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 도미노 총서
클로드 카도즈 / 영림카디널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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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은 우리의 생할에서 하나의 삶의 형식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익숙하진 않다. 우리는 대부분 영화를 통해 만들어진 가상 현실의 인상을 통해 가상현실의 의미를 파악해 왔기 때문에 도리어 더 생활과는 거리가 먼 현실로 가상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상현실은 영화 속의 현실, 공상에 공상을 더한 현실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영화 속에 등장하는 완벽한 가상 현실의 세계는 그것의 가능성을 공상화한다.

그러나 실제로 가상 현실은 계속 개발되고 있으며 그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 진행되는 가상 현실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면서 그 인류학적 의미와 의의에 대해 생각해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컴퓨터나 현재 이룩된 관련 기술에 대한 사전 정보를 거의 갖지 못한 나로서는 독파가 꽤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어렵지 않게 독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책이다.

비록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더라도 이 책은 가상 현실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는가를 대충 실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은이는 가상 현실이 이전의 재현 - 연극, 사진, 영화, 텔레비전 등을 통한 재현 -과 그 성격과 개념이 다른 재현 양식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컴퓨터의 발전으로 가능할 수 있었는데, 이전의 재현 양식이 실재를 어떤 매체를 통해 반영하는 양식이었다면(비록 그 반영상은 왜곡이나 굴절이 가능하다고 해도 실재 그 자체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재현 양식은 아날로그 기호를 디지털 기호로 바꾸어 재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변형이 가능한 양식이다. 디지텰 기호로 번역된 상, 음들은 그것을 가지고 다시 조합시켜 새로운 현실상 및 음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하기에 가상 현실이 실제적으로 가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상 현실 기술의 발전은 그야말로 어떻게 하면 좀 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실감을 줄 수 있느냐에 그 목표를 두고 이루어졌다. 우선 삼차원적 입체 영상을 만드는 것에 기술적 노력이 주어졌다. 영화나 텔레비젼 매체의 평면 재현에서 벗어나서 상에 깊이와 굴곡을 만들어내는 게 관건이었다. 또한 사람의 시각에 따라 상이 변화되어 보인다는 점 역시 기술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시각의 움직임에 따라 상도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이러한 난점 역시 극복할 기술적 수단이 마련되었지만, 실제감은 시각만으로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각, 촉각에도 실감을 줄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어야 했다.

인간의 인지는 시각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시각 역시 보려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물체의 형태만이 아니라 질감까지 느껴야 그 사물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좀 더 완벽한 가상 현실을 위해서 이른바 '통합적 재현'을 위한 기술적 노력이 가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실제감을 부여할 수 있다는 기술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은이는 묻고 있다. '한 대상을 거추장스럽고 돈도 많이 드는 또 다른 하나의 대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123면) 이에 대해 그는 그 이유가 간단하다고 말한다. '어떤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존재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을 가라앉혀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7면) 그것을 비판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이름지어 '현대판 우상숭배'라 그는 부른다.

'인간의 상호 작용 능력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확장되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현실들을 자연적이고 안전한 현실로 위장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적응시키는 편이 나을 것'(125)라는 지은이의 뼈있는 제언은, 최첨단 기술을 발전시키는 인류의 또 다른 이면, 즉 나약함에 대한 경고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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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노벨레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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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니츨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활약한 오스트리아 작가라고 한다. 프로이트와 동향 사람이고, 또한 그와 같은 세대에 속하기도 하는 이 작가에 대해 사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이라는 기묘한 영화를 본 후 그 영화의 원작이 바로 이 <꿈의 노벨레>라는 작품인 걸 알고서야 이 책과 작가를 알게 되었고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정신 의학 분야에서 추구하고 발견한 것을 역시 의사출신인 슈니츨러는 소설에서 추구했다라고 이 책의 해설에선 말하고 있는데, 정말 이 소설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일종의 탐험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라고 여겨졌다. 꿈이 은밀한 소망의 충족 장소라고 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인 프리돌린이 겪는 기묘한 이야기와 이에 대응되는 프리돌린의 부인 알베르티네의 꿈은 중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직업인 부부의 은밀한 욕망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이들의 은밀한 욕망은 그러나 그들의 삶, 부르주아적 안락함과 이를 지키기 위한 윤리에서 벗어나는 성격의 것이었다.

알베르티네가 꿈 속에서 남편의 처형장면을 보고 웃는 웃음은 그러나 깨어났을 땐 흐느낌으로 변할 가공할 것이었다. 프리돌린이 몰래 들어간 음란한 난교 파티는 프리돌린이 들어가서는 안될 금지의 영역이었다. 초대도 받지 않은 그가 파티에서 발각되었을 때 그는 목숨마저 빼앗길 뻔한 무서운 파티이기도 한 것이다. 그 대신 벌을 받아 목숨을 잃은 여자는 정체가 쉬원스레 밝혀지지 않지만, 프리돌린의 잠재의식 속엔 그의 부인 알베르티네의 상이기도 하다. 음란하면서도 프린돌린을 음란함에서 구원해주는 여자, 그것이 그의 부인이다.

