 벅차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사실 난 괜찮지 않았다. 무죄가 나왔을 때도, 유죄가 나왔을 때도 나는 그결과를 받아들이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무중력 상태에서 멍하니 진공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앞으로 걷지도 뒤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발을 땅에 딛지도 하늘에 닿지도 못하고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 P213

가끔은 나의 삶이 너무 끈질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작은 숨결만 있으면 되었다. 메마른 겨울나무처럼 소리 없이 죽어가다가도, 아주 작은 봄의 기운만 느끼면 새순을 피워내는 그런 삶. 손톱만큼의 희망만 있으면 되었다. 미투를 하기까지, 거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그 작은 희망을 보고 말할 수 있었다. - P311

성폭력 피해자는 당신과 다르지 않다. 그저 잠깐 교통사고를 당했을 뿐, 그 사고가 깊어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뿐, 결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겪지 말아야 할 끔찍한 경험을 했을 뿐이고, 보통의 사람으로 보통의 일상을 살아간다. - P317

완결을 바랐다. 기록을 모두 마치면 책이 끝나듯 이 힘겨운 싸움도 끝이 나길 소망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미결이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이 문장의 마침표가 그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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