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 미진신서 7
한스 리히터 지음, 김채현 옮김 / 미진사 / 1985년 4월
평점 :
품절


리히터의 이 책은 표피적으로만 이해되거나 풍문으로만 가볍게 생각되었던 '다다 운동'에 대한 충실한 기록서로, 다다 운동의 실태를 알기 위해 꼭 읽어야 하는 책일 것이다. 저자인 한스 리히터 자신이 다다 운동에 참여한 만큼 기록에 대한 상당한 신뢰성을 갖는 책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주로 짜라를 중심으로 다다운동을 서술했던 일반적인 문예사조사의 다다 소개와는 달리, 베를린 다다나 하노버 다다에 대한 실상을 기록해주고 있어서 다다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고 있다.

리히터는 [들어가는 말]에서 다다가 스캔들이 원동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라는 물음이 다다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25면). 다다가 결코 단순한 파괴를 위한 파괴의 예술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다다의 무정부주의적 충동은 다다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지만, 그것은 모순을 구성하는 한 축일뿐이다. 모순이 운동의 본질이라면 말이다. 다다는 기성의 것을 파괴하면서도 그 파괴에 의해 지평선이 드러난 미지의 것을 향해 움직인다. 파괴하면서 찾는 모순적인 행위는 다다의 생명을 이끈 힘이었다. 하지만 이 모순의 한 축이 사라질 때 다다는 그 생명이 다한다는 것이 리히터의 입론이다.

이런 다다관은 그의 충실한 기록에도 관철되어 나가고 있다. 쮜리히에서 다다가 어떻게 탄생하였고 다다의 구성원들의 개성은 어떠하였으며 그들의 활동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가를 꼼꼼히 정리하면서 각각의 예술을 해체하여 하나의 종합예술을 꿈꾸었던 후고 발과 도발적이고 발랄한 짜라라는 두 개성이 다다를 이끌었지만, 발이 더 이상의 대책없는 다다의 행위에 참지 못하고 다다를 떠나면서 다다의 긴장력은 떨어졌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파리 다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짜라와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브르통의 긴장이 파리 다다를 이끌었다면 역시 파리 다다의 종말도 브르통이 다다에 등을 돌리고 초현실주의를 선언하면서 긴장의 축이 와해되어 결국 다다의 종말이 왔다고 말한다.

그의 책에서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도움을 주는 바는 다다 활동의 충실한 기록 외에도 다다가 다다 발생 이전의 전위적 예술 운동과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우연'을 들고 있다는 점과 뉴욕 다다, 베를린 다다를 소개해주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반 당시의 유럽 전위예술은 과거 중압감으로 내려오던 예술들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예술정신과 예술기법을 창안했다. 수사법의 반대, 활자의 자유로운 활용 등은 이미 미래주의가 선취했고, 꼴라쥬, 추상 미술은 입체파가 그 전조를 보여주었다. 다다이즘은 이러한 기법을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었지만 여타 다른 전위예술과 다른 정신과 창작 방식을 보여주었는 바, 그것이 우연이고 우연에 의한 창작방법이다. 종이를 찢어 뿌렸다가 그것을 붙여 그림을 만드는 아르프, 신문에서 활자를 오렸다가 섞고 하나 하나 뽑아 시를 만든 짜라의 행위는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뒤상을 그 대표로 하는 뉴욕 다다의 심오한 철학과 그의 예술의 의미를 밝힌 부분도 변기를 전람회에 보낸 기발한 사람쯤으로 평가되곤 하는 뒤상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 볼만하고, 상대적으로 소개가 되지 않았던 베를린 다다의 예술 운동 소개 부분에서는 다다 운동이 정치적 급진주의와 어떻게 결합되었던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20세기 초반, 전위 운동의 절정을 보여주었던 다다의 실상을 알기 위해선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근대시문학연구
오성호 / 태학사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오성호는 이 책에서 서정양식으로서의 시의 특수성을 견지하면서 이를 유물 변증법적 반영론으로 설명하고, 이를 기반으로 리얼리즘의 요건을 탐색한다. 일반 미학-반영론적 미학을 통해 서정이란 특수한 범주를 설정함으로써 탄탄한 이론적 고리를 만들면서 시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는 입장을 가질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먼저 해명해야 할 문제는 시 역시 소설처럼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는 <시에 있어서 리얼리즘 문제에 관한 시론>이라는 책 속의 대표적 논문에서 '시는 전적으로 시인의 주관성에 의존한다.'며 못박고는 '시인의 주관, 내면세계란 것은 객관적 현실이 시인의 의식 속에 반영된 것'(281면)이라며 반영론적으로 시에 대한 설명을 한정짓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리얼리즘이라고 오성호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성호는 전형성이라는 개념을 끌어오면서 특정 시가 리얼리즘적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오성호는 시인의 '목소리'를 중요시한다.

