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간 창비시선 152
백무산 지음 / 창비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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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90년대 초의 노동문학이 과학적 진실의 선전, 행동을 위한 선동, 자본에 대한 비판, 풍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지만, 그것이 일면성을 벗어나려면 좀 더 큰 세계관, 우주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의 시집은, 첫 시집 이후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시인이 결코 활동을 멈춘 것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세계를 넓히려는 사상적, 문학적 노력을 계속 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이 시집이 이전 백무산 시의 투쟁성이 탈각되어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갔다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시행을 보면 백무산의 새 시편들이 그의 첫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의 연장선상의 발전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너와 나의 관계에도/ 아침에 먹은 밥상 위에도/ 국가의 질서가 고스란히 박혀있다/ 지배와 착취의 질서가 고스란히 박혀있다/ 부분이라고 전체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모든 것이 전부인 이유] 중에서)

인용 시의 4행까지는 백무산의 예전 시를 보는 듯하다. 그것은 백무산이 예전의 당파적 사고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사고가 좀 더 깊이 있게 변모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다섯째 행에서 나타난다. 전체를 통해 부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분을 통해 전체를 봄으로써, 부분을 하나의 틀 속의 요소로 보지 않고 부분이 자체 소우주를 가지고 있음을 통찰하려는 자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 시에서 보여주었던 사회과학적 인식의 시적 변용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부분에 대한 시적 통찰을 하겠다는 것, 또는, 불교적 통찰을 시도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래서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사고에서 '모든 것이 전체'라는 인식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의 눈을 가녀린 자연물들에게로 돌리고, 그 관찰을 통해 '운동의 힘'에 대한 통찰을 할 수 있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시에서 '뿌리와 가지를 먹고 자랐으나/ 그들과 단절한 꽃을 보아라/ 우리의 경계는 그곳에서도 시작된다'([모든 것이 전부인 이유] 중에서). 그는 가녀린 꽃에서 단절의 힘, 혁명의 힘을 보게되는 것이다.

백무산의 시는, 노동문학의 소생은 아마 좀 더 큰 세계관을 획득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당파성을 버리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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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피리
한하운 지음 / 미래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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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초기 시들은 문둥이로서의 체험을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가히 충격적이다.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전라도 길] 중에서)이라든지,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손가락 한마디] 중에서)와 같은 문둥이만이 경험할 수 있는 육체의 일부분이 어이없이 절단되는 것을 담담히 묘사할 때, 그는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슬픔과 한을 그려낸다.

이러한 한 체험의 실체성은 후대의 민중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김지하의 [황토]라든가 박노해의 [손무덤] 등은 [전라도 길]과 [손가락 한마디]와 그 모티브가 비슷하다. 또한 김지하나 박노해 시의 고난스러움과 분노의 감정들은 7-80년대 가혹한 사회 상황으로부터 그 내용을 얻고 있는데, 그렇다면 7-80년대에 산다는 것이 결국 문둥이로서 산다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하운의 시를 통해 역으로 느낄 수도 있음직 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시들, 가령 문명 비판 시들은 그 예각이 별로 날카롭지 않다. 또한 음성 나병으로 판단되어 사회로 복귀한 이후의 시들은, 이전 시에서 느낄 수 있었던 체험의 직설성에 의한 충격이 시에서 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기의 문둥이에 대한 시들은 서정주가 쓴 문둥이에 대한 시와 같이 일정 정도 대상화되어 인생의 비극을 나타내기 위한 제재 정도로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하지만 그의 후기 시들의 서정적 연시들은 매우 빼어나다. '꽃잎이 알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 가슴에 안기네'(踏花歸 중에서)와 같은 시 구절은 매우 아름답다. 사랑의 대상은 이미, 시적 화자가 문둥이로서 유형 간 동안에 멀리 가버렸던 것이어서, 꽃잎을 사랑의 대상과 동일화시켜 그 대상을 육체적으로 생생하게 느껴보려고 하고 있다. 그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슬픔이 꽃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단정히 그려져 있다.