하지만, 그 부인은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바, 부르주아적 성윤리를 갖는 그에 대해서 비웃음을 던지고 있는 여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프린돌린의 무의식 속의 부인이 차지하는 위상과 실제 부인이 갖고 있는 무의식은 정반대에 놓여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알베르티네도 말하듯이 그들은 꿈의 세계에의 여행을 통해 어떤 금지된 장소에까지 다녀 오는 '모험'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장소는 위선적이고 금욕적인 부르주아적 윤리를 뒤흔들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언제 또 그들의 평온한 삶을 덮칠지 모른다. '결코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라고 알베르티네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 꿈꾸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이야기의 서두, 그들 부부가 전날의 무도회에서의 서로의 행동에 대한 가벼운 질투와 힐난섞인 말로부터 욕망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게 되자 서로의 깊은 내면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자 프린돌린의 꿈같은 체험이 벌어지고 알베르티네의 범죄와 에로스가 섞인 이상한 꿈이 나타났다.

그들은 가면의 현실이 아닌 저 깊은 현실에 다가가자마자 금지와 욕망의 서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무사히 그 다른 현실, 가면 속의 현실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것은 정신 이상자가 자신의 무의식의 현실을 알아냈을 때 치료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는, 알베르티네가 말하듯이 '정말 깨어'난 것이다.

이 기묘한 '꿈의 소설'은 현실과 꿈의 구분을 흐려놓고 있다. 그리고 욕망이 얽혀 있는 도심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문명과 묻어버린 욕망과의 뒤틀린 관계를 보여준다. 큐브릭의 영화가 매혹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러한 원작의 현대성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영화는 우리 당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적 삶과 욕망의 모순, 그리고 현대 도시 속에서의 삶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기에 그렇다. 비록 100여년 전의 소설이지만 바로 우리의 삶의 비밀을 들춰내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어떤 당대 소설보다도 현대적으로 보인다. 좋은 소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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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 파리와 독일 20세기미술운동총서 22
미쉘 사누이예 / 열화당 / 199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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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독일의 다다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충실한 소개서인 <다다-파리와 독일>은 우리에게 낯선 베를린 다다를 소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베를린 다다는 다른 다다 운동과는 달리 짙은 정치색을 갖고 있었다. 이들 다다이스트 중에는 공산주의 운동과 직접 관여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비판은 무의미한 행위를 계속하는 것으로 예술 개념을 파괴하려한 쮜리히나 파리의 다다와는 달리 위정자에 대한 풍자에 다다의 공격성을 집중한다.

물론 이들도 기존의 예술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들의 예술행위를 해 나갔다. 예를 들면 포토 몽타주는 사진의 일부분을 오려내서 다시 조합해내는 작업이었는데, 이는 예술을 창조하는 예술가란 주체라는 관념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어떤 미적인 목적이 아니라 위정자나 군인들에 대한 비판과 선동을 위해 일종의 반예술의 예술을 만들어냈다. 베를린 다다의 쇠퇴는 이러한 왕성한 비판 자체가 야기한 갖가지 명예훼손 소송에 의해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베를린 다다의 활동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예술과 정치, 예술과 삶의 거리를 없애고 예술 자체가 온갖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는데 그 에너지를 쏟은 그 사건은 아마 예술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장면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면은 모든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시도하는 갖가지 반예술 행위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이런 반예술 행위마저 사회가 흡수해버렸다. 실제 다다가 기성 사회질서에 어떤 위협을 가해주었던데 비해 이젠 해프닝이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예술가가 삶의 껍데기를 파괴하고 삶을 근저에서부터 바꾸고 조직하려는 시도는 이젠 불가능한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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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 쮜리히.뉴욕 20세기미술운동총서 12
미쉘 사누이에 / 열화당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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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쮜리히 뉴욕>은 짜라와 발을 중심으로 하는 쮜리히 다다와 피카비아와 마르셀 뒤상을 중심으로 하는 뉴욕 다다의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한 책이다. 대부분 한스 리히터의 <다다>라는 책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후고 발의 탈당에 대해 짜라가 제안한 반예술을 위한 반예술론을 거절한데서 찾고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발의 탈당은 브르통이 파리 다다에서 탈당한 이유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를 개척하면서 다다를 괴멸시켜 버렸다면, 발은 새로운 예술운동을 개척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다 연감}의 한 대목을 저자는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1919년에 열린 거창한 발표회에 대한 보고문의 일절이었다. 그 중 '절대적인 무의식의 회로를 세우는데 성공했다.'라는 구절이 인상깊었다. 무의미하게 보이는 다다의 모든 해프닝은 사실, 무의식의 공간을 연다는 큰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 아닌가. 무의식 속에서 어떤 도발적인, 생산적인 무엇이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뒤샹의 작업에 대한 평가, 특히 [샘]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변기를 전람회에 보낸 일화를 화상들이 좌지우지하는 상업적 유통의 횡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로 평가하는 대목에 수긍이 갔다. 그리고 인용된 피카비아의 다음과 같은 말도 다다이스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것 같았다. '축제를 위해 완전한 준비를 하고서 삶을 건너야 한다.', '너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라, 이해해야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단지 네 자신이 모든 것에 거는 가치만 있을 뿐이다.' 피카비아의 이 말에서 다다이스트들이 얼마나 삶 그 자체로 돌아가려고 했는지 알수 있었다.

