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시게노부 후사코 지음, 최순육 옮김 / 지원북클럽(하얀풍차)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아프리카 케냐의 삼부루 조수보호지역에 사는 한 암사자가 새끼 영양을 2주일간 보호했다고 한다. 동물은 어린 것을 돌보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전문가가 말한다. 돌보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암사자는 함께 강가로 물을 먹으러 갔다가 깜박 잠이 들었고, 그때 한 수사자가 새끼 영양을 잡아먹어버렸다. 한 관리인은 '잠에서 깬 암사자가 매우 화가 나 수사자 주위를 돌며 10차례나 포효했다'고 전한다. 이후 암사자는 보호지역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겨레' 2002년 1월 8일자 외신면 요약)

이 에세이를 쓴 시게노부 후사코라는 일본여자는 30년동안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함께 테러활동을 해온 적군파의 멤버다. 1999년 10월에 체포되었다. 아랍 전사와의 사이에서 난 자신의 27세된 딸에게 일본국적을 취득하게 하기 위해서 일본정부에 낸 글들을 포함하여 쓰여진 자전적인 내용을 기록한 에세이다.

선전의 의도가 보이는 곳이 있고, 또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오래 현장에서 투쟁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실무가다움이 있었다. 제목만 해도 그렇다. 일본어로 된 원제를 해석하자면, '사과나무 아래에서 너를 낳기로 결정했다'인데, 억척 모성과 비인간적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테러리스트의 긴장이 느껴진다.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며칠 전 위에 소개한 신문기사에서 만난 암사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후사코가 행한 테러로 인하여 사망하였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잔인하다고 생각하여 그와같은 이미지를 연상한 것은 아니다.

후사코의 고졸 사원으로서의 회사생활, 야간대학생활과 학생운동, 그리고 세계혁명기지인 베이루트에서의 투쟁 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속을 가지고 있다. 후사코는 제국적 지배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바탕으로 하나의 길을 살아갔던 것이다. 이 과정이 모성을 지닌 채 야수로서 자연스러운 삶을 사는 암사자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일전에 '하마에게 물리다'라는 소설을 통해서 1972년의 연합적군 사건의 전말을 전하고 있다. 일본의 깊은 산속 아지트에서 무장훈련을 하던 적군파의 동조자들은 자체 재판을 통해 10여명의 동료에게 사형을 집행한다. 아랍에 있던 후사코는 이들의 살인행위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후사코는 이어 말하길,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을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력으로 맞서는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는 자신의 생명도 다른 이에게 내어 주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전체주의적인 사고나 소영웅주의로 격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속에서 만나는 아랍의 상황에서라면 테러의 주장에 어쩔 수 없는 정당성을 발견하게 된다.

1972년 연합적군사건에 즈음하여 서방 세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변혁의 목소리는 희미해졌다. 그러나 후사코가 땅을 딛고 있는 아랍에서 전쟁은 이스라엘의 금융자본을 바탕으로 늘 계속되어왔다. 그게 무익하고 모험적인 소영웅주의 행동이기만 했을까. 1990년대의 후반의 아랍과 이스라엘 관계에서 아랍이 얻은 얼마 안되는 몫이라도 후사코 등의 삶의 결과물이라면 결과물일 것이다.

우리에게 적군파는 잔혹하고 비합리적인 테러리스트로만 소개되어 있다. 여기 그들의 하나의 진실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살아남은 연합적군파 청년은 튼튼한 수의사가 되어 있다. 그리고 후사코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딸을 위한 일을 준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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