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 다시 진정한 문학을 찾아서
성민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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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순수한 독자가 왜?  왜 하필 나는 '문지'의 벌판에 와서 다른 비평서적(실천문학)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시골출신의 책을 좋아하는 한량에게는, 2부에 나오는 그의 '상업용 멘트'를 그저 넋없이 바라보며 '음 그가(비평가가) 말하는 책이니 무조건 좋은 책인가 보네. 보라구. 온통 작가에 대한 칭찬과, 해설들 뿐이잖아. 고작 비판이라고는 그 책을 다시 읽게 만드는 논증의 힘(변증법-자신의 논지를 더 다지기 위해선 반대이견이나 약점, 론을 포섭(다룸으로써)해서 합으로 나아가는 설득적 전술)에 대한 재발견이잖아. 비판도 칭찬을 위해 수렴되는 그의 전술이 의도적이라면 나는 감동을 받고 있다구. 분명히 좋은 책일 테니까. 사 봐야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

    라는 '공감의' 포화속에 나는 쏙 빨려 들어가 볼 뿐이다.

     적어도 (도서관에서 같이 빌렸던) '반대자의 윤리'라는 책을 쓴 비평가 고봉준씨의 책을 읽을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의 책은, 혹은 그 출판사에서 기고를 하고 있는 고명철씨나, 이명행씨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무언가, 작가들이 공정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적어도 인문의 꽃인 출판시장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침식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어도 누군가는 노력한다면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며,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려줄 비평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일꺠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간단하게 이 문지의 벌판에서, 고봉준씨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어떤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여기에서 그의 글을 홍보함으로써-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이다-의미를 지니리라고 본다. 

 

     "김정란은 시 비평의 윤리성을 질타하는 한 글에서 비평의 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위기는 세속적 성공과 권력을 위하여 스스로 문학정신을 저버림으로써 집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김정란, 영혼의 역사, 새움 2001)' 그렇다. 위기란 문학장의 제도적 문제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방기함으로써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비평이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비판이라는 소임을 저버리고, 몇몇 에콜과 문예지의 편집진, 그리고 문단권력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함으로써 자본과 권력에 포획된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김정란의 지적대로라면, 비평의 의의를 회복하는 첩경은 비평이 자본과 권력으로 표상되는 '세속적 성공'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의 문학정신을 지키는 데 있다. (P.30)"

  

        그리고  마지막으로, ( PS: )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선, 그의 책 110 페이지에 나오는 포스토모더니즘에 대한 료타로의 인용을, 재 인용함으로써, 이 저자(성민엽)에 대한 나의 자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배려를 잊지 않을 수 없다.

 

     "(...)절충주의적 작품을 선호하는 대중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예술은 키취가 됨으로써 후원자들의 '취향'을 지배하는 혼란에 영합한다 예술가, 화랑 소유주, 비평가, 대중은 모두 '뭐든 괜찮다' 속에 함께 뒹군다. 지금은 이완의 시대이다. 그러나, '뭐든 괜찮다'류의 이런 리얼리즘은 사실상 돈의 리얼리즘이다. 미적 판단 기준이 부재한 가운데 그 이윤에 따라 예술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며 유용하기도 하다. 만일 시대적 유행과 욕구가 구매력을 갖는다고 한다면 자본이 모든 '욕구'를 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리얼리즘도 모든 경향들을 조정한다."

    

 

                                                                                    그럼 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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