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을 읽는 동안, 마치 숙련된 북 큐레이터가 내 앞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12권을 한 권씩 펼쳐 보이며 이야기해 주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다자이의 문장들을 뜯고 즐기고 만끽하다 보니, 책을 덮은 후 자연스럽게 그의 원작들을 한 권씩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작가의 조건은 풍부한 상상력과 더불어, 그 안에서 탄생하는 인물들이 동화 속 캐릭터가 아닌 현실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생생함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다자이 오사무는 바로 그런 작가다. 인간의 이면과 본질을 꿰뚫는 그의 문장 속에서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다.
이 책의 구성은 실로 알차다. 소설의 간단한 줄거리, 작품에서 인용한 문장들, 그리고 북 큐레이터의 세심한 해석이 조화를 이루며, 어렵게만 느껴졌던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를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였다. 그의 영감 앞에서 소름이 돋는 이유다. '슬픔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빛나는 사금의 알갱이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그는, 부인과 함께 끌어안은 채 마지막 순간 행복감을 느꼈을까? 그 물음이 가슴에 남는다.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한 그의 글 속에서 나는 위안과 위로를 받았다. 특히 <비용의 아내>에서 일이라는 것을 별것 아니라고 말하는 대목, 걸작도 졸작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통찰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종종 과한 욕심 때문에 고난을 자초하고 힘들어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공들인 작품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우연히 쓴 글이 대박을 터뜨리는 사례를 우리는 종종 목격하지 않는가.
센텐스 출판사의 '문장의 기억' 시리즈 네 번째 책인 이 책이 이토록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같은 시리즈의 안데르센, 셰익스피어, 버지니아 울프 편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에 나오는 금수저 장녀 가즈코를 더 자세히 만나보고 싶다. '회복탄력성'을 지닌 그녀가 귀족에서 하류 인생으로 전락하며 처절하게 살아가는 모습, 이승 밖으로 몸을 던져도 모를 정도로 비참한 상황에서도 '죽을 각오로' 새 출발을 시도하는 그 주인공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다자이 오사무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통찰력을 승화시켜 본래의 개인적 느낌을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 그래서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이 강력한 이유는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개개인의 경험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완전하지 않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스스로 팔자를 꼬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하며, 약속 하나를 지키기 위해 달려가기도 하는 인간의 복잡한 면모들. 이 모든 것을 한 권에서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
끊임없이 불안을 안고 사는 현대인에게 다자이 오사무는 사람의 본질, 그 어두운 면을 마주 보게 하는 힘을 가진 작가다. 회피하지 않고 하나씩 쪼개어 자기 인식의 기회를 선사하는 그 즐거움을, 더 많은 이들이 만나보기를 희망한다.