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리피리
한하운 지음 / 미래사 / 1991년 11월
평점 :
절판
그의 초기 시들은 문둥이로서의 체험을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가히 충격적이다.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전라도 길] 중에서)이라든지,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손가락 한마디] 중에서)와 같은 문둥이만이 경험할 수 있는 육체의 일부분이 어이없이 절단되는 것을 담담히 묘사할 때, 그는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슬픔과 한을 그려낸다.
이러한 한 체험의 실체성은 후대의 민중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김지하의 [황토]라든가 박노해의 [손무덤] 등은 [전라도 길]과 [손가락 한마디]와 그 모티브가 비슷하다. 또한 김지하나 박노해 시의 고난스러움과 분노의 감정들은 7-80년대 가혹한 사회 상황으로부터 그 내용을 얻고 있는데, 그렇다면 7-80년대에 산다는 것이 결국 문둥이로서 산다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하운의 시를 통해 역으로 느낄 수도 있음직 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시들, 가령 문명 비판 시들은 그 예각이 별로 날카롭지 않다. 또한 음성 나병으로 판단되어 사회로 복귀한 이후의 시들은, 이전 시에서 느낄 수 있었던 체험의 직설성에 의한 충격이 시에서 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기의 문둥이에 대한 시들은 서정주가 쓴 문둥이에 대한 시와 같이 일정 정도 대상화되어 인생의 비극을 나타내기 위한 제재 정도로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
하지만 그의 후기 시들의 서정적 연시들은 매우 빼어나다. '꽃잎이 알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 가슴에 안기네'(踏花歸 중에서)와 같은 시 구절은 매우 아름답다. 사랑의 대상은 이미, 시적 화자가 문둥이로서 유형 간 동안에 멀리 가버렸던 것이어서, 꽃잎을 사랑의 대상과 동일화시켜 그 대상을 육체적으로 생생하게 느껴보려고 하고 있다. 그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슬픔이 꽃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단정히 그려져 있다.
그의 후기 시들에서 보이는 경향은 또한 탐미적 성향이다. [은진 미륵불]이나 [한 여름밤의 빙궁],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서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노력이 보인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공허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기시의 또 다른 특징은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언어 절제, 반복의 잦은 사용을 들 수 있다. 시의 형식에 대한 집착이 후기시에 올 수록 깊어진다는 것을 그것은 나타낸다. 그러나 역시 김소월-박목월 식의 직설성과 절제의 조화에 비하면 그 감화력은 그다지 깊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성과로서 축적되진 않아서인지 그의 다른 시에 별 그 실험의 영향이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