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99년에 쓰여진 이 소설책은 하루키의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수용되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작중화자는 아마추어 소설가로, 그답게 하루키식의 비유법이 조금 서투르고 더욱 과장되어 쓰여지고있다. 주인공은 현실에서 괴로운 일을 겪고, 그때문에 이세상에는 진짜 자기의 그림자만 남게 된다는 구도도 하루키의 너무나 전형적인 것이다.

일본쪽은 모르겠지만, 한국의 통신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하루키식 비유법과 구도의 글들이 쓰여져 왔는지. 하루키는 자기를 모방하여 글을 씀으로써 왜 그런 글들이 쓰여졌던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상품의 상징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지금의 자기 외의 진짜 자기가 과거의 어느때 존재했을 것이라는 생각. 어느 때 상품가운데서 진짜를 찾아내고(예를 들어 좋은 음악)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끝에 진짜 자기를 찾을 가능성을 본다는 것. 하루키가 처음 소설을 썼던 곳이 이 지점이고 그 지점에서 뭔가를 쌓아올리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태엽감는 새>에서처럼 그 쌓아올리는 일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 끝에 하루키는 그의 독자들이 그를 흉내내는 원형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주인공들이 현실생활에서 강해지고, 결말에 '회복'이 있었다는 점. 하지만 만약 서투른 소설가의 문체를 흉내내지 않았다면 이 소설에 이런 결말이 가능했을까? 그래도 <태엽감는 새>의 실패에서 하루키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추어 소설가적'이라고 했지만, 웃음을 남기는 과장된 어법들이 그렇게 보이도록 한다는 것이고, 이야기의 구조는 참 정교하다. 특히 줄곧 이야기의 관찰자에 불과하던 작중 화자가 어느덧 자기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원래의 주인공의 이야기는 사라져버리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렇게 이야기가 바뀌는 장면은 하루키를 흉내내어 글을 써본 우리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우리 삶이었다.

딴 이야기. '스푸트니크'가 뭔지 하루키팬들은 잘 모르던데, 나에겐 너무 친숙한 이름. PSSC 물리학 책이 바로 '스푸트니크 쇼크'이후 갑자기 어려워진 미국 과학교육의 산물. '스푸트니크'는 '여행의 동반자'라는 뜻이란다. 냉전시대에 이런 이름을 지은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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