시는 시의 '목소리' 주인공의 '주관적'인 체험 내용을 진술한 것이 곧 그 내용과 형식을 이룬다고 보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서정적 주체라고 이름짓는다. 서정적 주체는 '시인의 창조적 자아가 객관화된 시적 형상'(286면)인데, 그것은 시인의 주관에 전적으로 종속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환경이나 상황은 서정적 주체의 체험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 있기에 시에서는 인물의 전형성이나 상황의 전형성을 논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서정적 주체가 소설 속에서의 인물처럼 구체적인 형상을 지니는 대신 '목소리'로서만 감지되고 간접적으로만 확인되기 때문에 서정적 주체가 진술하고 있는 내용과 진술방식, 그리고 그것에 의해 환기되는 정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서정적 주체의 주객 통일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 표현된 정서는 이미 그 속에 주객관계를 통해 획득된 현실에 대한 인식과 가치 평가, 태도 등을 포괄한다. 오성호는 이 정서에 전형을 관련시켜 '이 서정적 주체,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서정적 주체가 환기하는 정서, 혹은 정서적 체험'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즉 시의 서정적 주체가 환기하는 정서적 체험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의 정서로 형상화되었으면서도 동시에 그 시대의사회의 객관적인 삶에서 우러나는 보편적 정서를 환기하는 것이 시의 전형성 획득 여보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리란 것이다. (289면)