그의 후기 시들에서 보이는 경향은 또한 탐미적 성향이다. [은진 미륵불]이나 [한 여름밤의 빙궁],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서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노력이 보인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공허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기시의 또 다른 특징은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언어 절제, 반복의 잦은 사용을 들 수 있다. 시의 형식에 대한 집착이 후기시에 올 수록 깊어진다는 것을 그것은 나타낸다. 그러나 역시 김소월-박목월 식의 직설성과 절제의 조화에 비하면 그 감화력은 그다지 깊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성과로서 축적되진 않아서인지 그의 다른 시에 별 그 실험의 영향이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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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원리 1 - 더 나은 삶에 관한 꿈
에른스트 블로흐 / 솔출판사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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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스트인 에른스트 블로흐는 환상의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더불어 유토피아적 성격을 지적하여 환상의 긍정성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환상은,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비참함을 넘어 더 낳은 삶을 살고 싶다는 갈망을 투사하여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환상은 사람들을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측면이 있고 이를 비판해야 하지만 또한 그 환상에서 표현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갈망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갈망이 제 길을 찾으면 현상을 넘어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으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쁜 현실을 철폐하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선 '先取하는 의식'이 필요한데 그 의식은 먼저 환상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선취하기 위해선 갈망 속에서 상상력을 발동하여 있었던 것이 아닌 아직 없는 것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환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문학 예술은 바로 이 아직 의식되지 않는 것을 드러내왔기에 블로흐에게서 문학은 높은 평가를 받게 되고 문학에서 나타나는 환상적 성격도 적극적으로 평가된다. 프로이트가 밤 꿈의 세계만 연구하고 낮 꿈도 밤 꿈에 의거해 해석하며 또 그 해석도 어린 시절의 욕망, 즉 과거의 좌절된 욕망에 의해 해석한다면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현재를 과거에 의거해 설명하기에 보수적이고 퇴행적이라고 블로흐는 프로이트를 맹비난하는데, 문학을 낮꿈에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은 사실 프로이트와 일치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매우 다르다. 블로흐는 낮꿈이 억압된 욕망과 관련되었다기보다는 의식적이고 자유로우며 미래에 대한 기대와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전단계로서의 낮꿈'의 환타지는 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위해 진보적으로 기능할 수 있고 또 낮꿈의 발전적 산물인 문학의 환타지 역시 건설적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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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198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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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분신,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친구들에게 당부하며 죽어간 전태일에 대한 감동적인 평전. 조정래 변호사가 수배 당해 경찰에 쫓겨다니고 있을 때 이 평전은 쓰여졌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의해 쫓기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급박한 심정을 가지고 써서 그런지, 이 책은 가슴 벅찬 뜨거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저자가 전태일이 남긴 글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가난 속에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뜨겁게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문체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평전 안엔 고등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전태일의 글이 적재적소에 인용되는데, 우리는 그의 열정어린 삶에 대한 고민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다. 15년 전, 이 책이 금서였을 때 읽었던 이 평전엔 막바지 부분에 전태일의 유서가 실려 있는데 이전에 느꼈던 전기 맞은 듯한 전율과 감동이 아직도 느껴진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평전을 보면 전태일이 얼마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알 수 있다. 가령, 죽으면서 안타깝게 자신의 죽음이 헛되면 안된다고 당부하는 모습은 그는 더 살고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이 헛되게 된다면 그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20대의 청춘을 접는다는 결단은 그만큼 삶에 대한 사랑 속에서 힘들게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그래서 헛되지 않게 되었다. 전태일은 친구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억압과 착취를 그대로 인고하며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뜨거운 상징으로 여전히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상징을 구체적으로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아직 부당한 과잉 노동과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들은 삶을 지탱해주는 힘을 얻기 위해 이 책을 펼쳐들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인이라면, 이 세상을 좀 더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나도 15년 전, 이 책을 통해 세상에 대한 교과서적 교육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고 고통에 찬 세상이 대한민국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체험에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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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부채 - 문학아카데미시선 138
박남주 지음 / 문학아카데미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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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주는 어떤 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변화하기 위한 힘이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탐구한다. 가령, '부채의 무게중심을 생각해 보았다/ 힘은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연속무늬가/ 한가운데 힘을 끌어모으고 있다가/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보인다'([단오부채] 중에서)라고 말하는데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어떤 점에서 시작해 부챗살로 뻗어나가는 단오 부채의 모습에서 그 뻗음의 힘을 생각해보고 있다.