물론 삶 그 자체란 말이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삶 그 자체가 아닌 삶이 있는가?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삶의 생기를 잃어버리게 하는 모든 치장들, 이론들, 형식들을 혐오했다는 것을 삶 그 자체란 말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축제를 위한 준비가 있는가? 삶을 건너가고 있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은 어딘가에 결박당해 버리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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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자식들 외
옥타비오 파스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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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자식들>은 윤호병 역의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시론>-원제는 '흙의 자식들'이다-과 1990년에 출간된 <타자의 목소리>라는 두 권의 책을 한 권에 엮어 번역한 것이다. 스페인어에서 직접 번역한 김은중의 이 책 번역이 훨씬 좋다. 발된 한국어 번역문으로 외국 저자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맥락이 잡히지 않는 번역글을 읽는 괴로움은 다른 사람도 많이 겪어 잘 알리라.

<타자의 목소리>에 실린 글들에 대해서만 언급을 해보겠다. 이 책은 또 시기를 달리 한 세편의 시론 글을 모은 [시와 근대성]과 세기말 문학 상황을 다룬 [시와 세기말]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시와 근대성] 중 2. 단절과 수렴 부분은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시론>을 요약한 글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1. 이야기하기와 노래하기는 장시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3, 시, 신화, 혁명은 혁명의 역사에 대한 비판과 혁명과 시의 관계를 다시 살피고 있다. 특히, 3장과 [시와 세기말]은 1990년에 쓰여진 글인데, 이 글들은 <낭만주의->와 어느 정도 시각차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혁명에 대한 비판이 또렷하게 전개되고 비난의 어조가 강화되면서 자유 민주주의의 의의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시장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세기말의 시적 상황의 문제로서 시가 읽히지 않는다거나 시가 더 이상 걸작이 나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진단이 잘못된 것이라 비판하면서, 시는 어느 때보다도 많이 읽히고 있으며 걸작은 이후에 평가되는 것이기에 아직 모르는 것이고 이전의 걸작들도 당시대에 그런 명예를 얻은 적이 거의 없다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출판이 거대 자본화되고 독서가 소비화 되는 측면이라고 한다. 글을 상품 논리화 시켜 유통시키는 시장 자본주의 논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때 비판되는 것은 <낭만주의->에서 파스가 근대시의 대안으로 내세웠던 '지금-여기'라는 현재의 시간의식이다. 자본주의 시장 판에서의 소비는 지금-여기의 논리라는 것이다. 책은 지금 소비되고 망각된다.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성격을 증폭시킨 책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 파스가 이전 책에서 보였던 전위주의적 충동은 거의 사라진다. 소비 논리에 맞서 파스가 내세우는 것은 '고전성'이다. 근대시는 이전 문학 조류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일이었으며, 실제로 가려졌던 과거의 문학조류에서 전통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는 문학 고전에 대한 교육이 미래의 정치가를 위해서도 행해져야 하며 문학교육 역시 고전을, 그것을 사회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자료로 삼지 않고 문학으로서, 가르쳐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럴 때 공산주의 이후 문명을 구상할 새로운 정치 사상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또한 자유와 평등 원리를 잇는 형제애를 심는 작용을 할 것이라 그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는 일자와 다자 사이를 맺어주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으로 조화와 일치의 정신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시학을 보면 유기체적 시학으로, 전위적 충동을 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해석하는, 보수주의로 회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낭만주의->에서의 '지금-여기'의 시학은 신좌파의 새로운 반체제 운동에 고무받아 제기된 것임이 밝혀져 있었다. 1990년, 팔순의 노시인은 이제 고전과 인문교육에 미래를 걸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은 오늘날, 노시인의 진단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안 역시 공유해야할까? 미래를 생각한다는 면에서 이젠 이세상 사람이 아닌 노시인이나 나나 아직 근대성의 자식인지 모른다. 70년대에 내논 그의 대안은 숙고할 수 있지만 90년대 내논 그의 대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근대성의 역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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