이러한 주장은 전형의 개념만이 리얼리즘의 척도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인데, 하지만 무리한 결론을 낳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정서의 전형성'이란 개념은 실로 당혹스러운 개념이 아닐 수 없는데, 정서가 감성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한다면 과연 감성에도 전형적인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전형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기쁨의 전형성'이란? 이런 개념은 실제 작품 평가에 작용하면 또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기도 하다. 이용악의 <낡은 집>의 전형성을, 정서의 전형성에서 찾은 결과, '전망의 부재 상태에서 허덕이는 서정적 주체와 그것이 환기하는 절망적인 비애'(297)라는 주장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시가 발표된 1930년대 후반의 '정서의 전형성'이 이러하다면 당시의 리얼리즘 시는 절망적인 비애의 정서를 보여주는 시라고 할 것인가? 이러한 이론은 시 창작을 위축시키는 실제 비평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시의 특수성으로서 정서를 들고 정서의 전형성을 가치 평가의 중심에 두면서 그 정서를 시인의 주관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하면, 그 정서의 최대치는 투쟁적 정서라고 주장할 수 있고 투쟁성의 정서가 우러나오지 않으면 시인의 사람됨이 아직 그에 못미쳤다는 식의 평론에 이론적 기반을 주는 셈이 되는 것이다. 시의 특성을 살리려다가 시를 더욱 위축시킬 가능성이 오성호의 논의엔 잠재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눈팔기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과의식사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일본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리는 나츠메 소오세끼의 유일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 이 책은, 자전적 성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의 도입과 이로 인한 가족 관계의 변모,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지식인에 대한 날카로운 반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어렵사리 영국 유학을 갖다 오고 대학 강사가 된 겐조에게 옛날 헤어졌던 양아버지가 나타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이 양아버지의 등장을 통해 겐조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여 도달하게 된 현재의 자기를 성찰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겐조의 자신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근대에 돌입한 일본인의 문제를 짚은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뿌리없다고 생각하는 겐조의 내면적 방황은 바로 근대 사회 관계의 핵심적 고리라고 할 수 있는 돈 때문이기에 그렇다. 겐조가 양아들로 시마다 밑에 들어간 것은 막내인 겐조를 아버지가 양육할 능력이 별 없었기 대문이었는 데다가, 시마다가 이혼한 후 다시 친아버지 밑으로 겐조가 들어간 후 양아버지도 금전상 어려워지자 겐조를 양육했다는 사실로 아버지로부터 돈을 뜯어 가려고 했다. 겐조는 아들로서의 애정 대상이 아니라 돈을 위해 주고받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가 두 아버지를 모두 싫어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두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시마다의 등장은 뿌리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현재의 그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 가족 아래서의 개인의 존재를 날카롭게 집어내는데 이 소설의 문제성은 끝나지 않는다. 묻혀져 있던 겐조의 주변 가족과 겐조의 만남을 한 축으로 하면서(종축이라고 하자) 그 만남에 대한 아내와의 대화가 또 소설의 한 축(횡축이라 하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면이 많은 것이다. 종축에 서 있는 겐조의 흔들림은 횡축의 아내와의 관계에도 투영되어 있다. 근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근대적 지식인은 자신의 과거, 그리고 그에 얽혀 들어가는 현재의 생활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방편으로 지식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 겐조의 모습에서, 특히 생활에 밀착해있는 아내와의 말싸움에 지식을 늘어놓으며 아내를 짓누르려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므로 근대 일본 지식인 탄생의 사회 역사적 배경을 가족 관계를 통해 드러내고, 그리하여 탄생된 그 지식인이 삶에서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가 날카롭게 해부한 소설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거창하다고 할 이러한 문제들은 그러나 겐조의 일상사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이 소설은 좀 지루하리만큼 큰 사건이나 굴곡이 없다. 하지만 양아버지가 나타나 돈을 얻어 가는 이 작은 사건을 통해 당시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조금씩 드러내어 뿌리까지 파헤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 뿌리를 보기 위해서는 차분하고 꼼꼼한, 그리고 인내력 있는 독서를 이 책은 요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7
모리 오가이 지음, 김용기 옮김 / 소화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현 일본 문학은 매우 활발히 소개되고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지만, 실상 일본 근대 문학의 고전들은 소개가 거의 되지 않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나쯔메 소오세끼와 더불어 일본 근대 문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모리 오가이의 장편 소설 <청년>이 소개된 것은 일본 문학을 제대로 아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일이다.

<청년>은 성장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소설가 지망생 쥰이찌가 본격적으로 당시 일본의 가장 첨단적인 모습을 통해 소설을 쓰기 위해 동경으로 상경하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소설 쓰기는 진척되지 않는다. 급격한 자본주의화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큰 혼동에 싸여 있게 된 이 일본의 수도는 시골뜨기 쥰이찌로서는 파악하기 힘든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경의 사회상과 문화를 그 심층에 파고들어 소설가적 안목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여러 새로운 체험의 충격에서 생각을 가다듬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 쓰기보다는, 일기를 쓰며 근대 동경에 대해 적응하지 못한 자신을 성찰한다. 특히 자신의 동정을 주게 된 사카이 부인과의 사건과, 곧 이은 그녀에 대한 환멸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 사건으로 그는 당시 동경의 근대적 새로움이라는 것이 하나의 가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사카이 부인에게 치욕을 느끼고 난 후 새로운 충일감으로 소설을 쓰고자 마음먹게 되었을 때 그 소설의 소재를 고향의 돌아가신 할머니가 들려준 전설에서 따오려고 한 쥰이찌의 결심이 그것을 말해준다.(그런데 바로 이 소설가 지망생이 갖가지 체험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구도는 바로 성장 소설의 구도라 할 수 있다.)

한데, 근대 동경의 이야기가 아닌 대대로 무려 내려온 전통적 이야기에서 근대적 문학 장르인 소설을 개척한다는 이 아이러니칼한 결심은, 소설을 자본주의적 근대의 퇴폐성에서 구해내려는 결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당대 일본에서 맹위를 떨치던 자연주의 문학으로부터 소설을 빼내야 한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러므로 모리 오가이의 근대 동경에 대한 세태 비판이자 탈자연주의라는 자기 문학의 전망을 끌어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모리 오가이는 이 소설을 쓰고 정말로 전설을 활용하는 역사소설로 나아갔다고 한다.

