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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스트 마네
홍일립 지음 / 환대의식탁 / 2022년 8월
평점 :
절판
<모더니스트 마네>의 저자 홍일립입니다. 먼저 cyrus님의 코멘트에 감사드립니다.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분을 만난다는 것은 저자로서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cyrus님의 지적대로 최초 출간 시 표지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즉각 교체하게 되는 헤프닝이 있었습니다. 저자의 본의와 무관하더라도 저자의 입장에서는 독자들에게 송구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일부 편집과 교열 상의 미진함으로 인해 몇몇 오탈자가 발생된 점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며 개정본에서는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독자들에게 오해를 야기할 수 있는, cyrus님의 몇가지 지적에 대해서는 바로잡고자 합니다.
첫째, cyrus님이 지적한 대로 75쪽 쿠르베의 <센 강변의 아가씨들>은 여러 교양서에도 많이 볼 수 있듯이 누드화가 아닙니다. <풀밭에서의 점심>과 <센 강변의 아가씨들>이 다른 장르임에도 루이 피에라르가 비교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두 사람 간의 예술적 기질 차이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이클 프리드 또한 두 사람 간의 예술적 지향 상의 차이를 누드화 비교를 통해 분석한 바 있습니다(Michael Fried(1990), Courbet’s Realism,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201-204). 프리드는 쿠르베의 누드화 <여인과 앵무새>를 마네의 <올랭피아>와 <풀밭에서의 점심>의 비교대상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제가 관련된 단락을 다시 읽어보니 읽은 이에 따라서는 잘못 읽힐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문장 사이에 연결어를 넣거나 프리드의 비교대상으로 적시하였다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프리드의 견해를 인용하는 문장에서 각주에 명확히 밝힘으로써 그의 비교대상이 누드화 에 한정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의 "<센 강변의 아가씨들>이 누드화가 아니다"는 지적은 저자가 마치 이 그림을 누드화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오해를 야기합니다. 저자는 이 그림을 누드화로 적시한 바 없습니다. 오류가 아님을 인지하기 바랍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그림이 그러하듯이, 저자는 위에서 언급한 마네와 쿠르베 그림 모두를 파리와 뉴욕의 소장 미술관에서 직접 보고 관찰한 바 있습니다.
Michael Fried(1990), Courbet’s Realism,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201-203.
둘째, 107쪽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e)의 판화 표기문제인데, 님도 잘 알고 있듯이 이 판화가 소실된 라파엘로의 원화를 밑그림으로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이 판화가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을 계기로 유명해진 것도 서양미술사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표기할 때 어느 누구도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종종 라파엘로의 원본을 적시하는 경우는 있으나, 라이몬디 표기는 학계에서 거의 공인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예시하듯이 학술서든 교양서든 라이몬디의 작품으로 표기합니다. 즉 “지금은 사라진 라파엘로의 원작을 밑그림으로 하는” 라이몬디의 판화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ubin, James H.(1999), 『인상주의』, 김석희 옮김, 한길아트, 2001. 62쪽). 따라서 표기 오류라는 님의 지적은 맞지 않습니다.
Michael Fried(1996), Manet's Modernism: or, The Face of Painting in the 1860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 56.
Rubin, James H.(1999), 『인상주의』, 김석희 옮김, 한길아트, 2001, 61쪽.
* 한글로 번역된 여러 교양서에서도 라이몬디의 판화 표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몇가지 예를 더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Düchting, Hajo(2003), Wie erkenne ich? die Kunst des Impressionismus, 『인상주의, 어떻게 이해할까?』, 이주영 옮김, 미술문화, 2007, 88쪽.
Bartolena, Simona(2006), Impressionist, 『인상주의 화가들』, 임동현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8, 33쪽.
Crepaldi, Gabriele(2006), Grande Atlante dell' Impressionismo, 『인상주의-영원한 빛, 움직이는 색채』, 하지은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9, 39쪽.
