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뱅이 정신분석 1 - 개정판
기시다 슈 지음, 우주형 옮김 / 깊은샘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서점 가판대에서 수없이 많은 정신과의사들의 책을 본다. 그 책은 자신의 정신의 건전함에 대한 불안에 떨지만 비싼 정신과 치료비를 부담할수 없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흔히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러나 의사가 잡담처럼 지식과 임상사례를 늘어놓는 그 책들은 대부분 허망하였다.

일본인 심리학자가 쓴 이 책은 다르다. 기시다 슈는 정신병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되묻고 있다. 푸코는 정신병을 근대의 성립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기시다 슈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정신병이라는 개념을 인정한다면 근대사회 자체가 정신병이라는 주장을 한다. 70년대 말 기시다 슈의 칼럼이 '현대사상'같은 일본의 잡지에 실리면서, 이것은 '유환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성립하게 된다. 유환론이란, 인간의 경험은 그의 사적 환상에 기인한 것이고, 사회란 사적 환상들이 공동화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책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것은 체계적인 사상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산만한듯한 이야기의 구조이다. 그는 유환론의 틀로 일본의 근대사와 일본의 근대작가들을 분석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픽션'이 공동화되었는가 하는 논의는 요즘 학계의 근대화론과도 직접 이어지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 분석은 한국의 정신과 의사들이 하는 식의 치료자가 환자를 대상화하여 다루는 투의 방법에 의한 것은 아니다. 책에서 언급된 반정신분석학의 입장과도 유사하게, 분석대상을 분석하는 이쪽도 사적 환상에 사로잡힌 존재임을 시인하고 있다. 따라서 분석은 일방적인 치료나 폭로가 아니라 대화다.

이 책에서 오래 기억되는 이야기 하나를 언급하고자 한다. 갑과 을이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자. 갑의 입장에서는 을이 실체로서 멍청하거나 악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은 을의 실체에 대해 반응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을의 입장에서는 갑이 실체고 자신은 반응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실체와 반응이라는 구조는 풍부한 상상력을 지녔다. 기시다 슈는 현재의 서양적 과학을 '실체학'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의 변증적 극복과정의 학문을 '커뮤니케이션학'으로 명명하고 있다. 오래전에 번역되어 조용히 서점진열대에서 사라져간 책이지만, 이 책의 상상력의 흔적은 아직 내게 남아있다. 가장 소중한 책 가운데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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