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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노벨레 ㅣ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슈니츨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활약한 오스트리아 작가라고 한다. 프로이트와 동향 사람이고, 또한 그와 같은 세대에 속하기도 하는 이 작가에 대해 사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이라는 기묘한 영화를 본 후 그 영화의 원작이 바로 이 <꿈의 노벨레>라는 작품인 걸 알고서야 이 책과 작가를 알게 되었고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정신 의학 분야에서 추구하고 발견한 것을 역시 의사출신인 슈니츨러는 소설에서 추구했다라고 이 책의 해설에선 말하고 있는데, 정말 이 소설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일종의 탐험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라고 여겨졌다. 꿈이 은밀한 소망의 충족 장소라고 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인 프리돌린이 겪는 기묘한 이야기와 이에 대응되는 프리돌린의 부인 알베르티네의 꿈은 중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직업인 부부의 은밀한 욕망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이들의 은밀한 욕망은 그러나 그들의 삶, 부르주아적 안락함과 이를 지키기 위한 윤리에서 벗어나는 성격의 것이었다.
알베르티네가 꿈 속에서 남편의 처형장면을 보고 웃는 웃음은 그러나 깨어났을 땐 흐느낌으로 변할 가공할 것이었다. 프리돌린이 몰래 들어간 음란한 난교 파티는 프리돌린이 들어가서는 안될 금지의 영역이었다. 초대도 받지 않은 그가 파티에서 발각되었을 때 그는 목숨마저 빼앗길 뻔한 무서운 파티이기도 한 것이다. 그 대신 벌을 받아 목숨을 잃은 여자는 정체가 쉬원스레 밝혀지지 않지만, 프리돌린의 잠재의식 속엔 그의 부인 알베르티네의 상이기도 하다. 음란하면서도 프린돌린을 음란함에서 구원해주는 여자, 그것이 그의 부인이다.
하지만, 그 부인은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바, 부르주아적 성윤리를 갖는 그에 대해서 비웃음을 던지고 있는 여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프린돌린의 무의식 속의 부인이 차지하는 위상과 실제 부인이 갖고 있는 무의식은 정반대에 놓여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알베르티네도 말하듯이 그들은 꿈의 세계에의 여행을 통해 어떤 금지된 장소에까지 다녀 오는 '모험'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장소는 위선적이고 금욕적인 부르주아적 윤리를 뒤흔들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언제 또 그들의 평온한 삶을 덮칠지 모른다. '결코 미래를 속단하지 마세요.'라고 알베르티네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 꿈꾸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이야기의 서두, 그들 부부가 전날의 무도회에서의 서로의 행동에 대한 가벼운 질투와 힐난섞인 말로부터 욕망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게 되자 서로의 깊은 내면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자 프린돌린의 꿈같은 체험이 벌어지고 알베르티네의 범죄와 에로스가 섞인 이상한 꿈이 나타났다.
그들은 가면의 현실이 아닌 저 깊은 현실에 다가가자마자 금지와 욕망의 서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무사히 그 다른 현실, 가면 속의 현실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것은 정신 이상자가 자신의 무의식의 현실을 알아냈을 때 치료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는, 알베르티네가 말하듯이 '정말 깨어'난 것이다.
이 기묘한 '꿈의 소설'은 현실과 꿈의 구분을 흐려놓고 있다. 그리고 욕망이 얽혀 있는 도심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문명과 묻어버린 욕망과의 뒤틀린 관계를 보여준다. 큐브릭의 영화가 매혹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러한 원작의 현대성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영화는 우리 당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적 삶과 욕망의 모순, 그리고 현대 도시 속에서의 삶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기에 그렇다. 비록 100여년 전의 소설이지만 바로 우리의 삶의 비밀을 들춰내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어떤 당대 소설보다도 현대적으로 보인다. 좋은 소설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