셋째, 184쪽, <에밀 졸라의 초상> 속에 삽입된 작품 설명과 관련된 부분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도 작품 표기상 착오를 범했고 cyrus님의 지적도 잘못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의 착오부터 말하자면, “고야의 동판화 <작은 기사들>”은 <바쿠스의 승리 또는 술주정뱅이들>의 오기임을 밝힙니다. 저자는 마네 연구가인 제임스 루빈의 견해(Rubin, James H.(1999), 윗 책, 73쪽)를 따랐습니다만 무심결에 작품 제목을 <바쿠스의 승리>가 아닌 <작은 기사들>로 잘못 표기하는 실수를 범한 것 같습니다. 왜 그랬는지 어이가 없기도 하군요. 루빈은 “에스파냐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선배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밑그림으로 제작한 동판화”로 쓰면서 그림 제목을 그냥 <바쿠스>로 쓰고 있는데, <바쿠스의 승리 또는 주정뱅이들Le triomphe de Bacchus, El Triunfo de Baco o Los Borrachos, The Triumph of Bacchus or The Drunks>이 정확한 표기입니다. 개정판에서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Rubin, James H.(1999), 윗 책, 73쪽
<에밀 졸라의 초상>의 부분도
벨라스케스, <바쿠스의 승리 또는 주정뱅이들>, 1628~1629, 유화, 225X165cm, 프라도 미술관
다음으로 cyrus님의 지적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님은 “<에밀 졸라의 초상>에 있는 <작은 기사들>은 고야(Goya)의 동판화 작품이 아니다. 벨라스케스(Velázquez)의 작품을 판화로 복제한 모사품이다.”라고 하였는데, 위에서 밝혔듯이 두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그림 제목은 <작은 기사들>이 아니라 <바쿠스의 승리 또는 주정뱅이들>이며 고야가 제작한 동판화 작품이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왜 이같이 틀린 정보가 유통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니 cyrus님의 문제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자세히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네이버 지식백과’의 <에밀 졸라의 초상> 난을 보면 이 부분에 관해 잘못된 설명이 눈에 띕니다. “<올랭피아> 위에 있는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원본을 모사한 <작은 기사들>이다”라고 적시하고 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앞쪽에서는 홀바인의 <대사들>과 <작은 기사들> 모사본까지 인용하는 오류가 발견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작성자를 이택광 교수로 밝히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찾아보는 지식백과임에도 아직까지 게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캡처 부분
이러한 오류는 이택광의 저서,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아트북스, 2011)에 기인한 듯합니다. 이교수는 이 책에서 똑같이 “<올랭피아> 위에 있는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원본을 모사한 <작은 기사들>이다”(71쪽) 라고 적고 있고, 다음 쪽에서는 마네가 그린 <작은 기사들> 모사본을 그림으로 올려놓고 이와 관련한 설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류입니다.
이택광,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아트북스, 2011)
윗 책, 71쪽
* 윗 책, 72쪽.
참고로 마네의 <작은 기사들> 모사본은, 그가 쿠튀르 화실을 다니던 시절 루브르박물관을 자주 찾아 여러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작업을 하던 중 그린 그림 중의 하나입니다. 마네는 <작은 기사들> 모사본을 1859~1860년에 그렸고, 2년 뒤에는 이를 동판화로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루빈은 아래 저서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네, <작은 기사들> 모사본
Rubin, James H.(2010), p.48.
마네, <작은 기사들> 동판화
Rubin, James H.(2010), p.66.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cyrus님이 알고 있는 지식은 아마도 이택광 교수가 쓴 ‘네이버 지식백과’의 <에밀 졸라의 초상> 설명난이나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에서의 관련 부분에 의거한 게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두 소스 모두 저자(또는 작성자) 오인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누구도 수정 요구가 없었다는 점은 다소 놀라운 일이기는 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사실 확인을 통해 정확하게 인지할 필요는 있습니다.