이 소설을 통해 초창기 일본 근대 소설의 한 모습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또한 근대 초기의 혼란상 속에서 자신을 정립하고자 하는 한 청년의 모습에서 참다운 근대 정신을 정립하려고하는 일본 문인들의 노력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고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런 소설들이 더 많이 소개되어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 통해 피상적 일본관, 일본인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번역이 직역투라 한국어로서는 어색하다는 점이다. 윤문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굴곡이 별로 없어 좀 지겨운 느낌이 든다라는 점도 이야기해볼 만하다. 대체로 일본 자연주의 소설이 그렇다고 하는데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결론을 내장하고 있는 이 소설도 역시 자연주의적으로 쓰여졌다고 생각되어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실제 인생에 극 같은 큰 굴곡은 별로 없고 잔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이 삶을 수놓는 것이라면 일본 자연주의 소설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삶 자체를 그리려고 하였던 것 같다. 이 소설의 끝을 읽으면 대단원은 보이지 않고 사건이 진행되다 만듯한 느낌이 든다. 인생에 대단원이란 없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얼리즘의 시정신
최두석 / 실천문학사 / 199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리얼리즘을 선도적으로 주장한 최두석의 글을 모은 책이 <리얼리즘의 시정신>이다. 이 책에서 1984년에 발표된 1)'시와 리얼리즘', 89년에 발표된 2)'이야기시론', 90년에 발표된 3)'리얼리즘의 시정신'은 그의 리얼리즘 시론의 골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들이다.

1)에서는 서정과 서사를 구분하는 기준과 시와 소설을 구분하는 기준은 서로 다른 위상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서정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의 대상 영역을 사건, 이미지, 감정, 생각이라고 하고 리얼리즘 시의 가능성은 능동적인 생각이나 동태적인 사건에 넓게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27면) 또한 작품 자체에 현실의 구조적 진실이 얼마나 잘 드러나 있는가에 사회의 진보에 대한 문학의 기여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사회의 구조적 진실이란 사회의 총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전망의 충실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2)는 이러한 시의 리얼리즘 달성을 위한 창작 방법으로 이야기 시를 제안한다. '가치가 왜곡되어 있는 시대에 가치 있는 이야기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의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17면)고 전제하고, 일인칭 양식이라는 시에서도 이야기를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역사적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사람살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하기 위해서는 시 속에서 이야기를 제대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즉 서사지향성 문제는 시의 현실 대응력 문제이고 시에서의 리얼리즘 실현 문제다.' 이러한 리얼리즘의 성취에의 노력에 의해 현실을 부정하는 진보주의나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비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3)은 이러한 현실주의의 정신을 내세워 80년대 말에 나타나는 경향인 비관주의와 진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전망을 찾지 못하는데서 발생하는 비관주의나 민중을 선동의 대상으로 삼는 진보주의보다 창작자에게 중요한 것은 '부당한 사회 현실 속에서 그들(대중들-인용자)의 욕망이 어떻게 억눌리고 왜곡된 형태로 발산되는 가를 보여주는 전형적 형상을 찾아내는 일'(46면)이라는 것이다.

최두석이 제기한 리얼리즘 시론은 당시 체계적으로 시의 리얼리즘을 밝힌 논의가 없다라는 것을 감안하면 선구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글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의 리얼리즘시론은 문학과 시의 본질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리를 통해서 도출되고 있기에 정연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또한 많은 반론에 부딪칠 수도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리얼리즘 시를 서사와 사상으로 묶어 놓는다면 시가 가진 무기, 즉 독자의 정서를 움직여 삶에 대한 다른 태도와 생각을 갖게 만든다는 특유한 효과를 시에서 제거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시가 인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충격적 정서 체험을 통해 가져다 주는 것이 그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정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 시의 리얼리즘을 말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의 이론의 기반이 되는 감정, 사건, 이미지, 생각에 기초하여 시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시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고 여타 다른 장르, 특히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우선 시의 특수성을 밝힌 후에 시적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지만 반론격으로 제시한 나의 의견도 모자란 부분이 많다. 최두석의 시론은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으나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