시인은 부채에서 '뱃속에서부터', '한가운데 힘을 끌어모으고 있다가/ 밖으로 내보내는' 것, 힘의 응집에서 터져 나오는 힘을 발견한다. 그 힘의 확산은 '끝도 없어 보이는 연속 무늬'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뱃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부채를 동물, 인간의 차원으로 변환시켜 부챗살이 표현해주고 있는 힘의 모습이 바로 삶 속에서 우리들의 힘을 만드는 방법을 나타내준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우리 삶의 무늬를 펼쳐 내기 위해선 힘을 뱃속으로 끌어 모으고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이 무늬 피워내기가 바로 삶의 변화, '--로 되기'를 말하는 것일게다.

이 다른 존재로 '되기'의 힘이 바로 부챗살 을 펼치는 '뱃속의 힘'일 것인데, 힘 자체는 주체와 무관한 하나의 객관적인 물질 같은 것으로 시인 자신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지구의 자장선을 따라간다/ 몸 속에 간직한 천연 자성물질/ 자철광이 끄는 대로 움직인다//...//...파닥이며 지구의 자장선을 따라가는/ 나는 본래 한 마리 제중왕나비였다/ 몸속에 흐르는 이 뜨거운 빛줄기/ N극과 S극이 나의 몸안에서/ 팽팽히 서로 줄을 끌어당기고 있는 한.'([내 몸 안에 지구가 들어와 있어] 중에서)이라고 시인이 말하고 있듯이 시인을 이끄는 힘은 지구 자체, 지구의 자철광이다.

자력을 몸 속에 받아들여 모으고 부챗살이 퍼지듯 힘을 발산시킬 때 지구의 자장선을 따라 날아갈 수 있다. 그런데 지구의 자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몸 안에 '긴장'을 발생시킨다. N극과 S극이 서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힘의 장을 시인은 '물'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더욱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물의 표면은 팽팽하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서로 밀고 당기고 있는 힘의 균형
중심을 향하여 가슴을 맞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고요한 물의 표면
몸을 안으로 끌어당겨 둥글게 말아쥔
내 무게 중심은
어느 누구도
감히 흐트러뜨리지 못한다.

평온한 물의 상태에서 팽팽한 힘의 균형을 시인은 발견하는데, 그 힘의 팽팽함은 바로 '뱃 속으로 끌어 모은' '무게중심'을 만들어준다. 갖가지 방향의 힘을 몸 안으로 받아들여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는 것, 그것이 고요한 물이며 바로 '단오부채'다. 고요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 팽팽한 긴장 상태를 내장한 물의 힘은,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엄청난 힘을 보여줄 수 있게 되는데, '부드러운 물의 힘이/ 쇳덩이로 만든 배의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물은 잠시도 제 움직임을 그치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액체도 힘을 만들어낸다] 중에서)리는 모습이 그 모습이다.

부드러운 물이 강철 배를 떠올리고 흔들리게 하는 힘. 하지만 그 힘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마치 팽팽한 긴장이 고요를 만들어내는 역설처럼 딱딱한 것을 부드러움은 떠받치고 흔들리게 한다는 역설. 물의 '긴장의 줄을 당기는 소리로 팽팽한/ 그 가운데 내가 서 있'([바람-바다] 중에서)을 때 나의 삶은 변환될 수 있다. 물의 힘을 나의 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부챗살의 무늬를 피워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의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물과 같이 흘러다닐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 흐름의 존재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변환의 존재가 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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