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을 감상함에 있어서 이 그림 속에 삽입된 ‘<올랭피아> 위에 있는 작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감상의 주요한 포인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여 설명하고 논증하여야하기에 지엽적이거나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책무가 있어 다소 길게 설명하였습니다.
이택광 교수의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는 인상주의 작가들에 관해 경쾌한 필치로 흥미롭게 소개한 양질의 교양서입니다. 여기서는 다만 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를 설명하는 데서 발견된 오류를 지적할 뿐이다. 이택광 교수는 문화비평 등 여러 방면에서 좋은 글을 쓰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분의 저서들 가운데는 큰 호평을 받은 여러 저서들이 있기도 합니다. 위의 오류와 관련해서는 이 분이 미술사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세밀한 검증작업을 거치지 않은 착오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나 이해해 봅니다. 그러나 사소한 실수가 아닌 만큼 본인에게 연락을 취하여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몇가지 사항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cyrus님의 지적 가운데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님의 리뷰를 보는 다른 독자분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바르게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모더니스트 마네>의 저작 동기와 핵심논지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cyrus님이 "마네의 작품세계를 미술사에 문외한 독자도 쉽게 설명한 책"이라는 감상을 적었듯이, 저자는 마네 예술과 관련된 여러 논점을 다루면서 비교적 쉽게 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마네를 소개하는 단순한 교양서는 아닙니다. 이 책은 수많은 문헌에 대한 분석 작업과 수백 점의 미술작품에 대한 직접 관찰에 기초하여 집필된 학술적 성격의 연구서에 가깝습니다.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이 책의 핵심논지는 "마네는 왜 모더니스트인가?"라는 물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길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만, 현명한 독자라면 이 물음을 따라 읽어보면 저자의 생각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상주의나 마네에 대한 연구는 새롭게 밝힐 게 없을 정도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분야입니다. 이는 저자가 이 글을 쓰기 전에 망설여진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두 가지 의도에서였습니다. 하나는 마네의 사례를 빌어 예술을 보는 시각의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특히 이 책의 4장 ‘형식의 문제’를 정독한 독자라면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술사 분야의 연구전문가들 사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그린버그, 프리드, 푸코 등의 마네 평론은 주로 회화 양식의 측면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의 견해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푸코나 프리드에 대한 저자의 부분적 비판은 이를 반영합니다.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마네의 언명과 마찬가지로 감상자 또한 “보이는 대로 느끼고 사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저자는 예술작품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5장과 6장은 화가 마네의 지적 성향 및 사회의식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와 연관된 연구는 로버트 허버트(Robert L. Herbert)를 필두로 하는 예일대 미술사학파의 연구자들(제임스 루빈, 폴 터커 등)과 티모스 클락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미술사가들에 의해 큰 진척이 이루어졌습니다. 마네를 ‘현대생활의 화가’로 조명하는 데는 이들의 공로가 컸습니다만 마네의 정치화에 대한 분석은 분산되어 있거나 단편적으로 처리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본서의 6장은 이에 대한 종합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마네는 천부적 재능을 지닌 장인 스타일의 인물이라기보다는 미적 작업과 지적 탐색을 동시에 추구하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화가였기에 저자의 논점이 그 곳에 자연스레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Robert L. Herbert(1988), Impressionism: art, leisure, & parisian society, Yale University.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이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진지한 토론과 담화는 독서문화의 수준을 한층 고양시킵니다. 겸허함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상대를 존중하는 의사소통 또한 지적 즐거움과 함께 큰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더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추가로 cyrus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한편으로 반가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안타까웠던 부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님의 글 중에 비속어를 연상시키는 'ㅅㅂ'이라는 표현은 글을 보는 이들에게는 무척 불편한 표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설령 불쾌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하더라도 공론장에서는 사용해서는 안될 부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음'을 지시하기도 하고 동시에 본인의 명예를 훼손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느 곳에서, 어느 대상을 상대로 글을 쓰더라도 타인에게 불쾌감과 상처를 줄 수 있는 감정적인 표현은 삼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